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22년 1월 2일)
- 요한복음 6장 37절
- 설교자: Ondřej Kolář 목사
- 2022.1.2 연합예배 설교문 - 꼴라즈 목사 - 요6,37.docx
<요한복음 6장 37절>
Všichni, které mi Otec dává, přijdou ke mně; a kdo ke mně přijde, toho nevyženu ven.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Sestry a bratři, druhá polovina tohoto verše je heslem Jednoty bratrské na tento rok. Pro jeho správné pochopení ale musíme verš číst v celku. Jinak hrozí, že Ježíšovu slovu podsuneme právě opačný význam, než ve skutečnosti má. Kdo ke mně přijde, toho nevyženu ven, říká Ježíš. Takto, bez dalších souvislostí, by to mohlo znamenat, že Ježíše zajímají jen ti lidé, kteří k němu už sami ze svého rozhodnutí přišli. Jedině ti by pak měli u něj šanci. Pouze ti by měli právo vstoupit do Božího království. Všichni ostatní, kteří k Ježíši nepřišli, ať už z jakýchkoli důvodů, by byli mimo Ježíšův obzor.
형제 자매 여러분, 요6,37뒷부분은 형제단 새해 요절말씀입니다[헤른후트에서 매년 발간되는 성경묵상집 <로중>의 2022년 주제 말씀을 말합니다–편집자 주]. 우리는 이 구절을 올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그럴려면 이 구절을 37절 전체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실제 그 의미와는 정반대로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 뒷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만 놓고 볼 때,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의 결정으로 예수님께 나아오고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으로 이 구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그래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이 구절을 잘 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면 여러 이유로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Takový výklad ovšem nebere v úvahu první polovinu verše. Zde Ježíš říká: Všichni, které mi Otec dává, přijdou ke mně. K Ježíšovi tedy nepřicházejí jen ti, kdo se rozhodli Ježíše následovat. Přicházejí za ním všichni, které mu Otec daroval. To, že se dostávám do Ježíšovy blízkosti, není výsledek mé vůle, ale vůle Boha samotného. On má můj život ve svých rukou. On má ve svých rukou život všech lidí, protože je stvořitelem celého světa. Dřív, než se ve svých životech pro to či ono rozhodneme, patříme Bohu. Od samotného začátku, ba dokonce před samotným počátkem našeho života se Bůh pro nás rozhodl, chtěl nás a miloval nás. A zároveň se rozhodl nás zachránit. Proto nás jako vzácný dar svěřuje Ježíši.
물론 이러한 해석은 본문 말씀 앞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해석입니다. 본문 말씀 앞부분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자들이 주님께 나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시는 모든 자들이 주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손에 나의 삶을 붙들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도 당신의 손에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것 저것을 결정하기에 앞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삶의 시작부터, 아니 우리의 삶이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고, 원하셨고, 사랑하셨으며 또한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주님께 귀한 선물처럼 맡기신 것입니다.
Bůh nás všechny přivádí k Ježíši. Toto poznání zásadně mění pohled na naše okolí. Moji bližní, ať věřící, či nevěřící, či jinak věřící, jsou Božím vlastnictvím, které se Bůh rozhodl zachránit. Je zajímavé, že právě evangelista Jan, který jinak hovoří o světě v dost temných barvách, dokáže svět vidět také z jiné perspektivy. V této perspektivě není možné nad světem bědovat a stěžovat si na jeho zkaženost. Není možné propadnout beznaději a jen přihlížet, kam se svět řítí. Pokud to křesťané přesto dělají, pak se jejich zvěst nijak zásadně neodlišuje od zpráv, které kolem sebe každodenně slyšíme.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주님께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인식은 주변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습니다.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또는 다르게 믿는 사람들일지라도 이들 모두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작정하신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을 상당히 어두운 색체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러한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으로 볼 때 우리는 타락한 세상을 한탄하거나 원망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 절망에 빠져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지켜보기만 할 수 없습니다. 만약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대해 절망만 하고 한탄하고 원망만 한다면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고 복음은 우리가 매일 듣는 뉴스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Naše zpráva ale právě temné realitě vzdoruje. Svět spočívá v Kristu. Je to svět spějící k záchraně. Je to svět na cestě k Božímu království. Je to svět, který se má být jednou zcela prostoupen Bohem. To je evangelium. To je zpráva, která v uších lidí možná zní jako bláznovství. Ale právě tu máme nést do světa, protože to za nás nikdo jiný neudělá. Tato zpráva samozřejmě také proměňuje naše postoje ke světu. Když budu svět považovat jen za plný zla, snadno propadnu rezignaci a budu už jen čekat na chvíli, kdy ho konečně opustím. Když v něm naopak budu odhalovat znamení zaslíbené budoucnosti, povede mě tato naděje k tomu, abych se k Božímu dílu sám přidal.
