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가일

<사무엘상 25:23-38>

23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24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25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27 여종이 내 주께 가져온 이 예물을 내 주를 따르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28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29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30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

32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33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34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라

35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

36 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그의 집에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에 기뻐하므로 아비가일이 밝는 아침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다가

37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38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의 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온이란 곳에 나발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까운 마을 갈멜에서 목축업을 하던 사람이었고 매우 부자였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아비가일이라는 이름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녀는 총명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반면 나발은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였습니다.

당시 다윗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이스라엘 남쪽 바란광야에 있었습니다. 어느날 다윗은 갈멜에서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양털 깎는 날은 이웃과 함께 먹고 즐기는 잔칫날, 좋은 날로 여겨졌습니다.

다윗은 자기 소년 열 명을 나발에게 보내 평강의 인사를 전하고 그들 손에 음식을 들려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다윗이 나발의 호의를 기대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발의 목자들이 남쪽 지방을 이동하며 목축할 때, 다윗 공동체가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발은 다윗과 그의 소년들을 무시하고 모욕하며 그 제안을 거절합니다. “도대체 다윗이 누구냐?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즘은 주인에게서 뛰쳐 나온 종놈들이 저마다 우두머리가 되는 세상이거든! 내가 어찌 내 일꾼들에게 주려고 마련한 떡과 술과 고기를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르는 놈들에게 주랴?”

그 얘기를 전해들은 다윗은 부하들에게 명령합니다. “칼을 차라!” 그리고 사백 명을 거느리고 나발 집안 사람들을 다 쳐죽일 생각으로 갈멜로 올라갑니다.

그 소식을 하인에게 전해들은 아비가일은 급히 음식을 준비하여 나귀에 싣고 다윗을 맞으러 떠납니다. 그리고 길에서 다윗을 만나 그녀가 하는 말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분기충천하여 보복할 마음으로 거기 왔던 다윗이 이 아비가일과의 만남을 통해 마음을 바꿔먹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담긴 메시지를 다음 두 가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보복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25절에서 그녀는 말합니다: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이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그녀의 남편 나발의 어리석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녀가 이 일을 미리 알았다면 이렇게 되도록 두지 않았을 거란 뜻입니다. 그 한 사람의 잘못을 그의 집 모든 사람의 잘못으로 돌리는 건 부당하다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모욕감에 의한 분노는 상황을 확대해석하기 쉽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을 그 가족 전체, 그 민족 전체, 그 인종 전체에게 덮어 씌우기 쉽습니다. 무고한 자의 죽음을 초래하기 쉽습니다.

이어 26절에서 그녀는 또한 말합니다: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보복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 손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도덕 원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가르쳐주게 하신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신32:35)

다윗이 나발에게 이르기 전에 그녀를 만난 것은 그가 자기 손으로 친히 보복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아주시는 상황이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이 얼마나 지혜롭고 담대한 선언입니까! 그들 사이에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다윗에게 이보다 설득력 있는 말이 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과 뒤, 즉 사무엘상 24장과 26장에는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죽이지 않았던 두 번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일련의 세 사건을 통해 성경은 보복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요청되는 자질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진정 집중해야 할 싸움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줍니다. 28절에서 그녀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후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시리라는 것을.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마도 그에 대해 들려오는 여러 이야기들을 듣고. 그의 일생에 악한 일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으로부터.

이로부터 그녀는 추론했습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혈기와 욕망에 기반한 인간적 싸움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싸움, 그것이 진정 다윗이 집중해야 할 싸움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확신했습니다. 다윗이 그 하나님의 싸움을 싸워가는 한,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지켜주시리라는 것을. 29절에서 그녀는 참으로 멋진 말을 합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아비가일의 개입은 자칫 잃을 뻔 했던 많은 생명들을 보전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후에 다윗에게 주실 왕권의 정통성도 보전합니다. 31절에서 그녀가 말하듯, 이제 다윗은 무죄한 피를 흘린 것이나 친히 보복한 것으로 인해 후에 슬퍼하거나 마음에 걸릴 일이 없어집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열흘이 지났을 때 나발은 죽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치심으로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은 고백합니다.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39)

