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04년 02월 29일)
- 행17:16-34
- 설교자: 이종실
040229
본문: 사도행전 17:16-34
제목: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사람의 특징
<본문>
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수 있겠느냐
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1)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1)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설교>
오늘 본문은 바울의 아덴(아테네) 선교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도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풍부한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전통이 있는 언젠가 한번쯤 가보고 싶은 도시입니다.
오늘 설교를 위해 인터넷으로 아테네 이곳 저곳을 방문했습니다.
BC 5세기부터 융성했던 문화의 흔적이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철학과 정치사상의 교과서에서 보았던 지명들과 장소가 모두 아테네를 중심으로 그 근교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어린시절 동화로 읽었던 신들이 모여 살고, 사랑을 나누고 그리고 서로 다투던 그 장소들 모두가 아테네를 중심으로 있었습니다.
아마 어려서 부터 바울도 이 아테네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선진국가인 아테네는 지식인 바울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런 아테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부터 전도를 위한 목적으로 아테네에 온 것은 아닙니다. (16:13-15)
그의 다음 선교 목적지인 고린도를 가기 위해 아테네에서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렸습니다.
며칠간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바울은 어려서부터 소문으로 들었던 아테네를 관광하면서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힘들었던 심신의 피로를 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해변가로 나가 아름다운 지중해의 풍경을 만끽하였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마주하고 서서 지긋이 눈을 감은 채 오랜 여행길에 지친 심신을 씻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에 아마도 흥겨운 노래곡조가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돌아오라 Sorento로)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아침해와 저녁놀 밤하늘 빛난 별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 다 주 하나님 영광을 잘 드러내도다(78장)
그리고 아테네 도시 이곳 저곳을 둘러봅니다.
16절에 “바울이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그는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바울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이지 않고 호메니우스의 대서사시와 같은 문학과 예술이 보이지않고 왜 우상이 보였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낭은 “저 추하고 보잘 것 없는 유대인은 아테네의 동상들을 우상이라고 말함으로서 헬라의 예술을 모욕했다.”고 사도행전 17장 16절의 바울을 비난하였습니다.
지난 주 로마에서 대회기간 내내 안내로 수고하신 밀라노 한인교회의 집사님 한 분이 저와 세분 강사들을 공항까지 안내하여 주었습니다.
그 분은 밀라노에서 조그마한 사업을 하고있어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자주 밀라노를 안내할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한번은 한국에서 대리석 수입을 하러 온 분들과 다니는데 그 분들은 어디를 가도 바닥만 보고 다니신 답니다.
한번은 식당을 들어갔는데 음식은 주문할 생각하지도 않고 모두 바닥만 열심히 내려다 보았다고 합니다.
저의 눈에는 모두가 아름답다는 프라하와 그 야경은 눈에 들어오지않고 오직 종교개혁유적지 프라하와 폐쇄적인 교회와 무신론의 사회 만이 눈에 보입니다.
사람들이 관광을 할 때 자신의 관심과 아는 것 만큼 만 보고 느끼고 갑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들을 가이드 했는데 그 중의 한 분이 까렐다리에 있는 성인들의 동상을 보고 “저 우상 덩어리들!”하고 소리치는 것을 들고 참 무식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도 아테네에서 우상을 보고 그리고 격분하였습니다.
먼저 우리는 16절에 나오는 바울의 분노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에는 바울이 <마음에 분하여>라고 번역되어있고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격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체코어 성경에는 <znepokojovat se> 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화가나서 미워하는 마음이 있을 때 쓰는 Zlobit se 가 아닌 심기가 불편해서 평안하지 않는 znepokojovat se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해외에서 살면서 그리고 교회생활로 만나면서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눈에 거슬리고 심기가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그런 상태가 바울의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와 여러분들이 주목해야 될 것은 심기불편한 감정이 계기가 되어 계획이 없던 바울의 아테네 선교가 시행되었다는 사실 입니다.
바울은 아테네 선교의 계획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아테네 선교를 원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와 같은 선교사나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바울 처럼 우리는 기도하며 믿음 가운데 우리의 삶의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 가운데 세운 우리의 삶의 계획일지라도 완전히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알려주시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 뒤 돌아 보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뿐 입니다.
