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0년 6월 21일)
- 로마서 1장 18-25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하나님의 진노 - 롬1,18-25.docx
<로마서 1:18-25> (새번역)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의 온갖 불경건함과 불의함을 겨냥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19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21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22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23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25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빕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보낸 편지를 함께 읽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리길 기도하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복음의 능력에 관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복음에서 하나님의 의와 만나며 생겨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여기까지가 로마서의 서론이라 할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복음에 담긴 구원의 비밀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의 입에서 나온 첫 말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좀 무서운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은 화를 내실까요? 그렇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화가 나시고 화를 내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 하나님은 화가 나실까요? 오늘 본문에 하나님을 화 나시게 하는 두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대하지 않을 때, 즉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화가 나십니다. 이것이 ‘불경’(不敬), 혹은 ‘불경건함’이란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둘째, 사람들이 서로를 바르게 대하지 않을 때, 즉 하나님이 귀하게 지으신 사람이나 생명을 제대로 대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화가 나십니다. 이것이 ‘불의(不義)함’이란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경우는 다음 주일에 살펴보고, 오늘은 첫 번째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욕 아시죠? 아마 욕설 하나쯤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개’와 관련된 욕도 있고 ‘소’와 관련된 욕도 있고, 좌우튼 짐승과 관련된 욕이 많죠. 그런데 여러분, 누가 나에게 그런 욕 하면 기분 좋나요? 안 좋죠. 왜 안 좋을까요? 나는 개가 아니니까. 소도 아니고, 나는 걔네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니까. 나를 개와 같은 존재로 대하는 게 기분 나쁜 거죠. 그래서 화가 나는 겁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크신 분이며 좋으신 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이죠. 그런데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고작 우리 수준으로 생각하거나 우리보다도 못한 존재로 대한다면 하나님 기분이 어떠실까요?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대했다고 합니다. 사람 모양, 새 모양, 각종 짐승 모양의 우상을 만들었죠. 자기 욕망을 따라서요.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라 부르며 그 앞에 절하고 빌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천만에요. 자기를 위한 것이었죠. 자기 욕망을 위한 것.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제 입맛에 맞게 이용하고 조종하고자 한 거죠.
그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이셨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를 보면서 얼마든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경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따라서 핑계할 수 없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친히 계명을 주시며 언약을 맺으신 이스라엘 백성도 우상숭배를 밥먹듯 했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 앞에 절하지 말라 하셨건만, 그들은 그 계명을 알고도 하나님 대신 다른 걸 섬길 때가 많았죠.
어째서 이런 일들이 생겼을까? 그냥 어쩌다 저지른 실수였을까? 누구나 실수는 하는 거니까, 한번 눈감아주면 다음엔 잘 할 수 있는 걸까? 바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그들에게 있다 합니다.
신학자 톰 라이트의 책에 나오는 얘깁니다. 어느 날 숲을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커다란 나무 하나를 베어넘기는 걸 보았습니다. 뿌리가 썩어서 나무를 잘라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별 문제 없는 나무 같았습니다. 아래쪽에 곰팡이가 조금 자라고 있는 게 보였지만 그리 심각한 것 같진 않았죠. 그런데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곰팡이가 뿌리조직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있어서, 한두해 지나 바람이 세게 불면 나무가 넘어갈 수도 있다고 했죠. 그러면 위험할 수 있기에 나무를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도 꼭 그래야 했을까 궁금해서 더 지켜봤습니다. 톱질을 계속하니 마침내 나무 속이 보였습니다. 지름이 1미터 정도 되는 나무였는데, 바깥쪽 5센티 정도는 단단하고 튼실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쪽은 거무튀튀하고 얼룩덜룩한 자국이 배어 있었습니다. 뿌리썩음병이 나무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여 3미터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던 겁니다. 머잖아 나무 전체가 감염될 판이었죠.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들에게야 그저 멋지고 우람한 나무였겠지만, 실상 그것은 엄청난 재난을 초래할 수 있는 나무였다는 게 그제야 분명해졌습니다.
인류가 이 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이처럼 속에서부터 병들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대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바르게 대하지 못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생각과 마음이 부패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1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면서 그 모든 걸 지으시고 베푸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었음에도,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들의 우상으로 바꾸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곤 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허망해지고 마음이 어두워졌다… 여기서 바울은 단순히 인간의 지(知)적 한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아주 쉽게 스스로를 속인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척,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척 스스로 속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일을 일컬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짓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라 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신학자 존 스토트의 설명을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살기로 미리부터 결정했으며, 따라서 그들의 자기중심성에 도전을 가하는 어떤 진리든 의도적으로 억누른다는 뜻이다.”
