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02년 03월 03일)
- 요 2:13-22
- 설교자: 이종실
02/03/03(사순절 세번째주일)
본문: 요한복음 2:13-22
오
늘 복음서는 엄격하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성전청결 이야기 입니다. 요한복음에 그 성전청결 이야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첫번째 여행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유대인의 대절기인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가셨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기억하는 축제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유월절 축제를 통해 매년 자신의 백성을 구원한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기억하고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갈 때 성전 뜰이 상업지역으로 바뀐 것을 보았습니다.
예
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던 그날 축제의 찬송을 부르며 경건하게 성전으로 들어갈 수 가 없었습니다. 제일 먼저 장사꾼들의 임시로
지은 조그마한 판매건물과 가판대 사이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장터는 성산 맞은편 올리브산에 열리게 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짐승 파는 사람들 돈 바꾸는 사람들의 그 행위를 반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짐승을 팔는 사람들은 장거리 여행을
하며 이 유월절 축제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성전 가까운 곳에서 짐승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환전하는
사람들 역시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나 다른 나라의 돈으로 헌금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로마
황제나 다른 통치자들의 그림이 있는 동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십계명은 그러한 다른 그림이 있는 돈을 헌금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환전하는 사람들은 율법이 금하는 돈을 유대인의 법이 허락하는 돈으로 바꾸어주고 있습니다. 가축을 파는 사람들이나
환전하는 사람들이 일을 잘하면 그들의 일은 올바른 유월절 축제에 기여하는 일이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축파는 사람들과
환전하는사람들의 그 일에 대해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금 장사행위를 하는 장소에 대해 공분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 안을
장터로 만든 것을 예수님은 싫어하고 계십니다.
한 성서학자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자신을 지지하던 사업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영업을 허락한 그 년도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가야바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사업가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자신을 지지하는 사업가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확실하게 챙겨줍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축제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던 그 해에 가야바의
결정이 내려졌다면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영업을 하던 사업가들에 매우 엄격하게 반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것입니다. 영업은
사업가들의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야바도 자신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일이 있습니다.
같은 장소 성전에서 이와 같은 세가지 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못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는 순종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 때문에 당시 사회질서와 권력의 구조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던 자들은 무슨 권한으로 당시 성전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는지 알기를 원합니다. 그의 권한이 로마의 황제로부터 인지
아니면 빌라도로부터 부여 받은 것인지 질문합니다. 누가 장사하는 일들을 방해할 권한을 그에게 주었는가?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성전 안
영업방해 행위 허락서를 요청하였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문서를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예언자의 전통에 따라 그들에게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한복음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청중들은 언제나 성전에 대한 그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예
수님의 제자들도 그리고 예수를 반대한 자들도 성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성전건축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이 성전을 자신의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사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부활
사건을 예고하고있습니다.
부활의 선언은 예수의 반대자들의 권력과 상업주의자들의 권력과 모든 권력구조에 도전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이 우상 숭배임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체
코 공화국에 좌파정부가 통치하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엘 살바드로에서는 우파 정부가 권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남미에 있는
그 조그마한 나라에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로메로“ 라는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불의한 우파 권력에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로메로는 자신의 생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암살특공대의 위협을 겪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1980년 3월 제단에서 성만찬을 집례하는
중에 총격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이 세상의 가치들이 어떻게 성만찬에 위협이 될 수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로메로 대주교로부터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일의 현대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들이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더 넓은 시각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들의 노력과 우리들의 비젼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애동안 우리들은 단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아름다운 사역의 조그마한 한 부분만을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어떤 것도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뉴스도 모든 것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누구도 완전히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지못합니다.
어떠한 신앙고백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결과를 가져오는 어떠한 목회자의 심방도 없습니다. 교회의 전도와 봉사를 충족시키는
어떠한 선교 프로그램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포함하는 어떠한 목적도 목표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젠가 자라날
씨앗을 심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희망 안에서 심은 씨앗에 물을 뿌립니다. 우리는 내일을 위해 필요한 모퉁이 돌을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노력이 우리들의 능력 이상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없지만 우리들은 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무엇인가 시도하도록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을 잘 하도록 하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하는 하나님의 일이 불완전할 지라도 그것은 시작이며 우리들의 하나님의 일은 한걸음씩 더 멀리 전진할 것이며, 우리들에게
안식을 주는 하나님의 은총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들이 결과를 전혀 모른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포도원의 일꾼과 창조자의 차이점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꾼이지 창조자가 아니며 우리들은 신도들이지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들은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예언자들이지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일하신 것 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일해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