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1년 5월 23일)
- 사도행전 2장 36-47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 - 행2,36-47.docx
<사도행전 2: 36-47>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과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께서 사명을 맡겨 세상에 보내신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자, 우리에게 오신 성령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날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하늘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4,8)
이에 제자들은 모여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50일이 지난 오순절에 마침내 그들 위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그들은 당시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와 있던 원근각지 순례객들에게 그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였습니다.
이 성령강림과 함께 제자들은 능력있는 예수의 증인들로 변모하였고,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와 행하는 일들을 통해 곳곳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상으로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 사도들의 행적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것이 사람이 주도한 일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또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그때 놀라운 일이 있었구나… 그러나 지금은 그때가 아니잖아! 그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구나… 그러나 나는 그들이 아니잖아!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성령의 역사는 그처럼 특별한 때,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관계되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두 가지 근거를 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성경적 근거인데, 예를 들어 오늘 본문은 성령을 통해 변화된 수많은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근거인데, 지난 이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성령이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비범하게 역사하신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베드로는 놀라운 지혜와 용기로 사람들 앞에서 설교합니다. 그의 메시지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지금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성령의 역사이다. 일찍이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 마지막 때 그분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줄 것이며 그 영을 받은 사람들은 예언할 것이라 하셨는데, 바로 그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리라!
둘째,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일찍이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그리스도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예언하였는데, 바로 그 일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아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소망하며 우리가 기다려온 그 메시야, 그 그리스도를 우리가 우리 손으로 죽였다니! 황망함에 그들은 질문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What shall we do?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 말을 듣고 베드로가 전하는 마지막 세 번째 요점이 오늘 본문 38절 이하에 나옵니다. 회개하라!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여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 그리고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나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회개하라!’ 잘못 가던 길에서 돌이키라는 뜻입니다. 이제껏 잘못 가고 있었음을 깨닫고 옳은 길로 돌아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보내신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회개’(repentance)를 ‘참회’(penitence)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슷한 뜻이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참회’는 잘못을 뉘우치며 반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서적 측면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회개’ 역시 뉘우치는 일을 포함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갑니다. Turn, 돌아섬, 돌이킴, 방향전환, 다시 말해, 실제적인 마음의 변화, 삶의 변화를 포함하는 말이 ‘회개’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예수님이 전하신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어떤 의미입니까? 복음을 듣고, 가던 길을 돌이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는 뜻입니다.
지난 금요일 중고등부 청소년들에게 물어봤던 것을 여러분에게도 질문해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고 나서 가게 되는 저 하늘에 있는 나라이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먼저 장소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저 하늘에만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이 땅에도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다만 사람들 눈에 확연히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 관계, 삶의 자리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는 주기도는 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모든 곳에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어 시간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고 나서 가게 되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부터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들어가 사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미 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회개에 이어 ‘세례’를 말합니다. 잘못 가던 데서 돌이키는 것이 회개라면, 세례는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는 것, 즉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전의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난다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세례의 의미는 이런 개인적 차원을 넘어섭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또한 새로운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 소속되어 새로운 정체성 가운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계층과 인종과 성별을 초월한 새로운 사회적 실재,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임되는 일입니다.
이 세례와 함께 우리는 ‘죄사함’을 경험합니다. ‘죄사함’이란 빚을 탕감받는 일, 잘못을 용서받는 일을 의미합니다. 예수 십자가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기로 결정하시고 우리 향해 두 팔 벌리고 계신 하나님의 선제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이 용납과 용서는 우리가 그분의 품에 안길 때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현실화됩니다.
이 세례와 죄사함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은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모두를 그분의 나라에 초청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이렇게 회개하여 세례와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합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로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39절에 보면, 이 성령의 선물은 그때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만 약속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보다 나중에 태어날 사람들, 또 거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예수 이름으로 세례와 죄사함을 받은 사람에게만 성취되는 약속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라면, 우리 역시 그 성령의 선물을 받아 누릴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그것은 ‘새로운 삶’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삶, 세상과는 다른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 성령이 우리에게 바로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42절이 성령의 선물을 받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요약적으로 들려줍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첫째로, 그들은 성령 안에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을 그대로 전해주는 사람들에게서 배웠다는 뜻입니다. 어떤 가르침을 받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는 말씀이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바른 가르침을 분별하며 따릅니다.
여기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지식적으로 배웠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배운 말씀대로 살았다는 의미일 것이고, 그 진리에 입각한 삶은 분명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진리는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또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구별되는 어떤 성스러움이 있습니다. 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이처럼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을 접할 때 사람들은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보며 그 주위 사람들이 느끼던 정서였던 것 같습니다. 43절에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그리고 47절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둘째로, 그들은 성령 안에서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었습니다. 44절에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들이 언제나 한 공간에 있었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서로 나뉘어지지 않고 하나가 되고자 힘썼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같은 믿음 안에서 묶인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나가는 가운데 교회의 교회다움을 이루어갑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함께함’이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기쁨’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이므로,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과 교제 속에는 한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떡을 뗀다’는 말 속에는 공동식사의 의미 외에도 재화의 나눔과 분배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심(Breaking bread)으로 모두를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으로 떡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 모범을 따라 초기 교회는 공유와 나눔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 합니다. 그들은 참으로 서로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자기 가진 모든 것을 주기에, 각자가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 생활, 성령이 그들 안에서 역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초기 교회의 실천은 성령 안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므로, 오늘날 모든 교회가 이처럼 유무상통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다만 어느 시대에나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서로 나누고, 또 주어진 재화를 필요한 곳에 적절히 재분배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그들은 성령 안에서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고, 기도하며 박해의 상황을 이겨나갔습니다. 기도중에 눈이 열리고, 길이 열리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 기도하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는 의미이겠습니다.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정도로 무력하였다는 의미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기도 외에 다른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느끼는 오늘의 우리들이 과연 그날의 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기도는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길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에베소서에서 그는 또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권면합니다.
지난 주간에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그 못 걷던 사람을 걸을 수 있게 한 건가요? 예수님도 아닌데” 오늘 본문을 근거로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셨던 성령이 이제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서도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고,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령님, 늘 우리 옆에서 도와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늘 당신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