너와 함께 있으리라

  • 한인 예배 (2003년 04월 20일)
  • 출 3:1-15
  • 설교자: 이종실

030420 부활주일
출애굽기 3:1-15
너와 함께 있으리라

<본문>
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9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설교>
오늘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1절)

이 본문은 우리들에게 양떼를 모는 나이 80의 촌부 모세의 모습에 대해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도망한지 40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80에 가까운 노인이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그는 노예로 고통당하는 히브리 동포들을 도우려는 의협심이 충만했습니다.
의로움을 추구하는 그의 열정은 뜨거움으로 불탔고 그래서 그는 동포를 학대하는 애굽인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동포를 노예로 취급하는 애굽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자신의 동포들의 지지를 얻지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체코의 조그마한 한인사회를 한 예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다 능력있는 분들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을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나라와 민족 아끼고 봉사하고 그리고 보편적 인류사랑을 원하는 분들입니다.
옳은 일을 실천하는 마음과 뜻이 있는 분들이 모여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러한 마음들이 우리들의 실생활에서 피부로 와서 닿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마음과 뜻들이 시기와 질투와 경쟁심과 권위의식에 가리워져 있는 것을 경험할때가 종종있습니다.
이런것을 경험할때면 상실감과 좌절감을 느낍니다.
이것이 쌓이고 쌓여 내가 몸담은 내 사회 내 이웃을 향해 침을 뱉고 저주를 하게 됩니다.
이제 체코에 온지 한 두주 되는 분들의 입에서 체코는 터가 세다 고 하면서 자신의 사회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됩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모세가 얼마나 커다란 좌절감을 겪었을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살인자로 반역자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을 하면서도 더 이상 삶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그의 발걸음은 천근의 무게를 느낄 만큼 무거웠을 것입니다.

제사장 이드로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일면식도 없는 미디안 땅에서 그는 나이 40이 되어 처음해보는 양치기 목자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양치기 일을 그는 지금 까지 살아온 시간만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40년간 매일 양 떼를 몰면서 젊은 시절 그의 마음을 불태우던 불이 서서히 불씨를 남기며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양떼를 몰고 다니는 80의 촌부의 모습에서 이전에 모세가 가졌던 야망 그 마음의 뜻을 더 이상 우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마음의 타던 불꽃이 꺼져가고 그 열기가 식어가는 만큼 그와 그의 가족들 사이에 평화로운 삶은 더욱 더 정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히브리 동포들은 이순간에도 애굽에서 숨차게 살고 있음에 분명하였습니다.
옛날 바로가 죽은 후에도 노예들의 상황은 바뀌지않았습니다.
그러나 애굽은 모세에게 먼 나라였습니다.
고통받는 자신의 동포역시 먼 나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지 않는 동포의 고통은 모세의 삶의 고민일 수 없습니다.
그의 눈앞의 가족과 양떼가 오직 그의 삶의 모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그의 작은 평화의 세상에 안주하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일상의 삶 속에 찾아오셨습니다.
모세가 그날 하나님앞에 예배를 드리다가, 성경을 보다가 그리고 깊은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떼들과 함께 일하다가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을 감리교회 이현주 목사님이 <너희가 나를 알게 되리라>는 그의 책에서 재미있게 해석을 합니다.
모세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서양 속담이 아니라 길 아니거든 가지 말라는 동양 속담에 따라서 살아간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치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 호렙산으로 스스로 방향을 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양치기는 이미 있는 풀과 물을 찾아서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 풀과 물이 모세를 호렙산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호렙산을 모세가 자기 발로 찾아 간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이끄시는 대로 발길을 옮기다가 다달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의 관계성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도 아닌 이 해외에서 우리가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체코의 전문가가 되어도 쉽지않은 일입니다.
그러니 체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처음에 일단 아는 사람을 통해 조그마한 정보를 얻습니다.
그리고 조금 생활이 익숙해 지면 먼저 아는 사람을 폐기처분하고 스스로 아는 사람을 만들어 갑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체코사람 아니면 아름 아름 알게된 체코사람 그들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계획을 추구해 갑니다.
인간관계가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면 한국인이 되었든 체코인이 되었든 오래가지 못합니다.
10여년 넘게 무수히 많은 한국인들이 오고 가는 삶을 보면 이 과정을 그리 벗어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사람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생활은 인간관계를 수단으로 결코 만들지 않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나의 삶의 목적으로 수단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다릅니다.
무엇보다 신앙으로 바라보는 자기 자신은 이기심으로 바라보는 자기 자신과 다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이곳에 저와 저의 가족을 보내신 분이 우리 주님이 아니십니까?
저와 저의 가족을 죽이든 살리든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런 기도를 드리면서 살고 계십니까?

신앙의 생활화, 생활의 신앙화가 철저히 되지않으면 우리는 이 외국 땅에서 하나님을 대할 수 가 없습니다.
나의 계획과 목적이 앞서는 한 우리 앞에 하나님이 나타나실 자리가 없습니다.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초와 물을 따라 양떼를 몰고가다가 그는 호렙산에 다다랐습니다.
거기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떨기나무는 불에 타지않고 있었습니다.
이미 다 타버려 재가된 사람, 모세 앞에  태우되 재를 만들지 않는 영원히 타는 불, 하나님의 불이 있습니다.

