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7월 28일)
- 사사기 16장 21-31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삼손의 눈 - 삿16,21-31.docx
<사사기 16장 21-31절>
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23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24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의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27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우리가 잘 아는 이 삼손의 이야기는 사사기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사’(Judge)란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절에 그 백성의 리더 역할을 하던 사람을 말합니다.
사사 시대 역사는 다음과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방 민족을 들어 그들을 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사사, 즉 리더십 있는 한 사람을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그럼 또 하나님은 다른 이방 민족을 들어 그들을 치시고, 그러면 이스라엘은 또…
이 시대의 특징이 사사기에 자주 반복되는 다음 구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여기서 ‘왕이 없었다’는 말은 정치체제로서의 왕정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뜻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 있는 문제적 현실을 묘사합니다.
삼손은 그런 시절에 태어나 이십 년간 사사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사사기의 삼손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배경 설명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삿13:1)
그가 태어나기 전, 여호와의 사자가 그의 어머니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삿16:5)
또 그의 아버지에게도 나타나 지침을 줍니다.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삿16:14)
이 부르심과 지침을 따라 부모는 아이를 나실인으로 키웠고,
장성한 아이는 점차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 받기 시작합니다.
삼손은 괴력의 사나이였습니다.
젊은 사자를 맨손으로 찢어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 힘으로 그는 블레셋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에 엄청난 해를 가했습니다.
보복이 두려웠던 그의 동족들이 그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었을 때에도
그는 밧줄을 끊고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쳐죽일 정도의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가진 재능으로만 보자면 삼손은 역대 그 어느 사사들보다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삼손에겐 큰 약점이 있었습니다.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며 지켜낼 줄 아는 분별력과 절제심이 그에겐 부족했습니다.
그는 날 때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었지만,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않는다는 원칙 외에 다른 부분에서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히 지켜가는 일에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 몸을 아무렇게나 굴렸습니다.
그는 이방 여인들을 가까이 하였는데,
명분은 기회를 봐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려 한다는 것이었지만,
매번 그 여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일을 그르치곤 했으며,
그 후에는 늘 그에 대한 분풀이 겪으로 상대에게 해를 가했습니다.
또한 그는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 명령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자 주검에서 나온 꿀을 자기도 먹고 부모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물론 그 일들 자체가 삼손에게서 바로 힘을 앗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삼손의 그런 삶은 그의 영적인 눈을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존재로 살지 않았고,
이처럼 그 자신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그의 주위 사람들이 경외하며 따르길 기대하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때때로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실로 엄청난 일을 행하곤 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난 적은 드물었습니다.
그가 힘을 떨칠 때, 사람들은 거기서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기보다,
그의 속에 내재한 분노와 복수심과 폭력성만을 볼 때가 많았고,
그것은 민족간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또다른 보복으로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부르신 목적이 단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기 위함이었을까요?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압제와 고통을 겪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셨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기 때문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삼손을 나실인으로 부르시고 그에게 그처럼 큰 힘을 부여하신 목적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 모두가 그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거룩하심을 경험하고
그분께 온 마음으로 회개하며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시던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후손을 통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주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절제한 삶 속에서 삼손의 눈은 날이 갈수록 흐려져갔습니다.
그는 힘이 있었으나,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할 지 잘 몰랐습니다.
그에게 그 놀라운 은사를 부여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그 주신 분의 뜻을 따라 잘 사용하고 있습니까?
탁월함도 좋습니다만, 거룩함이 없는 탁월함은 하나님의 일에 무익할 뿐입니다.
작게나마 하나님 손에 쓰임받길 원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자기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졌는지를 살필 일입니다.
그래야 밝은 눈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릴 수 있고,
주신 은사를 바른 방향으로 사용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삼손이 떨친 힘의 근원,
그것은 그의 머리카락이었을까요?
들릴라의 계속되는 질문에 결국 삼손은 진심을 털어놓습니다. 16장 17절입니다.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삼손 본인은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힘의 근원은 한번도 자르지 않은 긴 머리라고…
실제로 머리가 밀린 후 그는 전처럼 몸을 떨치려 하나 전혀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렇게 보면 그의 힘이 한번도 자르지 않은 그의 머리와 분명 연관이 있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의 힘의 근원은 ‘하나님의 임재’라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20절 하반절에,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그의 힘의 근원은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삼손의 괴력을 발휘하는 순간마다 다음의 말들이 언급되고 있는 걸을 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14:6)
혹은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14:19, 15:14)
무슨 뜻입니까?
