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손신일

욥기25장2절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마태복음5장9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올해의 ‘교회의 밤’을 위해서 우리의 연합성가대가 준비하고 있는 버추얼콰이어(virtual choir)의 곡목은 ‘Ose Shalom’이라는 히브리어 기도의 노래입니다.

평화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허락하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욥기25장2절의 말씀을 근거로 한 기도이며, 후반부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가 가사에 있는 ‘Ose shalom bimromav’입니다.

평화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소원입니다만, 우리 주님의 교회는 하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Ose Shalom(평화를 베푸시는 분)이시며, 참된 평화를 이루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또한 그 평화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체코어의 평화(pokoj)가 ‘방’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의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단순한 동음이의어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관련이 있다면, ‘방’ 안에 있을 때 느끼는 안도감이 ‘평화’와 통한다는 것인지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방’과 ‘평화’가 같은 말인 것이 납득이 갈 것 같습니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속의 조용한 ‘방’이라는 이미지가 ‘평화’와 겹쳐집니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평화’는 한자 두개가 합친 말입니다.

‘平’은 수면의 풀을 나타내는 문자로 평탄하다는 뜻을 가지고, ‘和’는 입을 합치다는 글자로 형성되어서 화합하고 평온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툼이 없는 평온한 상태가 ‘평화’임은 어떤 언어에서도 공통하겠습니다만, 각 언어의 문화적인 배경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히브리어의 ‘샬롬’,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단지 평온하고 무사하다는 뜻을 넘어서, 완전하고 결핍함이 없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안녕을 유지하면서 세계와 화합하여 살아가는 모습이며,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채워져 있는 상태가 ‘샬롬’이라 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고, 하나님께서 오는 승리의 영광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에게는 참된 평화가 없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평화인 것입니다.

평화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평화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베푸시는 평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평화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14장27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님께서 베푸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마태복음10장34절에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하고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는 각오를 가르치신 것이지만, 주님의 평화가 단지 세상에서 안녕을 얻는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 되겠습니다.

주님의 평화는 주님의 십자가로 세워지는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십자가의 죄의 용서로 말미암는 하나님과의 화해가 가져다 주는 평화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은혜로 말미암은 죄의 용서, 무조건의 용서가 평화를 이룬다고 생각할 것 같지 않습니다.

죄를 벌하고 악을 징계해야만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Pax Romana나 Pax Americana와 같은 힘으로 인한 평화입니다.

우리 개인이 생각하는 평화도, 자신이 풍요롭게 안녕하게 살 수 있는 일이고, 남을 용서한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해롭지 않을 경우에 한정되어 있는 그러한 평화일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복수함으로 말미암아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 우리가 흔히 바라는 평화는 힘으로 인한 평화, 번영으로 인한 평화인 것이고, 가난함이나 자신을 낮추는 데 있는 평화가 아닙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그것은 힘으로 말미암아 평화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던 것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외교적인 교섭이나 흥정으로 평화를 이루려는 사람들도 아닐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칭찬을 받겠습니다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2장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하고 말합니다. (14절)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바울에 의하면 사람을 정죄하는 율법이 사람 사이에 원수 됨이라는 막힌 담을 쌓아 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그 율법을 폐하심으로써, 서로 정죄하려는 원수 됨에서 우리를 해방해 주시는 것이며,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화는 그리스도 안에 모두가 새 사람으로 하나 됨으로 말미암아 실현되는 평화입니다.

거기에는 원수 됨의 막힌 담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미움이나 적개심이나 차별과 같은 것은 다 십자가의 은혜로 허물어졌습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목/화해가 있어야만 실현되는 평화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죄에서 해방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죄 가운데 우리는 결코 평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 죄에서 해방된 새로운 사람, 하나님과의 화해를 입은 자로서, 사람과 화목하여 하나가 되어, 주님의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일년 이상 계속되는 신형코로나 팬더믹이 세상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없어도 평화로운 생활이 무너지고, 또한 적개심을 증폭시킨다는 형태로 사람 사이의 평화가 무너져가는 것을 세계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아시아계 사람들에 대한 근거없는 적개심과 폭력이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도 아시아 사람들을 향한 차별과 적개심이 팬더믹으로 인하여 증폭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시아인 안에서도 또한 적개심이 깃들고 있습니다.

팬더믹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적개심이나 타자에 대한 차별의 마음을 깨우치게 됩니다.

평온함 속에서는 깨닫지 못하던 죄를 평온함이 허물어지는 가운데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흐르는 대로 흘러간다면, 결코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과 화해함을 얻은 자로서, 원수 됨의 막힌 담을 허물어 나가는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Ose Shalom’의 기도는 하늘에 평화를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그 평화를 이루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참된 평화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평화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화해함에 있는 평화를 주님의 교회에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에게는 주님의 평화를 이루어 화평케 하는 자로서, 원수 됨의 막힌 담을 허무는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다민족이 함께 모여, 같은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교회로써, 주님의 평화, 하늘의 하나님이 베푸시는 평화를 나누어 누리는 저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