그 불로부터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때까지도 모세는 하나님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러 호렙산에 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초지를 찾아 양떼를 몰고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그 장소는 그의 일상의 삶 가운데 있습니다.
그가 늘 하던대로  양떼가 배불리 먹으면 떠났을 곳입니다.
늘 일상생활에 있는 평범한 장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서있던 곳을 지적하며 말씀하십니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우리들의 이기적인 발걸음을 누가 멈추게 할 수 있으며 그 신을 누가 벗겨줄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을 불태우는 욕망이라 불리우는 전차의 수레바퀴를 누가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자신들을 구원할 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죽이고 나서야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았습니다.
예수가 운명하시자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예수를 죽인 무리들과 백부장과 군인들이 고백을 합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

여기까지는 그래도 좋습니다.
뒤늦게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은 다시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는 구체적인 실천이기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스스로 고백한 그들이 전혀 다른 모의를 합니다.


이튿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마 27:6264)
그뿐만 아닙니다.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의 사건을 조작하고 왜곡합니다.

대제사장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마 28: 12-13)

이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이들과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받을까 두려워하여 숨어지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 도마는 믿지않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믿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이기적인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심각한 문제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지금까지 걸어왔던 이기적인 발걸음의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과 빛으로 채워지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듯이 우리들의 이기적인 마음을 비우면 빈 마음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과 뜻으로 동시에 채워집니다.
가족과 양떼로 채워진 모세의 마음에 다시 고통 받는 동포로 채워집니다.


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7-8절)

모세가 만났던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그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의 이기심을 벗기고 고통받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당신의 마음으로 채워주십니다.

이 말씀에서 마음의 이기심을 벗겨주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참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음하고 울부짖는 우리의 고통에 귀를 기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세상의 모든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의 자리는 실가닥 같은 희망도 없는 곳입니다.

저는 몇 년전에 오시엥침(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를 처음 방문하고 정말로 충격과 공포와 전율을 느꼈습니다.
한동안 밥맛을 잃었습니다.

문에 듣던 죽음의 가스실은 아닌지 샤워실 물꼭지를 바라는 저들의 눈, 시체 태우는 방의 굴뚝에서 오른 연기와 재를 바라보던 눈, 이
행렬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두려움에 떠는 눈, 그 눈들 속에 담긴 공포, 죽음보다 더 무서운 그 공포 보다 더 고통스러운 곳이
이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있는 한 그 자리는 고통의 자리임도 불구하고 절망의 자리라고 말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토록 전적으로 신뢰하던 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매달려 있는 곳 십자가 그곳이 바로 절망의 자리이고 가장 큰 고통의 자리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던 한 인간의 좌절은 이 세상 어떤 고통도 그에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단절되어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을 구하시기 위하여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까지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 (14절)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언제나 인간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려오셔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스스로 계신 이 하나님은 스스로 세 가지 일에 대해 물으신다고 했습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내 일을 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둘째,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셋째,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존경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상의 삶의 장소에서 신발을 벗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사명을 주십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9,10절)

모세는 이 말씀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전의 그 열망의 불꽃은 다 타버려 식어버린 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절)

그러나 주님은 모세의 질문에 대답하지않았습니다.
단지 그에게 약속만 하였습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가 아직 열정이 남아있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가 힘이 남아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는 하나님에게 상관이 없습니다.
모세가 자신에 대해 제기한 질문은 하나님에게 문제가 되지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모세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관대의 질문이 아니라 주님이 그와 함께 하심입니다.
체코의 작은 한국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지치게하고 실망하게 하고 허무하게 하는 끝없는 논쟁이 모세와는 그 표현이 다르지만 결국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모세는 부족한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며 인간 앞에선 우리는 자기 자존심에 대한 질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질문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들의 질문은 해외에 산다고 다 똑 같은 줄 아는가?
나는 당신과 다르다. 이겁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면 그렇습니다.
선교사면 다 똑 같은 선교사인가?
나는 체코의 개척선교사이다.
그래도 경험으로나 공부로나 나 만큼 선교를 준비했나?
프라하에 한인교회가 두개 있는데 교회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그리고 선교적으로 정통성이 내가 목회하는 교회가 아닌가?
은근한 자존심과 우월심, 이것이 궁극적으로 모세의 질문 내가 누구관대? 입니다.
이것은 제 자신을 부패하게 만들고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건강하게 살려면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대 라는 자신의 질문이 아니라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발걸음의 신을 벗은 사람이 오직 가져야 할 관심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파송의 말씀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좌절과 근심에 휩싸여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교회당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의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구원의 사역을 제자들에게 부탁하고 그들을 파송하십니다.
파송을 하면서 목사인 저에게 파송장을 주고 생활비와 선교비의 계약서를 주고 평신도인 여러분들에게 돈 잘 벌리는 사업장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저와 여러분을 파송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저와 여러분들의 열정과 노력 때문에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사랑하시어 고통받는 이들을 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존재하시고 스스로 일하시는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열정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부활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응답은 우리들의 신앙의 열정을 다시 불태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우리의 발걸음의 신을 날마다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붙잡고 그것을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충족한 삶을 체험하는 교우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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