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다는 것

<창세기 15:1-8>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8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에 무관심한 분이 아닙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

아브람의 두려움은 14장에 기록된 사건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소돔에 살던 조카 롯이 전쟁 중에 사로잡혀가게 되면서 아브람은 조카를 구하려고 본의 아니게 그 전쟁에 개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전투에서 이기고 그 땅에 구원을 가져오게 되지만, 이후 아브람은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적들의 표적이 되어, 보복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아브람의 두려움은 바로 이 상황에서의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 보통 택하는 길은 성을 쌓고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누구도 보복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자기 세력를 확장해가는 것입니다. 제국은 그런 식으로 탄생합니다. 제국이 외치는 평화는 그런 평화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야할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두려움을 이기고 바르게 서는 길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신뢰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급’을 말씀하시니 아브람이 이어 묻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의 이 말이 제게는 이런 뜻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든, 그걸 물려받을 자식 하나 없는 나에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런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약속의 말씀들을 주셨어도,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 사이의 불일치, 하나님이 계획하고 이루시려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계획하고 이루려는 것 사이의 불일치, 이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상당 부분 하나님의 뜻에 반역한 역사입니다. 왜 그런 일들이 계속 발생했던 걸까요?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더 악하고 모자란 사람들이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른 종교의 신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변국 종교의 신들은 인간의 욕망과 경험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들에게 신비하게 보인 어떤 것, 놀라게 하거나 두렵게 한 어떤 것, 그들을 매료시키고 열광케 한 어떤 것이 ‘신’(gods)으로 숭배되었습니다. 그런 신들을 섬기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명확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욕망의 방향에 부합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신과 버성기지 않고 쉽게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은 그들 맘대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신이 아니었으니까요. 모호성이 존재했습니다. 부딪힘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옳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적당히 타협했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이라 부르며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주변 종교의 방식으로 섬기곤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회개를 촉구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고작 우리 정도밖에 안 되는 분이란 얘기고,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이 필요하면 다른 종교에 말 잘 듣는 신 하나 택해서 부리고 살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왕 하나님을 믿기로 했다면 고생을 각오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엄청난 거리, 엄청난 간극이 놓여 있습니다. 이 간극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도 노력이 필요하고, 우리 쪽에서도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먼 거리를 뚫고 우리 가까이로 오셨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하나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할 때가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 사이의 간극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 신뢰가 있으면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내 계획, 내 큰 그림 속에서 하나님의 부분적 역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서 나의 부분적 역할을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믿음에 이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이며 하나님을 체험해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믿음은 자라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서두르시지 않습니다. 기다리십니다.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그 무엇보다 고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된 곳들이 군데군데 나옵니다. 그가 하나님을 새롭게 체험하고, 그때마다 하나님을 예배했던 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아 하나님, 당신은 이런 분이셨군요!’ 이 체험들 속에서 그의 믿음은 점점 자라갔을 것입니다.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여간 아브람이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말씀하십니다. ‘아, 보여주시라 한 땅이 바로 여기였구나!’ 거기서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그분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후 기근을 피해 이집트에 내려간 아브람은 거기서 벌어진 일들을 통해 하나님이 파라오보다 크신 분임을 깨닫습니다. 이후 처음 제단 쌓았던 곳으로 돌아온 그는 거기서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후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전투에서 아브람이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그를 축복하며 말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아마도 이 순간은 아브람에게 또다시 찾아온 계시의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아브람이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 바뀝니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14:22), 그리고 이를 줄여 간단히 ‘주 여호와’(15:2,8)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진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아들을 주리라는 약속입니다. 이어 하나님은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들을 주실뿐 아니라 자손이 수없이 많게 되리란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 ‘믿었다’는 말이 여기 처음 나옵니다. 물론, 전에는 전혀 믿지 않았었다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나오는 ‘믿었다’는 말은 특별하게 여겨져야 마땅합니다. 이유는 그 다음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 때문입니다. ‘의’ 하면 도덕적으로 바르고 정의로운 것을 연상하기 쉽지만, 성경에서 ‘의’는 관계 개념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 그 사람은 의롭습니다. 그렇다면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이 의롭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런 일들이 하나님과의 바르지 않은 관계 속에서 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는 것인가? 의의 기준은 하나님이 제시하십니다. 인간의 의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의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서의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하신 뜻을 따라 계획하시고 제시하시는 말씀에 그 사람이 ‘아멘’ 하며 뛰어들 때, 그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게 되고, 따라서 의롭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풀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큰 뜻이 있었습니다. 그를 시작점으로 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이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이 아브람에서 시작되어 그의 후손들을 지나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증인들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음을 압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 위해, 여기까지 이르기 위해, 꼭 필요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타냈던 믿음, 그분의 선하신 말씀에 아멘 하며 뛰어드는 일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아브람이 그렇게 했고, 요셉이 그렇게 했고, 모세가, 다윗이, 예수님이, 바울이, 또 이름없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절대 강압적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일하십니다. 믿음은 강제적으로 도출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자유 속에서 자발적으로 발휘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이 더디게 진행되는 것 같은 이유는 그분이 우리의 자유를 통해, 또한 그 자유 속에서 발휘되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모든 거스르는 것들을 힘으로 누르며 계획한 바를 이루는 전능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사람들의 거절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모든 어그러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반응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결국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전능성입니다. 우리를 그분의 일에 부르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 속에서 믿음을 발휘할 때까지 함께하시고 지켜보시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날 아브람이 하나님께 나타낸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오늘의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를 의롭게 여기셨다는 말씀에 비추어 그 믿음의 진실성을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를 이끌어내어 보여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그 보여주신 것을 보고 들려주신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아멘’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멘 속에 담긴 것을 보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마음에 꼭 드셨습니다. 제 생각에, 그날 하나님 마음에 꼭 드셨던 아브람의 믿음 속에는 이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저로서는 바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선하신 계획과 능력을 신뢰합니다. 당신이 뜻하신 바를 이루소서. 저는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최근들어 계속 믿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똑같이 ‘믿는다’ 말해도, 그 말 속에 담긴 의미와 무게가 사람마다 똑같진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이 하나님께 나타낸 믿음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해온 지난 시간들 속에서 시나브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이 시간들 이 상황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은 진행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분 자신이 바로 상급(reward)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주고싶은 것이 있으시지만,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이 넘쳐나지만, 믿음이 없다면 그저 먼 얘기로만 느껴질 뿐입니다.

