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눈물

  • 연합 예배 (2004년 04월 04일)
  • 눅 19:28-44
  • 설교자: 이종실

종려주일

<본문>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33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설교>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그 첫날을 우리는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환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12:13)

이 날을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하는 주님의 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날에 대해 사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비교해서 읽으면, 누가복음서에만 기록된 내용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는 내용입니다.

무리들은 기뻐 노래했으며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이러한 상반되는 모습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않습니다.

무리들의 환호에 흘리는 감격의 눈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몸보다 작은 나귀새끼를 타고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다.

왜 “나귀새끼” 입니까?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충분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의도적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행동의 배경을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도 이에 대해 언급을 하는데 그 내용을 구약 스가랴에서 직접 인용하고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슥
9:9-10)

다시 말씀드려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끌고오라는 명령은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평화의 왕을 기억하게 하였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왕이 올 때

평화의 왕이 올 때

그는 나귀새끼를 타고 옵니다.

이 예언이 여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예수님이 이 예언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처럼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나귀새끼를 끌고 왔을 때 이어지는 그들의 행동 때문입니다.

이것이 35절에서 38절까지 나옵니다.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그들이 한 행동은 예수님을 왕으로 즉위 시키는 왕의 대관식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예후가 구테타를 일으켜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때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열왕기하 9장 13절에 나옵니다.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이 하는 모습이 이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던 그들의 노래로부터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그들은 참된 왕의 오심을 환호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노래하였습니다.

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장면에서 우리가 보는 대로, 우리는 많은 제자들이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 모두는 일제히 예수님의 왕위 즉위식을 시작하였고 그리고 그들이 기대한대로 이루어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렸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19장 11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자기(예수)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제자들)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1)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임박함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들의 기대가 부풀었던 것은 예수님이 간 곳 마다 많은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능력있는 사람은 오실 왕이심에 틀림없다.

그는 스가랴에 기록된 왕이심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참된 왕으로 로마를 통치할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통치를 세우실 분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선포하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할 때 그를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39절과 4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39, 40)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무슨 뜻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왕의 대관식과 관련되어 소동을 일으키는 자들이 로마를 자극하여 군사개입을 가져올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만약 로마의 군사개입이 있다면 당신은 위험하게 될 것이며 예루살렘을 재앙으로 몰고 갈 것이다.”라는 경고이며 동시에 “그러니 그들을 멈추게 하시오”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관심은 자신들의 종교적 권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군사적 개입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 자신의 권력은 현재의 통치가 지속될 때 유지될것이며 그래서 유대교는 공식적으로 로마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되고 그리고 만약에 소동이 일어나면 로마는 정치적으로 개입하여 자신들의 특권은 상실 될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이것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요 11:47, 48)

이것이 그들의 진짜 감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의 그들의 요구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40)

진짜 왕이신 예수님을 어떠한 권력도 입을 다물게 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와 같이 왕으로 즉위하는 예수님의 눈에 눈물이 흐릅니다.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후 70년에 즉 40년 뒤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파괴의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 군대였지만 예수님은 로마 때문이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계속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평화>는 모든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예언자와 함께 그들의 마음에 그들은 예수님의 왕위 즉위를 선포하였으며 기뻐하며 축하를 하였던 많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과 참된 평화의 설립을 희망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항하는 권력을 전복시키는 힘을 희망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지 예수님을 위해 개인적으로 온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이유로 예루살렘에 이미 와 있던 많은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능력의 힘을 사용해서 참된 평화를 세우고 하나님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그런 같은 생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기
시작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다른 한편 바리새인들 역시 평화를 원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반 로마의 입장을 취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완전히 군사적인 힘의 사용을 반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그들의 계획은 곧 평화를 추구하는 그들의 고의적인 행위 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화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찌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찌로다 (시 128:5-6)

이 시편은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는 예루살렘의 파괴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우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오시는 그 평화의 길을 사람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 예언자가 나귀새끼를 타신 왕의 오심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은 알았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서의 첫부분입니다.

스가랴 1장 1절부터 4절까지 말씀입니다.

다리오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 1:1-4)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가 있었습니다.

 “내게 돌아오라”라는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조상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다시 말합니다. “내게 돌아오라”

회개의 경험을 통하여 그들은 평화의 왕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참된 왕이신 그 분이 있음에도 그들은 과거에 자신들의 조상들이 했던 그 길을 따라 가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그들이 과거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를 원치않고 하나님께 돌아가길 원치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축복만을 바라는 그들의 모습에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는 자신의 적을 파괴하고 시스템이 변화될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과 악을 구별하여 세상의 악의 축을 선언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가볍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선과 악을 구분하여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테러와 전쟁의 그림자가 길게 우리들에게 드리우고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타락의 시작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지금 2004년도를 살아가는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곧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그때 그 모습과 흡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의 눈물을 잊지 마십시다.

참된 평화의 길은 진심어린 회개입니다.

평화의 길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획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회개가 없을 때 참된 평화는 없습니다.

오히려 파멸만 가져 올 뿐 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평화를 가져오셨습니다.

평화의 왕을 환영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기적인 우리자신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그 뜻을 외면하는 고집스러운 우리 자신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이 세상에 세워주신 하나님의 교회를 이룬 우리들의 존재와 사명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복음이 우리들에게 말씀하는 동안 하나님의 초청의 시대입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 분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 하나님께 돌아가고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환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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