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사]11. 동서유럽 강대국의 통치 1938-1949

11. 동서유럽 강대국의 통치 1938-1949년

1938년까지 체코형제개혁교단의 교인숫자는 325,000명으로 늘어났다. 200개 개교회와 219개의 기도처에서 약 200여명의 목회자들이 그들을 영적으로 돌보아 주었다. 100개의 교회당이 신축 또는 개축되었다. 이어지는 독일 파시스트 위협의 시대에서 변화하는 세계의 사회와 정치 문제들이 교회의 과제로 다루어져야 했다.

1938년에 서유럽 강대국들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강화되는 압력에 굴복하여 “뮌헨 협정”에 의해 3백만 명 수데텐 독일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의 분리와 나찌 독일 제국의 합병 동의를 하였다. 이 수데텐 지역의 체코인 거주민들은 체코와 모라비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다. 1939년 3월 그러나 히틀러는 나머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을 점령하였다. 소위 “보호령”이란 법규는 6년간의 독일 나찌 점령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6개월 후 1939년 9월 1일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체코와 모라바의 보호령”이 존재하는 엄격한 독일 통치하의 체코 영토 전역에서 전쟁의 요인이 잠복 되어 있었다. 게슈타포에 의해 지도되는 나찌들이 여기서 공포정치를 자행하였다. 유태인들은 제거되었고 체코 민족의 모든 계층들 특별히 지식계층은 강압에 굴복하였다.

교회 역시 나찌 정복의 시대에 가장 다양한 형태의 억압으로 박해를 받았다. 많은 목회자들 교인들이 반나찌 저항운동에 참여하였고 감옥이나 수용소에 갇혔다. 저항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축출을 당하고 교회의 많은 젊은 교인들은 독일 제국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폐교된 체코대학 가운데 개혁 신학부도 있었다. 당시 체코형제개혁교단은 젊은 신학도들을 위해 신학수업의 비밀 장기과정을 만들었다. 전쟁 직후에 학업을 끝마치고 교회 봉사를 위해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았던 소위 “집사”들이 이 방법으로 교육을 받았다.

1945년 전쟁 후 나찌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고 수데텐 독일인(약 350만 명)의 대부분이 독일로 추방되었다. 몇몇 개교회들뿐 아니라 전후 체코형제개혁교단이 수데텐 독일인들의 삶의 파괴 문제를 다루었다. 많은 체코 기독교인들이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특별히 어린이들을 돌보아 주었다. 옛 수데텐 독일인들이 살았던 비어있는 지역에 새로운 정책자들 실레시아(Slezsko),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에서 귀향한 체코 개혁교도들이 정착하였다. 이로 인해 체코형제개혁교단은 특별히 체코 서부지역에서 새롭게 교회를 설립하고 조직하는 과제를 갖게 되었다. 교세가 270개 개교회 그리고 이지역에서 400개 기도처 그리고 약 350,000으로 늘어났다. 몇몇 국경지역 개교회에서 독일 예배가 진행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 전쟁직후 독일인 약 160,000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 중에 많은 개혁교인들은 체코형제개혁교단의 교회로 가입하였다. 예로 아쉐(Ase) 흐라니체(Hranice) 야히모바(Jachymova) 그리고 베이쁘르띠(Vejprty) 이다.

1945년에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주권이 형식상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급진적인 변화 하에서 갱신되었다. 서유럽 동맹국들의 배신적인 정책(뮌헨협정)에 대한 깊은 실망 이후 자유 공화국의 시민들은 소련연방의 승리에 점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946년 선거 후 가장 강력한 당이 된 새롭게 형성된 공산당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였다. 1948년 2월에 정부의 변혁이 준비되었고 점차적으로 공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 따라 통제를 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엄격한 국가 감시 하에 들어갔으며 교인들은 시민의 자유를 박탈당하였다. 새로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종교의 자유가 법에 의해 보장되었으며 교회 내부 활동은 허락되었으나 실제로 법은 지켜지지 않았다.

1949년 국가에 의한 교회재정 보장에 대한 법이 발표되었다. 공산 정부는 교회의 물질적 보장과 모든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거머쥐게 되었다. 이로 이하여 재신이 “국유화”된 교회들은 정부에 경제적으로 의존을 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정부의 통제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교회월보의 문장까지 교회활동의 모든 것을 승인하는 “교회를 위한 정부부서(SUC)”가 만들어졌다. 소위 “영적활동에 대한 국가의 동의”는 개 교회 설교가들에 대한 규칙 뿐 아니라 초청받은 설교자에게도 필요하였다. 어떠한 교회의 활동을 위해 허락 받은 기부금은 대부분 필요한 교육이나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고 단지 감시자의 역할만을 하는 담당관리의 의사에 따라 사용되어졌다.

점증하는 정치적 전제주의의 강대국의 억압 하에서 날로 힘을 얻어가는 반 종교적 반 교회적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억압으로 체코형제개혁교회는 새로운 힘든 투쟁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외적으로 존재하여 내적인 보전을 하는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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