복음은 어두운 현실에 대항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은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정해진 때에 만유의 주가 되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복음입니다. 이러한 언급은 사람들의 귀에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복음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누구도 우리를 대신해서 이 복음을 세상에 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또한 세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킵니다. 만약 내가 세상을 단지 악으로 가득찬 곳으로 생각한다면 나는 세상에 대해 쉽게 체념할 것이며 이러한 세상을 떠날 날만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징조를 드러내고자 할 때 이 소망이 나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할 것입니다.
Kdo ke mně přijde, toho nevyženu ven, říká Ježíš. Mluví se vůbec v bibli o tom, že Ježíš někoho vyhnal? Možná nás napadne slavná scéna z nádvoří Jeruzalémského chrámu, kdy Ježíš zpřevracel stánky směnárníků a prodejců obětních zvířat. Avšak mnohem častěji se o Ježíšově vyhánění hovoří v úplně jiné souvislosti – totiž při jeho vymítání zlých duchů. To je důležité zjištění. Ježíš nevyhání od sebe lidi. On naopak z lidí vyhání démony, kteří své oběti ženou do nemoci, utrpení a společenského vyloučení. Ježíšovo dílo spásy nespočívá v tom, že jedny zachrání a druhé od sebe odvrhne. Ježíš zachraňuje tak, že z nás vyhání vše, co nás odděluje od Boha a bere pravé lidství.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쫓아내셨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환전상과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으셨던 그 장면이 우리에게 떠오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예수님께서 무엇인가를 쫓아 내셨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맥락 즉, 악한 영들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이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당신으로부터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질병과 고통 그리고 사회적인 소외를 불러 일으키는 마귀들을 사람들로부터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내쫓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고, 참된 인간성을 빼앗는 모든 것들을 내쫓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Kdo ke mně přijde, toho nevyženu ven. Jak k tomuto slovu postavila církev? Často se jí zdálo, že Ježíšovo bezpodmínečné přijímání každého člověka je nebezpečné. Pokoušela se proto kolem Ježíše postavit jakýsi plot chránící před nečistým okolím. A tak místo přijímání budovala exkluzivní spolek těch správných křesťanů. Zatímco Ježíšova cesta vedla k těm, kteří byly z náboženské komunity vylučováni, církev sama mnohé lidi vedle sebe nesnesla a začala sama určovat, kdo k Ježíši smí a kdo ne. Myslím si, že dnes už církev většinu těchto plotů zbourala. O to víc ale překážejí ty ploty nezáměrné a neviditelné. Proto se vždy znovu musíme ptát, jestli tvoříme duchovní domov skutečně pro všechny. Nezakopávají lidé na cestě ke Kristu také o kameny, které jsme pohodili my, aniž jsme si to třeba vůbec všimli? Nezakopávají nakonec o nás, křesťany?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교회는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정한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예수님 주위에 울타리를 설치하고자 하였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의로운 크리스천들로만 구성된 배타적인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종교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향했다면, 교회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올 수 있는 사람들로 또 어떤 사람들은 올 수 없는 사람들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울타리들의 대부분을 허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치 않는, 보이지 않는 많은 울타리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진정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영적인 집을 짓고 있는지 늘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로 가는 길에 우리가 나도 모르게 돌을 던져 놓고 그 돌에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심지어 우리, 크리스천들 자체가 거치는 돌이 되어 사람들이 그 돌에 걸려 