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누가복음 10:38-42>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이 예수님 말씀을 2020년 올해 우리 공동체 주제말씀으로 받으려 합니다.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다가 정작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살 때가 많은 우리에게

주님은 ‘많이’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에서 시작하라 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도여행 중에 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그 마을에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가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고 합니다.

그게 정확히 무슨 일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손님 접대를 위한 음식 준비의 일 같은 게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들어온 손님들 숫자가 많았다면 그 일의 부담은 그만큼 컸을 것입니다.

이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 상황에 그녀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 문화 속에서 여성에게 기대되던 역할과 자리를 고려할 때,

마리아의 이 모습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질 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랍비의 발치는 그에게 배우는 학생의 자리였고,

전통적으로 그 자리는 남성들의 차지였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마르다가 예수님께 와서 뭔가를 말하면서 전환을 맞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어떤 이는 이처럼 동생의 행동 변화를 촉구하는 마르다에게 공감을 표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반대로, 전통적인 성 역할을 전도시킨 마리아의 대담성에 박수를 보내겠지만,

이 마르다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다른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마르다의 문제는 그녀가 열심히 봉사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예수님은 그처럼 이웃 섬기는 일의 중요성을 말씀하셨고,

이 이야기 바로 앞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속에

그 메시지는 너무도 분명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르다의 문제는 그녀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는 사실과

그것이 야기하는 결과에 있었습니다.

마르다의 염려, 아마도 그것은 손님 접대에 혹여나 소홀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혹은 사회적 통념을 깬 동생의 행동이 미칠 파장에 대한 염려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한편, 여기 ‘근심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periespato (페리에스파토),

이 단어는 ‘이리 저리, 여러 방향으로 잡아당겨지거나 끌려다니는 상태’,

즉 ‘집중되지 못하고 분산된 마음의 상태’(distracted)를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마르다가 많은 일로 염려하며 근심하고 있다는 말은

신경 쓰는 여러 일들과 그로 인한 염려들로 인해

그녀의 마음이 이리 저리 끌려다니며 분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마르다의 상황과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바람직하다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많은 일로 염려함에 따른 그 분산된 마음이

그녀의 참다운 환대의 실천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손님 앞에서 자기 동생을 난처하게 만들고,

그 가족간의 갈등에 손님이 개입하길 요청함으로써,

손님의 마음 또한 불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그녀의 곤경을 생각해주지 않는다며

원망의 화살을 주님에게까지 돌리고 있습니다.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이 그녀가 예수님과 진정 함께하는 것을 방해하고,

그녀와 동생 사이, 또 그녀와 예수님 사이를 틀어지게 하며,

마리아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마저 훼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마르다는 참다운 환대의 실천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손님에게 관심과 주의를 집중하는 것,

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반응하는 것.

이것이 없다면 진정 ‘손님을 위한 섬김’이라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손님이 예수님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예수님이 그 집에 오신 것은 그저 음식을 드시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요.

예수님은 오히려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하였다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여기 ‘이 좋은 편’을 어떤 성경은 ‘더 좋은 편’(what is better)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체코어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마리아가 잘 선택했다” 정도로 깔끔하게 번역합니다.

마리아가 택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손님으로 오신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 것.

당시로선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걸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그녀를 그 자리에 굳건히 붙잡아 둔 것은

단순한 ‘철없음’이 아니라 간절한 ‘사모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사모한 그것을 그녀가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빼앗겼고 한 사람은 차지했습니다.

무엇을요? 주님의 임재, 주님과 함께함, 주님께 집중된 마음…

마르다는 분주함 속에서 그 주님의 임재에서 소외되었고,

마리아는 사모함 속에서 그 주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주의 발치’란 그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나아간 자리를 의미할 것입니다.

이것은 ‘몸으로 섬기는 일’보다 ‘귀로 말씀 듣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뜻일까요?

제게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몸으로 섬기는 일을 주님의 임재 가운데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귀로 말씀 듣는 일을 분산된 마음으로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매순간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내 삶의 모든 자리에 주님께서 손님으로 오시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그 주님을 향해 앉아 그분께 내 마음과 귀를 집중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우리에겐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그 중엔 쓸 데 없는 일도 좀 있지만, 대부분은 고상한 의도로 행해지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내 가족들과 이웃들을 위해 뭔가 하나라도 더 해주기 원하고,

또 주님을 위해서도 뭔가 더 해드리기 원하기에 바쁠 때가 많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 저 마르다와 같은 분들이 없다면

교회가 제대로 돌아갈까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귀한 분들이고 귀한 마음이며 또 귀한 일들입니다.