최근에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암송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렇게 하고부터 달라진 게 있습니다. 일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지식만 늘고 실천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일리있는 말이지만 부족한 말입니다. 말씀 없는 실천 역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매일의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아는 말씀 지식이 사는 데 참고는 되지만 능력은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은 성경 이야기의 틀 안에서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도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성경을 가까이 하십시오. 성경에서 이전엔 주목하지 않았던 낯선 말씀들과 만나십시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믿음은 우리 인생과 세상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지평을 확장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 약속하시며 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사실 우르에서 가족들을 이끌고 나온 것은 그의 아버지 데라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때부터 하나님의 손길이 아브람에게 미치고 있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언제나 불신의 의미를 갖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믿지 않으면 묻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믿었기에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나안 땅을 소유로 주신다면,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과 전쟁을 해야 한단 말인가?” 아브람은 궁금하고 두려웠을 수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 땅을 얻는 일이 앞으로 사백년 후에 일어날 것임을 말씀해주시고 언약의식을 통해 이를 확증해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열어 보여주십니다. 믿음을 통해 아브람은 그의 인생을 현재 상황에 국한해서 보지 않고, 그의 과거부터 미래까지, 그의 아버지를 통해 이루어진 일로부터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이루어질 일까지, 하나님의 큰 계획과 섭리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시작을 알고 끝을 아는 상태에서 오늘을 삽니다. 우리의 오늘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의미없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믿음을 위해 소리없이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도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