미처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때가 있고 어떤 경우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라 여겼는데 그것을 참고 인내한 것이 우리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간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꾼, 하나님이 쓰는 신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 사이에서 일어나는 영적 불협화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테네 선교를 원하시는 하나님과 계획하지 않은 바울 사이의 영적 불협화음은 바울의 심기가 불편함으로 왔습니다.
해외생활에서 그리고 해외의 교회생활에서 우리는 심기가 불편한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사촌이면 남이 아닙니다.
남이 아닌 사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전혀 알지 못하는 프라하의 이웃이 조금 잘되면 배가 아픈 정도가 아닙니다.
심사가 뒤틀리고 이유없이 무조건 미워집니다.
이 좁은 바닥에 그 얼굴이 그 얼굴인데 눈을 마주쳐도 인사는커녕 아는 체 하지도 않으면 내가 또 무엇을 잘못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다가 괜히 무시당한 것 같아 하루종일 기분이 나쁘고 다음에 우연히 마주치면 또 기분 나빠질 것 같아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습니다.
해외에 살다 보면 한국말도 자꾸 어눌해지고 그 뉘앙스도 둔해져 말한 사람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마음의 상처를 받아 혼자서 심기가 불편해져 다른 사람들은 이유도 모르고 함께 불편해 하게 됩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다고 이런 심기 불편한 마음이 풀리지 않고 해를 거듭하면서 쌓이고 쌓여 결국 우리는 오랜 해외생활의 대가로 “인격 파탄자”가 되고 맙니다.
근 10년 전에 독일에서 만난 한 광부출신의 교민이 “20년 해외생활에 나의 머리는 한 5도쯤 돌았습니다.”라고 한 말을 이제 막 해외생활을 시작한 저에게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20년 후의 나의 모습이 그분의 모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년이 지난 후 치열하게 자기성찰을 하는 그분의 모습 정도만 되어도 괜찮겠다고 해외생활 10년이 지나가는 지금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외생활에서 심기 불편함이 쌓여 서서히 <인격 파탄자>가 되어간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해외생활에서 인격 파탄자로 만들 수 있는 심기 불편한 감정이 우리들의 자기 주장과 하나님의 뜻이 서로 충돌하는 영적 불협화음의 사인임을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좋지않는 감정이 처음에 계획되지 않았던 바울의 아테네 선교의 계기가 됩니다.
바울이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또한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하였다.”(17)
바울은 심기 불편하여 격분한 감정을 감정으로 노출시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화가 나게 한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심기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감정이 나면 부부도 그리고 부모와 자식도 대화가 힘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의 특징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심기가 불편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 바울이 격분하였습니까?
그가 십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를 보자 화가 났습니까?
그것은 이유가 아닙니다.
보통의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십계명을 어겼다고 분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지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유대인들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 처럼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의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우상에 하나님이 분노한 경우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오늘 분노한 것은 그 우상과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 아테네 시민들 때문이 아닌 다른 더 깊은 뜻이 있었음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 도시는 우상 위에 우상으로 쌓여있었습니다.
아마 유대인 묘지처럼 묘지 위에 묘지들이 켭켭이 쌓인 것 처럼 우상들이 도시 전역에 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 전국에 있던 우상숫자들보다 아테네의 우상숫자가 더 많아고 심지어 아테네 시민들 숫자 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합니다.
시내를 다니다가 그 많은 우상의 상들과 제단들 속에서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이름의 제단을 발견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
제단에 적힌 이름을 보는 순간 사도 바울은 갑자기 알지 못하는 신까지 숭배해야 하는 인간의 처량함이 느껴졌습니다.
요나 이야기를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요나로 인하여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것은 신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나가 제비에 뽑히고 그는 풍랑이 이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러자 거센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자연재해를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공포를 배경으로 한 성경 말씀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우리나라의 심청전도 이런 종류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와 관련되어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 관한 에피소드는 키프러스의 에피메니데스 라는 사람이 쓴 시와 관련이 있습니다.
6세기 때에 아테네에 전염병이 빠르게 퍼져갔을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원인이 그들이 신가운데 하나를 화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지도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신을 화나게 하였는지 조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신이 화가 났는지 발견하지 못하였다.
화가난 신은 아직 아테네에서 “알려지지 않은 신”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는 한가지 제안을 하게 된다.
우선 양 몇 마리를 골라 며칠동안 먹이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풀밭 위에 풀어 놓았습니다.
