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2년 3월 13일)
- 마태복음 25장 31-46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 마25,31-46.docx
<마태복음 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가 겪게 될 일에 관해 알려줍니다. 그때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사람들을 구분하리라 합니다.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한 무리는 오른편에 한 무리는 왼편에 두리라 합니다.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시리라 합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과연 그들은 누구이며, 그 복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들이 예수님께 행한 일 때문에 그들이 복을 받으리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어려운 형편에 있을 때 그들이 예수님을 잘 대접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그들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당신께 그런 일을 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 년 전 중동의 팔레스틴 지역에서 33년의 짧은 생을 사셨습니다. 그 기간에 예수님을 먹이고 입히고 환대하고 돌보았던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 세상에 머물다 간 사람들 수에 비하면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우리 역시 예수님과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배고픈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 된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옥에 갇힌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이 곳에도 그런 사람들은 존재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세상 사람들 눈에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어서 눈에 잘 띄지도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그분께 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 하나를 먹이면 곧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요, 그런 사람 하나를 돌보면 곧 예수님을 돌보는 것과 같다 하십니다. 예수님께 잘했다 칭찬 들은 오른편 사람들은 이처럼 자기 시대 자기 주위의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잘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 반대의 사례도 말씀하십니다. 왼편에게 있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하십니다. 이유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들도 이처럼 중요했던 그날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당신께 그렇게 행했단 말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결국 그들은 영벌에 처해지고, 앞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여기 내 형제”라 표현하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만을 말할까요, 아니면 어려운 처지의 모든 사람을 말할까요? 우리는 은근히 나의 호의를 받을 만한 사람과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을 미리 구분짓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지금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이 후에 예수님 옆에 있게 될 사람일지 아닐지 지금 당장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닌가, 내게 호의를 입을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당장에 스스로 판정하려는 태도는 바리새인의 길에 가깝지 예수님의 길과는 거리가 멉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이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사람은 잠재적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것입니다.
구분하는 일은 그날에 예수님이 하실 일이요, 우리가 할 일은 사람을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이 그분과 동일시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잘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확실히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의 구체적 필요입니다. 그는 배고픕니다. 그는 목마릅니다. 그는 집이 없습니다. 그는 춥습니다. 그는 아픕니다. 그는 갇혀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음식이 필요합니다. 물이 필요합니다. 쉴 곳이 필요합니다. 옷이 필요합니다. 치료가 필요합니다. 또한 방문이 필요합니다. 이런 구체적 필요에 예수님이 실제적으로 반응하셨듯,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주님은 바라십니다.
어떻게 돕는 것이 정말 그 사람을 위한 것일까, 고민될 때가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다 착한 사람은 아닙니다. 다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달라는 대로 주는 것이 반드시 그에게 유익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귀찮은 마음에 그냥 빨리 줘버리고 끝내려는 유혹이 존재합니다. 의심과 멸시의 눈초리로 그냥 지나치는 삶이 습관화될 위험도 존재합니다.
가끔 우리 교회에 와서 여러 이유를 들어 돈을 빌려달라 요구하는 사람을 하나 압니다. 한두번 빌려줬는데 갚지 않았습니다. 거짓말로 변명하며 윽박지르듯 계속 더 요구해왔습니다. 언젠가부터 그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마주보고 있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좀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냥 무시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내가 이래서 되나, 그를 이렇게 대해서 되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사람, 혹은 이런 경우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내 마음을 닫아 걸게 만들었던 좋지 않은 경험이나 기억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솔직히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안 좋은 기억의 틀 속에 계속 갇혀 살아가고싶진 않습니다. 세상엔 그런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내가 건네는 작은 빵 하나, 물 한 컵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주는 사람들이 아마 더 많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혹은 몇 번이나 그런 선행을 베풀어야 예수님의 오른편, 의인들의 무리에 들 수 있냐는 물음은 적절치 않습니다. 본문은 여기에 대해 아무 답도 주고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내가 한 일을 공로로 내세워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여 받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 하셨습니다. 나누어 본 사람은 나눔이 주는 기쁨을 압니다. 나눔은 기적을 낳습니다. 결핍과 경쟁의 경제학이 지배하는 이 세상 속에서 많이 가진 자든 적게 가진 자든 사람이 더불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을 하나님은 떼어 나누는 이 작은 일 속에 숨겨 놓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 속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예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내가 이 땅에서 알았던 누군가의 영접을 받으며 예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질병과 전쟁, 지진과 산불, 사람의 미혹과 사랑의 식어짐…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속에서, 끝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끝까지 견디며 사랑하는 삶, 우리 주위에 배고픈 자를 먹이고, 목마른 자를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를 돌보고, 갇힌 자를 찾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예수님 말씀을 잘 기억하고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 주신 말씀 다시금 마음에 새기며, 우리 주위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 섬기듯 잘 섬기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