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기쁨

  • 한인 예배 (2001년 10월 21일)
  • 눅14:34-15:10
  • 설교자: 이종실

01.10.21(삼위일체후 열아홉번쨰)

설교본문: 누가복음 14장 34 – 15장 10절
설교제목: 교회의 기쁨

<성경>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찌어다 하시니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잃은 양 비유, 되찾은 드라크마 비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리라.”

<설교>

두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복음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사람들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말
씀을 듣는 자”와 “계명을 지키는 자” 두 사람의 모습이 15장 1절과 2절 단지 두절 속에 모두 설명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자는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었는지에 대한 언급 대신에 예수님께 나아온
이유와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 또 실패한 인생을 살아간다 할 지라도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나아오는 세리와 죄인들의 모습을 우리는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라는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로
나아오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을 향해 폭풍이 이는 바다 위를 걸어 가는 베드로의 모습과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중심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을 확인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먹는 예수를 원망하며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라고 권면한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악한 동무로 경계해야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자녀
주위에 나쁜 친구들이 있는 것을 안다면 부모는 늘 마음이 염려스러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이
더러워 질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도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천하고 더러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똑 같이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과 세리와 같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누가복음
18장) 바리새인들에게 이 율법의 문제는 진리와 정의의 문제였습니다. 누구나 다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모두 지켜야 되는 것을
자신들이 잘 지키고 있기에 그들은 타인에 대해 우월심과 무시함과 원망을 갖게 된 것 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랑과
무시함과 원망이 팽배한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몸에 익숙한 신앙의 기준, 교양의 기준, 인간 됨의
기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윽박지릅니다.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을 가지게 되고 마음의 상처를 받고 심지어 마음의 분노가 생기는지 모릅니다.

한국에서 교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느 정도 교회 안에서 질서가 있지만 해외 한인교회는 한국의 교회들 보다는 조금 더 무질서해 보입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은 누구나 서로 인정하지도 귀담아 들어 주지도 않는 자기 의로움이 있습니다. 그 의로움들이 저마다 교회 공동체를
부수고 망가트리고 퇴색시켜갑니다. 심지어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조롱거리로 만듭니다.

이런 교회에 대해 예수님은 오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너
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예수님이 질문 합니다. 청중들은 머리를 끄덕거렸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할거예요. 그러나
게으른 목자들은 아마 다르게 했을 거예요.

그리고 주님은 자신의 청중들에게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그들 중에 하나를 잃으면 손을 털면서 말하기를 그러나 아직 아홉이 남아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 드라크마는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품팔이를 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적지 않는 돈이었습니다. 돈을
잃어버린 여인은 자신의 하루 품삯을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어두운 장소에 떨어진 동전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빗자루로 온 집안 구석 구석 청소를 합니다.  이야기를 듣던 모든 여자들은 머리를 끄덕거릴 것입니다: 물론이지요 우리도 그렇게
할거예요. 대답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무엇을 잃어버린 경험들이 한번씩은 다 있을 줄 압니다.
무엇을 길거리에서 잃어버렸을 때 이미 우리들은 걸었던 길을 따라 몇 차례씩 돌며 주의 깊게 오른쪽 왼쪽을 살펴봅니다. 그래도 찾지 못하면 걱정이 되어 밤에 잠이 오지않습니다.
 

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아이러니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잘 따르던 아흔 아홉의 양들 때문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던 길 잃은 말썽쟁이 한 마리 양 때문에 목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손안에 들어있던 아홉 드라크마 때문이 아니라 잃어버린 나의
것 하나 때문에 여자는 기뻤습니다. 

이 비유만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드러내는 비유는 없습니다. 상실한
모든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그런 거만을 떠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들의
하늘 아버지는 인간의 죄를 참으시고 죄로 소외된 자를 찿고 그리고 그들에게 교회라는 돌아올 집을 준비하신 분이십니다.


회는 교회라는 기관의 기준과 인간의 정의의 잣대로 들어가고 나가는 집이 아닙니다. 죄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
인생의 길을 잃은 사람들이 돌아와 거쳐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기쁨의 집입니다. 교회는 잃은 것을 찾은 하나님의 기쁨과 동시에
죄인들 소외된 자들의 용서와 축제의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잃은 것을 찾는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 자신만의 기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가 기뻐 찬양합니다.