풀어 말하면, 그들은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산다는 거죠. 나에게 좋은 게 선한 거고 나에게 옳은 게 진리라 생각한다는 겁니다. 아예 그렇게 살기로 작정했다는 거죠.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르게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진리라도 내 생각에 거슬리고 내 마음에 거북하면 쳐내거나 억누른다는 거죠. 결국 그들의 자기중심성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르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진리는 그래도 진리라는 겁니다. 쳐내거나 억누른다고 진리가 진리 아닌 게 되는 건 아니죠. 진리를 거스를 때 불행해지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일 뿐입니다. 진리를 감지하고도 계속 거스르며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그는 스스로를 속여야만 할 겁니다. 그리고 좀 지나면 자기를 정당화할 그럴 듯한 이론을 만들어내겠죠.
이렇게 허망해진 생각과 어두워진 마음이 예배의 실패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의 실패가 관계와 삶의 실패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은 마음은 다른 것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한참 못한 것을 향하게 되어 있고,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거기에 종속되어 갈 것입니다.
밥 하웃즈바르트라는 분이 예리하게 지적했죠: 처음엔 사람이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이미지를 새겨넣지만, 후에는 그 우상이 사람을 속박하고 제 이미지를 사람에게 새겨넣는다고. 그런 식으로 우상숭배는 사람에게서 사람다움을 앗아갑니다.
우리가 옛날 사람들의 우상숭배를 비웃기는 쉽습니다. 나무와 돌을 깎아 ‘신’으로 숭배했다니! 어떻게 금송아지한테 절을 해?! 그럼 오늘의 우리는 다를까요? 요즘에도 돼지머리 앞에 절하던데요?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
현대인들이 주로 숭배하는 우상 세 가지가 있다 합니다. 돈, 성, 권력. 내 마음이 하나님보다 이런 것들을 더 향하고 있다면, 내가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혹 이런 것들 때문이라면, 나는 오래전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걸 하나님이라 부르며 의지했던 사람들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보시는 분입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내 마음, 심지어 나 자신도 속아 넘어가는 내 마음을 그분은 다 보고 계시기에, 그처럼 내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을 때 그분은 화가 나십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니냐구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자꾸 다른 데 한눈을 팝니다. 데이트 중에도 마음이 딴 데 가 있습니다. 그러면 화 나는 게 정상입니까 안 나는 게 정상입니까? 나는 게 정상이죠. 그 상황에서 화가 안 나면 그건 사랑하지 않는단 뜻이죠. 사랑하니까 화 나는 것입니다.
물론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은 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도 화가 날 때마다 화를 내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 성경은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진노는 마지막 심판날에 궁극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화를 내시는 근거는, 이미 각 사람에게 돌이킬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이 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진노는 때로 공적인 정의의 시행을 통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로마서 뒷부분에서 다룰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오늘 본문과 관련되는데, 바로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입니다. 사람들이 그들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 그것도 일종의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다’는 표현이 24, 26, 28절에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 “그래, 어디 네 마음대로 해봐라!” 하면서 홱 돌아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대하지 않는 일이 계속될 때, 하나님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무시할 때,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마음은 딴 데 가 있을 때, 썩어질 것들의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걸 하나님이라 부르며 숭배할 때, 하나님은 수치심과 분노로 고개를 돌려버리실지 모릅니다.
24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더러운 욕망으로 들끓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대로 내버려 두시자, 그들은 부도덕한 삶으로 나아가 서로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요, 또한 더 큰 하나님의 진노를 제 안에 쌓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은 그분의 영원한 무관심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은 하나님의 참고 기다리심입니다. 진노 중에 참고 기다리시는 그분의 자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품고 있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일들에 하나님이 진노하시지 않는다면, 그분은 선하신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무가 치명적인 병에 걸렸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뒤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의’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사람들을 다시 바로 세우시고자 하나님께서 친히 어떤 새 길을 내셨는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원의 새 길과 만난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결코 최종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은 그 하나님의 진노를 건너뛰고 값싸게 주어진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의 잔을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속을 뿐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한 마음, 정직한 모습으로 서고자 할 때,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이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복음의 은혜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대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오직 당신만이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복음 안에서 늘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섬기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깨끗한 마음, 정직한 태도로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