넘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Kdo ke mně přijde, toho nevyženu ven. Ježíšovo slovo klade otazník nad naší schopností přijímat. Ta je jistě omezená a není na tom nic špatného. Nemáme kapacitu přijmout do svého života každého, kdo o to stojí. Ne každý si na nás může činit nárok. A ani pro ty, které jsme do svého života již vpustili, nedokážeme být k dispozici neustále. Je správné si nastavit hranice. Je ale zvláštní, že v některých ohledech své hranice střežíme přísně a jindy jsme zase velice benevolentní. Zejména pracovní závazky se v dnešní době stávají tím, co nás touží pohltit. Ke konci roku to mnozí z nás pravidelně zažívají. Ale nejde jen o pracovní stres. Práce je dnes povýšena přímo na smysl života. Hodnota člověka je poměřována podle toho, jak je daný člověk ekonomicky produktivní. Naproti tomu trpělivá péče o druhé a o vztahy oceňována příliš není, a možná i proto ji odsouváme na druhou kolej.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주님의 이 말씀은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물음표를 던집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달리 사람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능력은 제한적이며 이는 인간인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삶에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그렇게 권리주장을 할 수도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우리의 삶에 받아들였다고 해도 우리가 늘 그들을 위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경계를 설정함에 있어 우리는 어떤 경우에는 그 경계를 엄격하게 하고 어떤 경우에는 관대하게 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그 경계를 엄격하게 하는 것들 중에 특히 근로조건들이 아주 엄격해서 우리를 삼킬려고 달려듭니다. 연말만 되면 우리 중에 많은 이들이 그러한 일을 늘 경험하고 있습니다. (연말에 근로조건들이 새로운 기준으로 갱신되는 것 같습니다.) 일에 대한 스트레스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일은 삶의 의미로까지 높여진 것 같습니다. 사람은 경제적 생산성을 기준으로 평가됩니다. 반면 타인을 인내심을 갖고 돕는 일이나 타인과 좋은 관계성을 맺는 일 등은 후순위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Kdo ke mně přijde, toho nevyženu ven. Ježíš nás ven nevyžene. Ale co když my vyháníme jeho? Nebo alespoň z některých oblastí svého života? Je docela pohodlné mít život takto rozdělen. Na jedné straně je část náboženská, kam Ježíše a jeho nároky vpustíme, a pak ta část zbývající, obvykle podstatně rozsáhlejší, kde s Ježíšem moc nepočítáme, protože je nám vlastně nepohodlný. Dnešní biblický verš mluví o Ježíši jako o obyvateli domu, do něhožjsme vpuštěni. Jistě jste se setkali také s obrazem obráceným, kde naopak Ježíš stojí před naším domem a chce, abychom ho vpustili. Jako poselství do nového roku chci ale přijmout a podržet ten obraz první. Jsme lidé, které Ježíš do svého obydlí již vpustil. Už jsme uvnitř. Žijeme v Ježíšově domě, v prostoru jeho lásky a milosrdenství. A nikdo – ani my sami – nás z něj už nevyžene. Amen.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우리를 내어 쫓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님을 내어 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적어도 우리의 삶의 일정 부분에서 예수님을 내어 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렇게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놓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상당한 편리함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예수님과 그의 권리를 받아 들이고 이를 종교적인 영역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통상 삶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받아 들이시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의 경우도 만나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집 앞에 서 계시고 우리가 주님을 들어오시게 하는 그림이 그것입니다. 새 해의 메시지로 저는 첫번째 그림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받아 들이시는 그림을 붙들기 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받아들여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처소 즉, 사랑과 자비의 공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 심지어 우리 자신 조차도 – 우리를 그곳으로부터 내어 쫓지 못 합니다. 아멘
(번역: 김영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