배가 고픈 양들은 초원 위에 돋아난 풀들을 마음껏 뜯어 먹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풀을 먹지 않은 곳이 있으면 그곳에 재단을 세웠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신을 위해 이와 같이 재단을 세우자 전염병이 차츰 수그러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상숭배의 배경에는 재앙과 불행에 대한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공포>가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공포의 노예가 되어 있는 아테네 시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적 사고와 고도로 발전된 문학과 예술 그리고 신의 뜻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자유가 있는 신화를 생산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대단히 자랑하면서 공포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성찰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그들의 모습에 바울은 분노가 치밀었던 것입니다.
18절을 보시면 “몇몇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도 바울과 논쟁하였는데”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테네에는 많은 학파들이 형성될 만큼 지식의 전당 대학이 발전하였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공포로 온갖 신들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기는 아테네가 이성과 논리를 자랑하는 지식인들의 중심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은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처한 이 모순에 대해서 분노한것입니다.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심기불편함과 분노의 감정이 우리의 이웃과 개인을 향하지 않고 해외생활의 현실이 가져오는 긴장과 구조에서 고통을 겪는 인간의 모습임을 사도 바울처럼 깨달을 수 있어야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살아가면서 우리들의 심기가 불편해지고 감정이 일어날 때 이것은 나의 계획을 하나님의 계획으로 선회 시키려는 영적신호가 아닌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감정으로 표출하면 나와 이웃을 인격 파탄자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 감정의 원인을 추적해 가면
해외생활에서 오는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긴장과 구조적인 어려움을 발견하고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으로 결심하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들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처한 자신의 현실적인 모순을 바라볼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은 그들과 대화를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대화가 결국 아테네에서 복음 선포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그리고 다른 날에는 광장에서 아테네 철학자들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광장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활동장소 였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토론하였습니다.
아테네에 있던 다양한 학교 가운데 에피쿠로스 그리고 스토아 학파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아마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이었던 것 갔습니다.
그들은 다음 세상의 존재에 대한 지식이 없어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외국의 낯선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 고 말하는 사람들은 범신론의 스토아 학파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은 18절에서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토아 학파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에서 나오는 예수와 부활을 각각 신의 이름으로 이해하였던 것 같습니다.
대화는 이처럼 힘이듭니다.
아테네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관점으로 바울의 이야기를 평가합니다.
사오정 수준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놀 때 자기들끼리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서로 열심히 이야기 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내 이야기에 왜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하느냐”고 다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쓰임 받는 신자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이 왜 그렇게 이야기 하는 가를 이해하는 대화의 출발점으로서의 역할을 기쁘게 감당합니다.
대화는 설득과 굴복을 시키는 것을 목표로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말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22)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 대한 깊은 이해심에서 대화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억지로 무엇을 노력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받는 일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누룬 것도 의도적으로 아테네 시민들과 대화를 시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공포에 둘러쌓여 우상숭배를 하면서 이성과 논리를 자랑하는 그 모순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그러나 그들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대화를 시도한 것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그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생활실천 목표 가운데 하나가 <숨은 봉사생활>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집사님을 위시해서 거의 전교우들이 조그마한 봉사한가지도 모두 맡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 처럼 앞으로도 그 작은 봉사를 통해 지금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서로 다른데서 오는 영적
불협화음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듣고 그것에 투신하려는 자신의
노력의 장으로서 저와 여러분들은 교회의 봉사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는 우리 교우들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누구가 나서기 싫은 일이 구정물에 손을 넣고 설거지 하는 일, 화장실 휴지통이 차면 누군가가 치우는 일, 주방일 간수하는 일과 같이 표시 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굳은 일들입니다.
굳은 일을 앞에 두고 처음에는 서로 눈치 보며 신경전을 부리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들을 서로 주저하지 않고 나서서 하는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의 성장이자 곧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의 소양을 갖춘 우리 교우들 개인들의 신앙의 성장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이라고 믿거나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이라고 추켜 세우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은 오늘 사도 바울처럼 그 사실을 모르면서 그저 생활하고 행동할 뿐입니다.
단지 저와 여러분은 꾸준히 묵묵히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돌이키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하며 맡은 작은 봉사일지라도 그 동기가 교만하지않도록 자신을 채찍질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도록 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사순절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그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며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참 신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의 길을 모두 함께 걸어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