사실, 삼손이 떨친 힘의 근원은 한번도 자르지 않은 그의 긴 머리에 있었던 게 아니라,
그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 위에 임하여 역사하였던 하나님의 영에 있었고,
그가 나실인으로서 유일하게 지켜오던 한 가지마저 결국 잃게 되었을 때,
더이상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은 그에게서 나타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삼손은 자기 힘의 근원을 오해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기 힘의 근원이 자기 안에 있는 것처럼 어느덧 믿어버리게 됐던 건 아닌지…
그 긴 머리만 유지된다면 늘상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안심하고 있던 건 아닌지…
보이지 않는 더 본질적인 것은 제쳐두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모습,
영적인 눈이 흐려진 사람의 삶 속에 나타나는 현상일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도 그런 착각을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탁월하게 잘 하는 어떤 것에 대해,
또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어떤 대단한 일에 대해,
마치 그것이 애초부터 나의 것이고, 영원히 내게 속한 것이라는 듯,
또 다음에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다시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듯 착각하고,
그것만을 의지하고 그것에만 집착하는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7절에서 세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야고보서 1장 17절에도 말씀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4장 10-11절에 말씀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결국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힙니다.
두 눈이 빠진 채 놋줄로 묶여 옥에서 맷돌을 돌리고 있는 삼손,
그의 모습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무지와 방종의 암흑 속에 갇혀
비참하고 수치스런 삶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이렇게 모든 게 끝나는 걸까?
암흑 속에서 맷돌을 돌리며 삼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시간이 흐르면 머리는 자랍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입니까?
이미 그의 머리는 삭도를 댄 머리, 여기서 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 다곤에게 제사를 드리며 승리를 자축하는 자리,
흥이 오른 그들은 삼손을 그들의 신전으로 불러내 그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경계심이 느슨해진 사이, 삼손은 자기 손을 붙잡고 인도해주던 소년에게 조용히 부탁합니다.
“이 신전을 버틴 기둥을 만질 수 있게 나를 데려다 다오. 좀 기대야겠구나.”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삼손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신전을 버틴 두 기둥을 좌우 양손에 껴 의지하고,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부르짖으며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니,
신전이 무너지며 그 안에 있던 블레셋 방백들과 사람들이 깔려 죽습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삼손의 죽기 전 이 마지막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여전히 그는 복수심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만, 분명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우선, 그의 눈이 달라져 있음을 봅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힘의 근원이 그의 머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임을 비로소 인식하고 있습니다.
과거 그가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제압할 때 그와 함께하셨던 능력의 하나님,
이후 그가 목말라 죽을 것 같을 때 샘을 터뜨려 그를 살리셨던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그 하나님이 이제 나와 함께하시면 지금 이 상황에서도 내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행동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을 잃은 후에 비로소 믿음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더이상 자기 힘을 의지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강함을 통해서보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 더 온전히 일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약할 때,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붙들고 의지할 때,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강함이, 그분의 거룩하심이 더 온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장 크게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까?
삼손이 남긴 자취는 여기까지일까?
우리 교회 주일학교에서 얼마전 이 삼손 이야기를 다루었을 때,
한 아이의 질문이 설교자를 당황시켰다고 합니다.
“그 소년은 어떻게 됐어요? … 살았어요, 죽었어요?”
“소년? … 아, 그 소년… 모르지, 성경에는 안 나오니까…”
여러분, 그 아이가 뭘 물은 건지 아시겠습니까?
삼손의 손을 잡고 그를 그 건물 기둥으로 이끌어주었던 그 소년,
건물이 무너져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에 그 아이는 그 소년이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어른들이 못보는 것을 아이들에게는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요? 살았을까요? 죽었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것 한 가지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여리고 정탐꾼 두 명을 숨겨주었던 기생 라합을
후에 하나님은 생각하시고 살리시며 메시야의 계보에도 들어가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뜻한 바 있으셨다면, 그 소년을 그 때 살리셨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
아마도 그 소년은 삼손의 최후 모습을 가까이서 본 유일한 목격자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삼손의 최후 이야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진 것도
그 소년이 살아남아 그것을 전해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눈을 잃은 삼손에게 눈이 되어 주었던 소년,
어쩌면 삼손이 마지막으로 행한 가장 위대한 일은
블레셋 사람 수천 명을 죽게 한 일이 아니라,
자기 옆에 있던 그 소년의 눈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빛을 조용히 비춰준 일이 아니었을까!
한 아이의 기특한 질문이 우리로 하여금 이전엔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합니다.
대단해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가장 보잘 없어 보이는 한 사람을 찾아내는 눈,
아마도 그것이 하나님 닮은 눈일 것입니다.
그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그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어가는 것,
아마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다 죽고자 하십니까?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
모든 좋은 것의 원천이요 우리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
눈을 들어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내 삶을 거룩히 지켜나가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좋은 것,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위 사람들과 진솔히 나누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우리가 무엇보다 하나님 안에 거하길 힘쓰게 하셔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