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9년 8월 18일)
- 시편 23:1-6, 요한 10:14-16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인도하시는 하나님 - 시23,1-6 + 요10,14-16.docx
<시편 23편 1-6절>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요한복음 10장 14-16절>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너무도 잘 알려진 이 시편 23편의 주제는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목자는 양들을 보호하고, 필요를 채워주며, 있어야 할 곳에 있게 합니다.
우리 안에는 채워져야 할 빈 자리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늘 부족하다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단지 먹을 것, 입을 것, 꾸밀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겐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과 소망이 필요합니다.
이것들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늘 부족하다 느끼며 살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 궁극적인 필요를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온전히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의 인생에는 고난이 많았습니다.
그는 쫓겨다녔고, 배고팠고, 억울하고 비참한 일도 많이 겪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자면, 필요한 많은 것이 부족한 인생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어느 순간 터져나온 고백은 이것입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리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인생에 고난이 많다 하여 길을 잘못 가고 있다는 뜻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뜻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의의 길, 즉 바른 길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끄시는 그분을 잘 따라가면,
결국 우리는 있어야 할 가장 좋은 곳에 있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분은 늘 쉬운 길로만 우리를 인도하진 않으실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그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인생길에 늘 힘든 일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풀밭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며,
거기서 우리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때를 따라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다시 또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따라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자기 이름을 걸고 그분은 우리를 끝까지 지키시며 인도하실 것이고,
그 길의 끝에서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읍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것보다 더 든든하고 복된 삶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 자신을 ‘선한 목자’라 하십니다.
세상에는 ‘선한 목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목자’도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양떼를 돌보지 않는 당시 성직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들이 하지 않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 양들의 목자가 되어, 잃어버린 자를 찾고,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고, 상한 자를 싸매 주고, 병든 자를 강하게 하시리라 하였는데 (겔34),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 ‘선한 목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아는 사람, 그리고 자기 양이 잘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양에게 나아갈 때, 아무 데로나 넘어 들어가지 않고, 문으로 들어간다 합니다.
그러면 양들은 안심하며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면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 내고,
다 내놓은 후 앞서 가며 그 음성으로 양들을 이끌면,
그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들은 신뢰하며 그 길을 따라간다 합니다.
그 가는 길에 이리가 나타나 양을 물어가려 덤벼들 수 있습니다.
그때 ‘삯꾼 목자’와 다른 ‘선한 목자’의 면모가 또한번 도드라지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양을 치던 삯꾼 목자는 그 순간 양떼를 버리고 달아나겠지만,
선한 목자는 그 때에도 자기 목숨을 걸고 자기 양들을 지킨다 합니다.
제 양을 위해 제 목숨 버릴 수 있는 사람, 그가 ‘선한 목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 자신이 우리의 ‘선한 목자’요, 또한 ‘양의 문’이라 하십니다.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가 잘되길 진정 바라시는 분,
하나님의 진리의 문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그 진리와 사랑의 음성으로 우리를 의의 길로 이끄시는 분,
우리를 살리시려 자기 목숨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우리를 참 생명의 길, 진정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알고 따르며 섬깁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여기서 ‘안다’는 말은 그저 머리로 어떤 정보를 안다는 뜻을 넘어,
서로간에 형성된 특별한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일대일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성’을 의미할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목자를 따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 더하여, 선한 목자 예수님에 대해 알아야 할 또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0장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선한 목자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은 이미 우리에 들어 있는 양들에게만이 아니라,
아직 그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에게도 향해 있다는 사실…
그분이 생명을 바쳐 열어 놓은 구원의 길은 그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직 그 길에 서지 못한 다른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들 모두가 그분의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길 바라시는
그 주님의 마음과 관심을 우리가 모르거나 잊어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가복음 3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안식일,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회당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그를 고쳐주실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사람들 가운데 서라 하십니다.
그리고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모두 대답없이 잠잠하자,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 보시며 마음에 분노를 느끼십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찌 이리 완악할꼬!
이어 그 병자에게 손을 내밀라 하시고, 그 손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은 이후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였다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던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일이 옳지 않다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런 선행도, 안식일 규정의 틀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장은 매우 급진적이었습니다.
안식일에 행할 수 있는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곧 악을 행하는 일과 같고,
안식일에 구할 수 있는 생명을 구하지 않는 것은 곧 그 생명을 죽이는 일과 같다!
이런 뉘앙스로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예수님이 다른 이들과 달랐던 점은 무엇일까?
그 마음과 시선이 무엇보다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는 점!
그 날 그분 앞에 서 있던 그 사람, 그의 아픔, 그의 구원에 집중하고 계셨다는 점!
반면 그곳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주셨던 그 율법 규정으로
사람을 정죄하는 것을 넘어, 사람을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 상황에 대해 어느 목사님은 자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허물을 찾기 위해 몰래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은 얼마나 병적인가? 그들의 눈에는 병자가 겪고 있는 고통이나 사회적인 불편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현실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일에 몰두하는 이들에게 다른 이들이 겪는 구체적인 아픔은 늘 남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통을 해석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다만 그들의 동행이 되고 돌보아 주셨을 뿐이다. 이것이 당시의 종교인들과 예수님의 차이였다.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자기 의’이다. 거짓 종교의 특색은 우리의 자아를 부풀려 준다는 것이다.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느끼도록 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영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육적인 사람들이다. (김기석, ‘영적인 듯 보이나 육적인 사람들’)
잃어버린 양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마음과 관심을 우리가 놓치게 된다면,
이처럼 사람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죽이는 일,
선을 행한다는 명목으로 악을 행하는 일이
우리의 관계와 삶 속에도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적 의미의 ‘겸손’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눈에 동등하게 고귀하다는 인식에 기반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은 내가 남보다 낫다는 비교우위로부터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셨다는 은혜체험 위에 세워집니다.
이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내가 저 사람보다 나음을 주장하는 일에 집착하기보다,
저 사람이 나만큼이나 하나님께 존귀한 사람인 것을 알려주는 일에 헌신할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간직하고만 있는 집단이 아니라,
복음을 세상에 증거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우리 주위에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복된 소식으로 듣지 못한 사람들,
아직 자신이 하나님 눈에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아직 예수님의 울타리 안에, 하나님 나라의 영토 안에, 생명과 사랑의 관계성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목자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길을 떠날 정도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고대하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저와 여러분은 내 앞에 한 사람을 어떤 시선과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어느덧 나도 모르게 심판자, 해석자, 판단자, 경쟁자의 모습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듯, 그렇게 사람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렇게 우리 앞에 사람과 상황에 반응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만약 내 안에 어떤 훌륭한 모습이 있다면,
이는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주님의 은혜요,
만약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안 좋은 모습이 보인다면,
이는 그에게 주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치유해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을 주님의 눈과 마음 가까이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걸음을 주님의 눈과 마음이 머문 곳으로 인도하시며,
우리 삶의 자리를 주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한 영혼 가까이로 인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잘 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잘 들으며 따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라 서게 되는 그 자리에서
늘 주님 마음 닮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 삶을 인도하시는 은혜에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셨던 하나님, 앞으로도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잃어버린 양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과 관심을 우리도 함께 품을 수 있게 하옵소서. 지금 내 앞에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대할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인도하시는 자리와 상황 속에서 우리의 말과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