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으로 돌아가자

<로마서 4:9-12>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아프고 갇히고 두렵고 막막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지난 주일 본문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하였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복’에 대해 이미 아브라함과 다윗이 증언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이 할례자에게만 주어지는가 아니면 무할례자에게도 주어지는가’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미 이에 대해 앞서 바울은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모두가 예외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였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그 주장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아브라함이 ‘어떻게’, 직역하면 ‘어떤 상황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먼저 할례를 받고 그리하여 의롭게 된 것인가? 의롭다 여김을 받은 후에 할례를 받은 것인가? 사건의 순서가 어떻게 되는가? 그가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것은 그가 할례받기 전에 일어난 일인가, 후에 일어난 일인가?

바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그가 할례받기 전에 일어난 일이란 것입니다. 칭의 사건은 창세기 15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할례 사건은 창세기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의 시간적 간격은 적어도 십사 년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매우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는 그가 하나님께 의롭게 여겨졌다는 사실의 표징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사실 확인을 위한 도장이었습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 할례를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표징’(창17:11)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이제 그것을 ‘칭의의 표징’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하나의 ‘표징’(sign)으로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구별해 놓은 가시적 표지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신분을 밝혀주는 표징이자, 그들이 진정 의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입증하는 도장(인)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칭의와 할례라는 두 가지 선물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먼저 칭의를 받고 그 다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아직 할례받지 않았을 때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이어서 이미 받은 그 칭의에 대한 가시적인 표징이자 도장으로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겠습니다. 성인 회심자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사람에게 이에 대한 확증의 의미로 세례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올바른 순서를 지켜야 하며, 표징인 세례와 그것의 의미인 칭의를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표징은 그 나름의 중요한 역할이 있지만, 그것이 의미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 후에야 할례를 받은 데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무할례 상태에서 믿어 의롭게 된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이방인 신자들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는 데 할례가 필요치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이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도 더이상 할례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목적은, 아브라함이 또한 유대인 신자들의 조상, 즉 ‘할례받은 유대인 중에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의 조상’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은 사람이건 받지 않은 사람이건 ‘믿어 의롭게 된 모든 자들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위대한 분기점’이었던 아브라함이 이제 복음 안에서 ‘모든 믿는 자의 위대한 집결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근본’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이 근본인가? ‘근본’이란 말은 ‘뿌리 根’자에 ‘밑 本’자를 써서 ‘어떤 것을 생겨나게 하는 뿌리 혹은 바탕’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하나님 백성의 근본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할례가 근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믿음이 더 근본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먼저고 할례는 다음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할례는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때때로 사람들은 어떤 것을 근본이라 주장하며 그것을 자기 자랑으로 삼고 그 위에 모든 것을 쌓아 올립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근본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중세말 유럽 곳곳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은 ‘근본으로 돌아가자’(Ad fonts)는 것이었습니다. 초점을 잃은 종교적 허례허식을 버리고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는 일은 중요합니다. 아무리 훌륭하던 것도 시간이 흐르며 차츰 최초의 정신과 의미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는 급진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습니다. ‘급진적인’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 ‘radical’의 어원은 ‘뿌리’(radix)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급진적인 개혁은 뿌리를 건드립니다. 잘못된 기초 위에 쌓아올린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근본을 다시 바로 세우고자 합니다.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근본주의자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테러 사건이 발생하면 뉴스에서 자주 그 배후로 지목되는 것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알라의 가르침인 ‘코란’을 준행하는 자들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슬람 그룹들에서는 그들이 코란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동들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일본의 작가이며 철학자인 사사키 아타루는 ‘어떤 종교이든 근본주의자들은 사실 그들의 경전을 읽지 않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항상 경전의 일부만을 극단적으로 확대해석하여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코란을 연구하는 자들은 입을 모아 ‘코란의 핵심은 샬람(평화)’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코란을 숭배하며 등장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샬람’이 아닌 ‘지하드’(聖戰)을 들고나왔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경전을 제대로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영안 교수님의 책에 보니까, 영국의 신학자이자 인도선교사였던 레슬리 뉴비긴도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을 향해 같은 지적을 했다고 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쉽게 납득되지 않는 말입니다. 복음주의자들만큼 성경을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뉴비긴은 말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외우고 성경을 인용하지만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가? 그들은 자기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둘 뿐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포괄적이고 급진적인 메시지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는 뜻이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만 어쩌면 읽지 않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 내가 얻고 싶은 것만 성경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에 아멘 하며 뛰어드는 일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뿌리뽑힌 말들이 광장을 떠돕니다.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말들, 마음과 유리되고 삶과 유리된 말들, 어느덧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진 거룩한 종교적 언어들이 인간의 더러운 욕망을 부추기는 일을 위해 봉사합니다. ‘아멘’을 말하지만 그 아멘은 내 욕망에 대한 아멘이요, ‘사랑’을 말하지만 그 사랑은 그럴 듯한 구호로서의 사랑일 뿐입니다.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모두가 예외 없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할례보다 믿음이 근본이다, 당시에 이 얘기는 너무도 급진적인 얘기여서 바울은 이것을 말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했는데, 이게 얼마나 천지개벽할 얘기인지 이 시대의 믿는 자들은 과연 얼마나 알고 믿고 있는지…

누구도 한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을 권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취급받는 사람이든 말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두 팔을 벌리셨고, 누구든 참으로 믿고 돌아오는 자는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복음은 다른 방법으론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을 이처럼 믿음 안에서 하나로 묶으며 이 세상에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킵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자! 믿음이 근본이지만, 믿음보다 더 근본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그분,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근본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일의 근본입니다. 성경이 근본이라구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이가 근본입니다! 교회가 근본이라구요? 교회를 존재하게 하신 이가 근본입니다! 나 자신이 근본이라구요? 나를 창조하시고 지탱하시며 구원하시는 이가 근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근본이시다(창1:1). 인간의 근원은 땅이다(창3:23).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시다(렘2:13).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다(잠9:10).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다(빌2:6). 그분의 근본은 태고와 영원에 있다(미5:2). 예수님은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히5:9). 그분은 교회의 머리요 근본이시다(골1:18).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어 하나님에게서 마쳐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며 모든 것을 아십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의 의미를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보고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차별이나 예외가 없습니다. 참으로 믿으면 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우리 존재의 근본이신 분, 우리 마음이 오래토록 갈망해왔던 분, 우리 인생의 끝에서 결국 만나게 될 그분 앞에, 누구든 믿음으로 설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걸 확실히 알게 해주는 어떤 표지가 있냐구요? 있습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믿는 자에게 주어질 ‘기업의 보증’(엡1:14)이라 하였습니다. 믿는 자는 성령을 받습니다. 믿는 자 속에서 성령이 역사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성령을 통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 여러분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없으면 내 삶이 다 무너질 것 같은 그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인생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녀의 근본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근본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구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나의 근본으로 삼고,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함께하시며 구원하시는 은혜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의 근본이 되시는 주님, 우리가 오직 당신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나아가오니, 우리를 생명의 길, 사랑의 길,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