저는 그분들이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잘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이 세상 수많은 ‘마르다들’에게 주시는 이 주님의 말씀을

우리 모두가 잘 듣고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일’에 초점을 맞추고, 그 일들 해내는 데 우선순위를 두면,

염려하거나 낙심하거나 원망하는 상황이 생기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최대한 많이 해라’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괜찮다 하십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이것은 ‘한 가지만 하라’는 뜻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마음,

그 마음을 가지고, 거기서 시작해 모든 일을 하라,

그리하여 행해지는 모든 일이 진정 ‘주님의 일’이 되게 하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내가 오늘 이런 저런 일들을 해야 하고, 그 일들은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오늘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니, 일 다 끝날 때까지 주님 좀 기다려주세요.

그렇죠… 말씀 보고 기도하고 예배 드리는 일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하는 일들이 다 중요하고 ‘거룩한’ 일들이 될 수 있죠.

단, 그 일에 주님이 함께하실 때!

그런데, 주님을 손님으로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우리 삶의 자리,

그분의 임재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마음 없이 행해지는 우리의 일들 속에,

과연 주님이 함께하실까요?

주님은 어느 곳에나 계실 수 있고, 또 어느 일에나 함께하실 수 있지만,

사모하며 기다리지 않는 영혼에겐 주님이 역사하실 여지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바빠서 기도할 수 없다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너무 바빠서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누군가 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지만,

그 많은 걸 다 신경쓰며 산다고, 실제 그 일들을 잘 해내며 산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내어 드리는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물며,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내가 준비되는 일입니다.

이 한 가지 일이 주님이 예비하신 또 하나의 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또 잘 하다보면 내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땅에

내가 어느덧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에서 로렌스 형제는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오로지 범사에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고자 힘썼습니다… 하나님께만 나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하나님께만 애정어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을 나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라고 일컬었습니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이 나누는 습관적이고 은밀한 침묵의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게 가장 유익한 방법은 단순히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젖먹이가 어머니의 젖가슴을 좋아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기쁘게, 나 자신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하나님께 열정적인 관심을 갖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불가피하게 나의 생각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 나는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자 합니다. 그러면 말하기 어려울 만큼 아주 복되고 행복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샘솟듯 솟아납니다.

1666년에 파리에 있는 ‘맨발의 카르멜회’ 수도사가 된 로렌스 형제는

80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 수도원 주방에서 일하면서

늘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고자 힘썼습니다.

그에게는 하찮은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매일 주방에서 이루어지는 루틴한 일들도

천국의 영광스런 체험으로 바꾸어 놓는 비결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131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거창한’ 일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 안에 거하라 하시고,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그분이 하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8장에는 어느 뜨거운 날 아브라함이 저 멀리 나그네 셋을 발견하고

그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해서 대접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손님들에게 발 씻을 물을 제공하고, 좋은 재료로 요리한 음식을 대접한 후,

그들이 식사하는 동안 아브라함은 가까운 곳에 서서 기다립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브라함은 깨닫게 됩니다.

그날 자신이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을 대접했다는 사실을.

그날 아브라함은 일 년 후 아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주님을 우리 삶의 자리에 손님으로 영접할 준비를 갖추고,

우리 마음을 그분께 향하며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의 손님이 실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에게 줄 풍성한 선물을 가지고 오시는 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0년 새 해는 무엇보다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임재 2020 –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 이것을 올해 표어로 삼습니다.

이것은 해야 할 여러 일들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 모든 일들에 ‘주님의 숨’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을 놓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님 곁에 머물며 그분께 내 마음과 귀를 집중하는 일,

그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 바로 그 일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원칙을 정하고,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새 해, ‘많이’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하나’를 붙들기로 결단합시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일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할 때

우리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체험하는 복된 새 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 새 해, 새 시간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새 마음도 허락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고, 그 마음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주님과 함께 하려 노력할 때, 우리 삶 속에 주님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