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8년 2월 18일)
- 마태복음 5장 4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복 있는 사람 - 2. 애통하는 자- 마태복음 5장 4절.docx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오늘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팔복 중에 두 번째 복에 대해 살펴봅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몹시 슬퍼하고 가슴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처한 슬프고 아픈 현실 속에서 통곡하며 호소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니, 이 말씀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슬퍼하기보다 기뻐한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슬픔이 우리 삶을 깊게 만든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둠이 있어 밝음이 고마운 것이듯, 슬픔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기쁨은 기쁨일 수 없습니다.
예전에 교과서에 실렸던 시 중에 김현승의 <눈물>이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 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그러고보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주고자 하시는 더 깊은 차원의 행복을 염두에 둔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얻을 것이라 하십니다. 자신의 슬프고 아픈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자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애통은 현실이고 위로는 약속입니다. 현재의 애통이 복이 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약속된 위로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삶에 슬픔이 없다면 더 이상 위로는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애통하는 것’이 다시 없으리라 계시록에 말씀합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아직 그런 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이루지 못한 꿈, 뜻하지 않은 시련, 인간관계에서의 상처와 실망, 그리고 어느 틈엔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불안과 염려… 돌아보면 슬픔과 아픔은 우리 삶의 갈피마다 배어들어 그늘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내가 슬프고 외로울 때 조용히 다가와 내 손을 잡아주는 이는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지요.내가 아프고 서러울 때 옆에서 나와 함께 울어주는 이는 얼마나 위로가 되는 사람인지요. 그런데 때로는 사람이 내게 위로가 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가족 누구에게도 위로 받길 거절했던 야곱처럼, 똑똑한 친구들의 책망 섞인 위로의 말들에 오히려 더 고통을 느꼈던 욥처럼, 그 누구도 내 마음을 헤아릴 수 없을거야, 이 슬픔의 심연 속에 나는 철저히 혼자 남겨진거야, 생각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서 우리는 한 여인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주인의 집에서 내쫓겨 광야를 방황하던 여종 하갈이 그 어린 자식을 앞에 두고 통곡하는 소리입니다. 가죽부대에 물은 떨어지고, 아이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듯 쓰러져 있습니다. 그 모습을 앞에 두고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아이 엄마의 피맺힌 울음소리, 어디에서도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어 더욱 처연한 그 울음소리, 그리고 그 엄마의 울음에 공명하여 서럽게 터져나오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요!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창 21: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 이 한마디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말,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말, 이보다 더 큰 위로와 희망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 한마디로 메말랐던 하갈의 마음에 물이 오릅니다. 이어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그녀가 샘물을 발견하고 그들이 마셨다고 합니다.
그녀의 애통하는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니, 사람에 대한 원망, 현실에 대한 낙담으로 어두워졌던 그녀의 눈에 새 빛이 들어오고, 마침내 생명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발견하며 이제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다, 제게는 이 구절이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됩니다.
정말 이 세상 속에는 슬프고 아픈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한밤중의 폭격으로 한순간에 모든 걸 잃고 절규하는 한 아버지의 눈물,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보트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싣고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 삶이란 원래 이런 것일까? 이렇게 슬프고 아픈 것일까?
세월호 사고로 가족을 잃은 분들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우리 귀에 쟁쟁한데, 밀양 화재 사고 소식을 들은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지난 주간 우리는 다시 미국에서 일어난 끔찍한 총기사고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사람의 그 어떤 위로의 말이 그 희생자 가족들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만 있다면… 이것이 그저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희생자 가족들은 이렇게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아파하며 절규하는데, 누군가는 이런 일이 다시 없도록 ‘바꿀 수 있는’ 것이 있음에도 하지 않으려는 현실, 하나님 주신 얼굴을 잊어버리고 사나운 이리와 탐욕스런 돼지로 변해버린 인간의 모습,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고 아파야 할 때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감각없는 인간의 모습, 우리 안에도 그와 같은 모습이 없다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울어야 할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며 슬피 우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교회의 위기, 내가 원치 않았던 상황, 그걸 생각하며 울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 우리 안에 깨어지고 왜곡된 관계, 그리고 그로 인해 아파하는 나와 너, 그리고 모든 힘없는 작은 생명들… 그것을 생각하며 울라는 말씀이 아닐까? 그리고 바로 그 애통의 자리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참된 위로, 바로 나를 위해 울고 계시는 하나님의 가슴과 마침내 만나게 되는 자리가 아닐까?
함석헌 선생은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자기 연민을 환기시키는 값싼 슬픔 말고, 존재의 다른 차원을 여는 슬픔을 맛보는 이들은 그런 의미에서 복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우리 죄를 대신해 걸어가신 예수님의 십자가 순례를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그 구속의 은혜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복된 사실에도 불구하고,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여전히 연약함과 죄성이 남아 있다는 것,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또다시 죄를 짓기도 한다는 것.
여기서 죄란, 우리가 눈에 보이게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에게 마음으로 짓는 죄도 예수님은 심각하게 보셨습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압제하는 사람의 그 행위에 담긴 폭력성 못지 않게, 그로 인해 그에게 미움과 분노를 품게 된 사람의 그 마음에 담긴 폭력성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심각하게 우려하시고 경계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런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을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으셔서가 아니라, 그러한 죄의 결과들이 우리의 인격과 삶과 관계를 얼마나 비참한 상태로 몰고갈지,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권세는 더 이상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서 끊을 수 없지만, 그 죄의 결과는 남아 우리의 마음과 행동과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분, 이것에 대해 슬퍼하고 아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용납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나의 상처난 마음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나의 두려운 마음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진정 슬퍼하고 아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문밖에서 터져나온 베드로의 오열을 기억합니다. 작은 여종의 질문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연거푸 부인한 그는, 그 순간 들려온 닭울음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와 통곡합니다. 죽는 자리에도 함께 가겠다고 큰소리 쳤던 게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나 절감하며 웁니다. 하지만 자기 존재의 밑바닥에서 그처럼 봇물처럼 터져나온 울음이 이후 그의 인생에 새로운 동이 터오르게 할 줄 그때 그는 알았을까?
통곡은 자기 한계의 절감이자, 부끄러움을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표지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울음은 단단한 끈이 되어 그를 예수님께 더욱 단단히 비끄러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울음을 외면치 않으시는 분, 그 배신자 베드로를 찾아가 위로하시며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그럼에도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분, 다른 사람 모두가 내게 실망하여 떠나도,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울어도 됩니다! 아니, 울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 내 형제자매를 위해, 아파하며 신음하는 이 세상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이사야 66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라”
그리고 고린도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슬픔과 아픔을 능히 헤아리실 수 있는 분, 우리 안에 성령님은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릴 위해 탄식하며 기도해주시는 분,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일상의 언어로 새로 쓰여진 메시지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마음에 슬픔과 아픔이 있습니까? 그 마음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는 분, 우리를 위로하시고 깨우치시고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며 하늘을 향해 우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신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겨 진정한 위로를 경험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 복이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