살다보면 우리도 누군가로 인해 화가 날 때가 있고, 내 손으로 보복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마서 12장 19절에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 충동을 억누르고, 보복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분노에 의한 확대해석, 혈기에 의한 즉각적 반응을 피하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진정 싸워야 할 싸움이 무엇인지 숙고하며, 내가 정말 해야할 일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또 말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에게 오히려 선행을 베푸는 것은 그가 자기 잘못을 부끄럽게 여겨 죄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의미겠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악행에 대한 응분의 처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율법의 수준을 넘어서는 사랑의 실천을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38-39,43-44)

물론 이를 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 이렇게 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산다는 건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삶 속에 이루어지길 바라며 그분께 나를 내어드린다는 뜻입니다.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혈기대로만 살았다면, 결정적인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지 않았다면, 내가 어느 지경까지 밀려가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보복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 말씀하십니다. 그건 우리의 일이 아니라 그분의 일이라 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메시지는,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본문 32-33절에서 다윗은 아비가엘에게 말합니다.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다윗은 아비가일의 행동 속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통해 일하셨음을, 그녀의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걸맞는 것임을 인정합니다.

아비가일의 행동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만드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녀는 모욕과 분노로 벌어진 불화의 틈 속에 자기를 던져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평화는 언제나 Just peace, ‘정의로운 평화’입니다. 갈등의 회피, 불의와의 타협, 힘에 의한 획일화로 생겨난 그저 조용한 상태, 평온한 분위기, 목가적인 풍경은 평화의 본질이 아닙니다.

평화는 작은 자 하나도 무시되거나 잃어버리길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선으로 악을 이겨나가는 하나님의 싸움에 동참하는 가운데 피어나는 꽃과 같습니다.

아비가일은 이 화평케 하는 자의 모델입니다. 반면 나발은 평화를 깨는 자의 모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돌이켜 평화를 만드는 길에 동참한 자의 모델입니다.

히브리어로 평화는 ‘샬롬’입니니다. 온전함, well-being을 의미하는 매우 포괄적인 단어입니다. 다윗은 그의 소년들을 통해 나발에게 이 평화에의 희망을 전합니다. 하지만 나발은 그의 어리석음으로 이 평화에의 길을 차단합니다.

악은 어리석음을 숙주로 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마음에서 악은 자라납니다. 어리석음의 악은 이기적인 자기-몰두로 나타납니다. 악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평화에의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악을 선으로 갚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선을 악으로 갚습니다. 자기 충신이었던 다윗을 해하려는 일에 일생을 바쳤던 사울 왕은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인지요!

다윗이 자기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사울은 다윗에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24:17)

그리고 그 일을 한번 더 겪고 나서는 스스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어리석은 일을 행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26:21)

반면 아비가일에게는 현재의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다윗이 행하는 한번의 순종이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지 이해하고 일깨워줄 능력이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만드는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요 자녀임을 드러내는 일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그분의 파트너임을 나타내는 일이란 뜻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 불화의 현장에 자기를 던져 평화를 이루신 것처럼,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이 평화의 길로 부름받습니다.

불의한 권력이 무고한 생명들을 짓밟는 일들, 차별적이고 잔인한 정책이나 법률에 의해 인권이 유린되는 사례들, 또 나라들간에 서로 편먹고 대립하며 힘을 겨루는 일들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거대한 악의 힘에 맞서는 일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 안에서 보이지 않게 악을 잉태하는 비열한 어리석음에 맞서는 일보단 오히려 쉬운 일인지 모릅니다.

평화를 만드는 일은 외교관들이나 노벨상 수상자들만의 일로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들 가운데도 소리없이 하나님 앞에서 그 일을 묵묵히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음이 폭력을 불러일으키는 우리 일상의 모든 불화의 현장들, 그 소리없는 전쟁터에 아비가일처럼, 또 예수님처럼 용감히 뛰어들어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어가고 있는 사람들, 당신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귀히 여기십니다.

너무 힘들다 느껴질 때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에 말씀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복하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겠다 하셨으니, 우리는 그 일에서 손을 떼는 것이 옳습니다.

다만 우리는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이 세상 불의와 불화의 현장, 이기심과 미움의 늪에 빠진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으로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됩시다!

이것을 결단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당신의 자녀들과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시며, 그들의 생명을 그분의 생명 싸개 속에 싸서 보호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아비가일의 지혜가 다윗을 평화의 길로 이끄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당신의 영, 당신의 지혜를 부어주셔서, 예수님 가신 신뢰의 길, 사랑의 길, 평화의 길로 나아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