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 한인 예배 (2020년 10월 4일)
  • 로마서 4장 18-25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로마서 4:18-25>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고난과 낙심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하늘의 위로와 소망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사람이 보통 어떤 상황에서 바랄 수 있는 수준이 있습니다. 평소 시험에 90점 정도 맞던 학생이 이번에 100점 맞길 바라는 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바랄 만한 것을 바라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교회에서 급조한 축구팀이 메시가 속한 바로셀로나팀을 이기길 바란다면, 호호백발의 할머니가 그 나이에 자식을 낳길 바란다면, 그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일에 해당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이 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100세, 아내의 나이 90세에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일이 언제나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건 아닙니다. ‘욕심이 지나쳐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현실을 잘 몰라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경우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던 그것은 자기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주도해서 얻으려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그저 자식 하나 있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셀 수 없이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글쎄요… 이 약속 자체가 당시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왔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건 아브라함이 바라던 바는 아니었으니까요. 하나님이 바라신 바였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한 일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것을 자기도 바라기로 결단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현실을 잘 몰라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던 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는 세상을 살 만큼 산 사람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와 아내는 이제 자식을 낳기 어려운 나이라는 걸 그는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다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견고해졌다 합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를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능히 이루시리라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것은 자신의 과한 욕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자기도 함께 바라기로 결단했기 때문이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잘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신뢰하고 의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도 의심과 갈등의 순간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아내 사래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 하십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습니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그리고 하나님께 말하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렇게 안 하셔도 된다는 거죠. 현재 상태로 만족하며 살 수 있다는 거죠. 새 것은 됐고 이미 있는 것이나 신경써 달라는 거죠. 우리들 중에도 하나님께 뭐 엄청난 거 기대하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냥 하루하루 잘 살게만 해주시면 좋겠다. 이 나이에 뭐 엄청난 거 바라지 않으니, 지금 갖고 있는 것이나 잘 지키며 살면 좋겠다.

젊을 때는 대단한 걸 꿈꾸고, 하나님을 위해서 혹은 사회를 위해서 이런 저런 일들을 이뤄보려 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저 소박하게, 정직하게, 행복하게 살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을 사는 사람이 우리 중에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것을 나쁜 삶이라 말할 순 없을 겁니다. 누군가는 이런 걸 ‘욕심없는 삶’이라 부르기도 하겠죠. 하지만 바울이라면 다르게 부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랄 만한 것만 바라며 사는 삶.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다’는 것을 영어로는 ‘hope against hope’이라 합니다. 묘한 표현입니다. 직역하면 ‘희망에 반하는 희망’이 됩니다. 가망이 없는데도 계속 소망하는 것, 일어날 가능성(probability)에 대한 현실적 판단에 대항하여 결국 그 일이 일어나리라는 확신(certainty)을 붙들고 끝까지 희망하는 것.

아브라함에게도 마음에 갈등이 있었지만 그는 불신앙의 길로 후퇴하지 않습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오늘의 우리는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직접 확인하거나 검증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그 믿음이 어떤 것이었나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아브라함이 보인 반응에 하나님은 기쁘셨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이것을 좀 쉽게 표현하면, ‘아브라함아, 그래 너 잘했다! 기특한 녀석!’ 하나님이 기쁘셨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바라신 대로 그가 반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걸 그가 자기 소망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으로 대했기 때문에!

히브리서 11장 6절에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기 전에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리라는 말씀을 먼저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의 말씀에 순종해 떠났을 때, 결국 그는 그 땅에 이르렀고, 거기서 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기 전에 그의 후손이 셀 수 없이 많으리라는 말씀을 먼저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기다렸을 때, 그는 결국 아들을 얻었고,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는 그 약속하신 이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을 의지하여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오래된 말씀이지만 매시대마다 누군가는 이 말씀을 새로운 울림으로 듣습니다.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로 잘 알려진, 영국 노예무역 폐지운동에 앞장선 인물 중에 윌리엄 윌버포스가 있습니다. 1807년의 ‘노예무역 폐지법’을 이끈 인물입니다. 약 25명 남짓한 그리스도인들이 체계적으로 사회개혁을 주창했습니다. 영국 런던 남부에 있는 클래팜이란 곳에서 주로 모임을 가졌기에 그들을 일컬어 ‘클래팜 섹트’라고 합니다. 윌버포스를 지원했던 클래팜 섹트의 구성원은 사업가, 법률가, 성직자와 학자들이었습니다.

이 클래팜 섹트에서 내건 기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정치 영역에서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노예무역 금지와 사회도덕 개혁을 ‘두 가지 위대한 목표’로 명확히 설정하였습니다. 윌버포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다른 인간이 노예로 삼는 차별은 사회적인 죄악이며, 그 속에 사는 개인도 그 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정부가 저지르고 있던 이러한 도덕적 악에 대하여 책임을 느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들의 개혁운동은 단순히 정치적 목적에서가 아닌 복음이 제시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습니다. 1789년의 한 연설에서 윌버포스는 노예제도 폐지와 같은 사회개혁은 정파적인 질문이 아니라, 사람들 모두가 들어야 할 이성과 진실의 소리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영국제국을 이끌어 가던 주요 동력 중 하나인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것은 국가의 경제적 이익과 배치되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성인군자 같은 소리를 한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현실 사회인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기보다 성경의 가르침을 현실 사회 속에 구현하는 개혁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런 비아냥거림은 그들에게 훈장이었습니다.

바랄 만한 것만 바라며 사는 삶은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음 안에서 우리 믿는 자들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으며 움직이는 삶으로 부르십니다.

믿음의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앞에서 바울이 묘사한 타락한 인류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인류는 창조자 하나님을 무시하고 썩어지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들의 우상으로 바꾸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로 믿었습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알았으면서도 그분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을 의지하고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함’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를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로 믿었던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삶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럴 수 있었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 곧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우리로 믿게 하시려고, 우리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으며 하나님의 길로 행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을 때, 그분은 온 세상을 향해 “이는 진짜 내 아들이다!” 말씀하신 것이며, 동시에 ‘그를 믿는 사람은 모두 진짜 내 백성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2-37)

또한 하박국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3:17-19)

하나님의 백성이 사슴과 같이 사뿐히 뛰어올라 다니게 될 높은 곳이란 이 세상의 높은 자리를 말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이의 삶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높은 뜻을 의미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지금 우리 손에 쥐고 있는 것, 지금 우리가 바랄 만한 것에 제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에 나를 초청해 주시길 소망하며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 신앙 위에서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