사가 기뻐하는 모습이 누가복음에 또 나옵니다. 예수 탄생의 소식을 알릴 때였습니다. 기뻐 찬양하며 아기 예수 탄생의 소식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잃어 버린 생명을 찾은 하나님의 기쁨은 전우주적인 기쁨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단지 기쁨의 선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죄인들에게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잔치에 친구와 이웃이 초대됩니다. 교회의 기쁨은 세상의
흥미거리로 이루어진 이벤트의 즐거움이 아닙니다. 이벤트는 교회의 잃어버린 자를 찾은 하나님의 기쁨과 그 축제를 더 흥겹게 하는
수단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먹고 마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축제와 관련이 없는 교회의
이벤트는 서로 꺼려하고 서로 회피하고 서로 떠넘기는 일거리입니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잃은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벗과 이웃이 우리들이라면 추운 교회당에서 의미도 모르고 예배 드리는 하나님의 기쁨 보흐니체 정신병원 수요 예배자들을 우리들은 기억했어야 될 것입니다.


제는 하나님의 기쁨에 대한 교회의 체험이자 감사의 노래입니다. 온 천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신 거룩한 만찬은
감사의 잔치입니다. 축제의 주인공은 회개한 죄인들 그리고 찾은 잃어버린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이들이 중심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죄인들 상실한 자들 희망이 없는 자들 소외된 자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존경을 받고 기쁨을 얻어야 됩니다.


코 형제 자매들은 이 일을 지난 주 목요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이 기쁨을 교회의 공동체가 누리기 위해 알코올중독자, 약물 중독자들
가운데 치료가 끝나고 중독생활 그리고 치유의 오랜 기간에 이미 아내도 가족도 남이 되어 버린 상실한 세상에 돌아와 다시 삶의
뿌리를 내려야 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는 “끌라슈떼르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될지 체코 교우들 잘 모릅니다. “이 목사, 나는 이 일을 할 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실 줄 믿는다. 함께 배우면서 그리고 기도하면서 해보자.” 슈토렉 목사님이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체코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우리 동포들이 계십니다. 이 분들이 돌아올 용서와 받아들임이 있는 하나님의 준비한 집이 우리 교회라고 우리들은 말할 수 있습니까?

“회
개할 것이 없는 의인”은 누구도 교회의 기쁨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계속해서 회개를 요청하는 의인들은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에 기쁨을 가져 다 주지 못합니다.  반대로 중압적이고 불쾌한 분위기를 만들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죄인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을 영접하는 교회 공동체로
바꾸어 놓게 됩니다.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감독자의 위치가 되어 불신과 비난과 자기 자랑의 분위기가 교회 안에서 깊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의롭지 못할 지라도 우리들은 스스로 의로운 자들이 되려고 합니다.  대신 우리들의 공동체는 누구도 관심 있어
하지 않는 그리고 회피하는 교회의 모습이 되어 갈 것입니다. 기쁨의 초청의 자리가 불신과 자기 자랑, 다툼과 분쟁, 업신여김과
해외생활의 스트레스를 풀고 자기 감정을 푸는 자리로 느껴질 때 교회의 모든 선교적인 노력과 증언과 초청은 쓰레기 같이 소모적인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용서와 받아들임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과 축제가 있는 교회가 되려면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자세가 아니라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세리와 죄인의 자세가 우리들에게 요구됩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을 보기에 의로운 것이 없어서 남을 판단할 근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러분들에게 죄책감과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만이 죄인을 위해
이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 죄의 해방과 구원의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뿐 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옆과 앞
뒤에 불러두신 형제 자매들도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되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하나님을 대하듯
하는 태도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주기도를
새롭게 배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보다 정의를 실현하는데 뛰어난 분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의 비유들은 완전히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리들이 진실로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될 것이다: “나는 절망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상실할 때 까지 자신의 생각대로 길을
떠나는 매우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양입니다. 나는 더러운 바닥에 떨어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동전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반듯이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찾은 기쁨에 우리를 어깨에 메고 우리들의 집 이 교회로 돌아와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잔치가 있는 이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영혼의 충족감, 상처 받은 마음의 치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용서 그리고 소망을 체험하며 우리는 믿음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설교 후 기도)

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들이 세리와 죄인의 모습으로 주님 곁에 나아가 말씀을 듣고 그리고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우리 하나님의
기쁨의 존재들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주님 앞에 피할 수 없는 죄인이오니 우리들을 용납하시고 우리들을 주의 전에 하나님의
기쁨으로 존재하게 하여주시옵소서. 기쁨이 넘치는 축제가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시어 잃어버린 자를 찾은 하나님의 기쁨이 날마다
더하는 일에 동참하는 교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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