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궁극적 해결

  • 연합 예배 (2003년 04월 06일)
  • 요 11:17-44
  • 설교자: 이종실

030406ek 
Jan 11:17-44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죽음을 등에 업고 다닙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 가운데 죽음은 가장 잔인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잊고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느날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 일어났던 사건처럼 죽음을 만납니다.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이 만연했던 그 당시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은 예수님이 편히 쉴 몇 안 되는 곳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고통이 이 집에 닥쳤습니다.
나사로는 치유할 수 없는 중병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가족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었습니다.

어제까지 그들은 언제나 즐겁고 웃음이 있는 행복한 가정이었지만 다음날 고통이 저 바닥까지 그들을 밀어떨어트렸습니다.
그들은 질병과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한적이 없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들은 인간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장사된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갔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22)
주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이에 마르다가 대답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가 말한 이 구절은 유대주의 특히 바리새인의 정통 교리였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것에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나는 압니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녀는 하늘과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아는 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고있습니까?
마르다의 경우, 그녀의 고백이 도움이 되지않았습니다.
그녀가 했던 것 처럼 죽음 후에 일어난 것에 대한 일반적인 희망에 대한 교리를 아는 것이 그녀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가 직접 우리자신 또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의 현실이 닥쳤을 때 죽음 후의 문제에 대한 희미한 희망은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대담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한 질문이 얼마나 굉장한가!
주님은 그녀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였을 때 그녀가 예수를 믿느냐 아니냐 예수님이 그녀에게한 질문입니다.
그는 그녀가 단지 도식화된 진리를 믿느냐 아니냐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교리를 그녀가 믿는지에 대한 질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그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했을 때 그를 믿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마르다는 그 질문에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가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마리아가 일어나 예수께로 갔습니다.
그녀는 예수를 보자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마르다가 한 말을 똑같이 하고 그리고 울었습니다.
그 주위의 사람 모두도 통곡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보았을 때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주님은 분노와 흥분을 느꼇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가 우리 눈으로 거칠고 무서운 협박하고 맹렬히 ㅅ람의 생명을 깊은 슬픔으로 몰고가는 죽음의 힘을 보았을 때 우리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우리는 흥분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단지 나사로를 사랑하기때문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있는 비참한 인간의 상황 때문에 슬퍼하셨습니다.

자신의 슬픔과 한숨에서 사람은 슬픔과 눈물을 함께 흘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너는 나를 믿느냐”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들에게 부드럽게 묻고계십니다.
우리가 필요로하는 것은 교리나 규범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덤 앞으로 걸어가/ 섰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놓으라” 명령하였습니다.
그들이 돌을 옮겼을 때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은 무덤안으로 울려퍼졌습니다.
그러자 죽은 자 나사로가 손과 발을 베로 동인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주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것 즉 메시지입니다.

나사로와 그의 집은 죽음의 세력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우리들이 바로 나사로와 그의 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단지 육체적 죽음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고생, 병들고 늙고 결국 육체적으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보다 더 깊은데 있습니다.

에베소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죽었던 여러분”은 짧은 표현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의미하는 그런 의미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비록 살아있지만 죽었던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관계 다시말씀드려 생명의 근원이 없기때문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없다면 육체적인 죽음이전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생애 어디에도 희망이 없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의 슬픔과 절망이 있다면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고 영적으로 죽은것입니다.

무덤의 나사로는 분명히 인간의 상황을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기에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고 그리고 귀한 삶의 시간이 우리들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명의 근원을 스스로 잘라버리고 자신의 존재의 귀함을 상실하고 생명의 불꽃을 상실합니다.
죽은 물고기처럼 파도에 따라 움직이듯, 그들은 세상의 악의 세력에 의해 끌려다니고 욕심에 의해 조종당하고 그리고 생명의 그릇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지않고 미움과 속임으로 살아갑니다.
마르다는 말합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지 나흘이되어 시체가 부패되고 악취가 났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은 은혜로 받은 풍성한 생명을 상실하고, 청결함이 한조각도 없게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부패하고 썩는 냄새가 나서 시체가 된 나사로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음성이 무덤안으로 울려퍼졌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사로의 이름을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나사로가 무덤의 흔적을 지닌채 나왔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 이 부름은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의 외침이었습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죄와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여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 사건으로 유대 종교적인 권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3절에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주님은 무덤으로부터 나사로를 불러내고 자신의 생명을 바꾸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러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무덤에서 불러내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오늘날 이 세상을 향하여 큰 소리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커다란 음성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사명의 실천을 통하여 무덤 안에 있는 아직도 죄의 냄새와 죽음이 가득찬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무덤 밖에서 큰소리로 부르십니다. “너의 무덤으로부터 나오라”
무덤안은 저와 여러분들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생명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무덤으로부터 나아갑시다.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무덤을 떠나 예수께 나아올 때 우리들은 살것입니다.
우리들은 진정으로 살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될 때 우리들은 영생의 삶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궁극적 해결이 있습니다. (아멘)

Subscribe
Notify of
guest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0 Comments
Inline Feedbacks
View all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