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출애굽기 3:1-6>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분을 나타내시며 그분의 일에 뛰어들도록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시려는 목적 속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당시 모세는 팔십 세였고, 미디안에서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이스라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이집트 공주의 양아들이 되어 왕궁에서 자라났고, 그의 나이 사십 세에 동족을 위해 뭔가 해보려고 몸을 떨친 적이 있었으나 좌절을 경험하고, 도망쳐 타국에서 이방인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잊혀진 자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양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시내산이라고도 불리는 호렙산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산’이라 여겨진 것이 아니라, 아마도 출애굽후 이스라엘 자손이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역사 때문에 후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양 떼를 광야 서쪽으로 몬 것은 모세였지만, 모세를 그 쪽으로 몬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호렙산 한 떨기나무 앞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모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그 근처를 지날 때, 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타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뜨거운 사막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것은 가끔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불붙은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일상 속에서 접하는 어떤 상황에 이례적인 특별함을 창조하심으로써 모세의 이목을 끄십니다.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여기 ‘돌이켜’라는 표현은 모세가 그 광경을 보려고 가던 길을 돌이켰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지나오며 경험한 일에 대한 돌아봄, 즉 성찰적 자세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모세는 그때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다시 자세히 보며 의미를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특별한 순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 하나님이 특별하게 개입해 들어오시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태우지 않는 불’로 그분의 임재를 드러내실 때입니다. 그때 돌이켜 다시 자세히 보기 위해 나아가는 발걸음은 우리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보셨다” 합니다. 이어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주어가 ‘여호와의 사자’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으로 바뀌어 있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직접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모세는 그 자리에 멈춰섭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자기보다 크신 분 앞에 자신이 서 있음을 직감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거룩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인식시켜 주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놀랍게도 지금 모세가 서 있는 그곳에 함께 계심을 인식시켜 주십니다.

우리 삶의 모든 자리가 특별한 자리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오셔서 함께하실 때,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은 거룩한 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발에서 신을 벗을 것을 요구받습니다. 신을 벗는 행위는 권리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주장하는 자세를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요구입니다.

이어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십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에 모세는 즉시 두려워하며 얼굴을 가립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신 것은, 지금 나타나 그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이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는 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순히 “나는 네 조상들의 하나님이다”라고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십니다. 보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의미가 담긴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심으로써 그에게 일깨워주고자 하셨던 것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이 다 다른 분입니까? 아니죠. 같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이 셋을 일일이 구분하여 말씀하셨을까요? 그들의 인생 속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이 모두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라 각기 유니크한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랬다 저랬다 변덕스런 분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다른 시대 다른 조건과 상황 속에서 살아가던 그들 각각에게 하나님이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으로 개입해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과 무관한 모습으로 역사 밖에 초연하게 존재하셨던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처해 있던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 각각의 삶은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닌 유니크한 모습으로 전개되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 그 아들 야곱의 인생 속에 공통되게 함께하시며 역사하셨던 그분이 이제 모세의 인생에도 함께하시며 역사하실 것이라는 것과, 그들 각각의 인생 속에 역사적, 실제적으로 개입해 들어오셔서 그분의 하나님되심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셨던 하나님이 이제 모세의 인생 속에서도 새 일을 행하실 것임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내용들에서 우리는 당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처해 있던 역사적 현실이 무엇이며, 그 속에 개입해 들어오셔서 앞으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하시려는 새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고통을 겪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건져내어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지’를 새삼 다시 깨닫게 합니다. 그 부르심 앞에서 모세는 자신의 한계와 불가능성을 더 깊이 인식합니다. 모세는 이미 과거에 좌절을 맛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지금의 그는 사십 년 전의 그보다 훨씬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하나님은 왜?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은 나의 과거와 현재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펼쳐질 나의 미래 속에도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12) 이어지는 출애굽기의 내용들 속에서 우리는 이 약속이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성취되어가는 모습과, 그 과정에서 모세가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이 기억하는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팔십 세 이전의 모세가 아니라 그 이후의 모세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만이 아니라 ‘모세의 하나님’으로도 알고 있습니다. 모세의 인생에 함께하셨던 하나님이 그의 후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소개되는 또 하나의 사료가 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다윗의 하나님을 알고, 엘리야의 하나님을 알고, 예레미야의 하나님을 알고, 또 바울의 하나님을 압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을 이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내포함과 동시에, 그분이 내 삶에 주인이심을 인정한다는 뜻, 그분 앞에서 내 발에 신을 벗는다는 뜻입니다. 

오늘 내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은 나의 자녀들, 우리 후세대들에게 하나님이 소개되는 또 하나의 사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른 의미의 기독교 전통은 다음 세대의 삶을 과거에 가두지 않고 미래를 향해 개방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예배를 시작하며 봉독한 시편의 말씀: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시102:18) 우리의 삶 속에 새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의 삶 속에서도 새 일을 행하실 것이며, 우리에게 ‘나의 하나님’ 되어주셨던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의 말씀을 예수님은 죽은 자의 부활을 설명하는 맥락 속에서 인용하십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22:31-32).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으로 해석하십니다. 이것은 부활시에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 외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아 있는 자의 모습으로 만날 것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우리가 죽어서 어떻게 될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서고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 것인가임을 일깨우시는 말씀으로 제게는 이해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결코 생명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던 사람은 호흡이 다하고 죽더라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 갖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기회의 상실입니다. 더이상 뭔가를 할 수 없는 때가 왔다는 뜻입니다.

반면,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다는 뜻이며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돌이킬 기회가 있다는 뜻이며 새로운 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진짜 인생은 그의 나이 팔십에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불붙은 떨기나무’처럼 이제 사라지는 일만 남았다 생각되던 그때에 문득 저만치 ‘태우지 않는 불’로 다가오신 하나님을 그는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순종의 한 걸음을 떼는 그날로부터 그의 인생은 예상치 못한 위대한 모습으로 펼쳐져갔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는 것과(롬2:11;행10:34), 그분은 ‘중심을 보시는’ 분임을 말합니다(삼상16:7).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아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며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그날에 모세의 삶을 통해 새 일을 행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새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잘 듣고 순종의 한 걸음을 내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 삶의 매순간이 특별한 순간일 순 없겠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특별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반응할 수 있길 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자리가 거룩한 자리일 순 없겠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나타내시는 그 자리에서 우리가 신을 벗고 당신의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