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2년 8월 14일)
- 창세기 45장 4-5,7-8절
- 설교자: 김영만 선교사
- 2022년 8월 14일 주일예배 - 김영만 선교사.docx
본문: 창45: 4-5, 7-8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1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성경 66권에는 많은 사건들 속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예를들어,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그렇고, 모세 다윗 그리고 수 많은 선지자들, 예수님의 12제자들, 그 중에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사도바울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경 속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 사건들에 대해서 읽을 때, 많은 은혜와 위로를 받기도 하고 새 힘과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은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에 살았던 인물들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성경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은혜와 위로를 받고 힘과 용기를 얻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 속 모든 이야기들과 등장인물들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성경 속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님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속 이야기들을 통해 은혜와 위로를 받기도 하고 힘과 용기를 얻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속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님 이야기라는 이 점이 위인전들이나 전기들 – 물론 위인전들이나 전기들 속에도 훌륭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겠습니다마는 – 예를들어, 세종대왕전, 이순신전 이런 위인전이나 전기들과 다른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 속 이야기들과 등장인물들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성품은 어떠하신지,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속 이야기들을 통해 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운다면 성경 속 이야기들은 다름 아닌 바로 ‘내 이야기들’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들을 읽을 때마다 힘과 용기를 얻기도 하고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갖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갖고 있다는 것이, 성경 속에 풍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복인지요.. 우리가 성경을 갖고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이 갖지 못 한 것, 우리들 내면 속에 큰 보물들을 갖고 살아가는 것 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힘들 때, 위로가 필요할 때,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어느 때든지 우리는 믿음의 조상들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을 떠올려 볼 수도 있고, 시편을 묵상해 볼 수도 있고, 구약 역사서들의 주옥 같은 이야기들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과 사도바울의 편지들을 통해서 힘과 위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1절 말씀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말씀을 다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마는 시간 관계 상 11절 말씀만 읽어 보시겠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나를 비춰보는 거울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경계로 즉, 교훈으로 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어떤 분이 우리가 구약과 신약에서 가장 작은 책들인 오바댜서 빌레몬서를 주의 깊게 읽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바댜서의 하나님, 빌레몬서의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동의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은 창세기 45장 말씀인데,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즉,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애굽과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근동에 7년 동안 큰 풍년과 7년 동안 큰 흉년이 들었는데 7년 흉년 때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내려왔다가 요셉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이야기를 ‘시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시간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개념으로 설명을 해 왔습니다. 예를들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그의 책에서 시간을 정태적 개념인 존재의 동태적 형태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이작 뉴턴에게서 시간은 ‘지속’을 나타내는 물리적 절대 상수로 정의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위에서 언급된 그러한 시간에 대해 언급할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스스로가 내가 뭐다라고 말 할 수는 없고, 단지 사람들이 그들의 학문적 주장을 위해서 시간의 개념을 그 학문적 주장에 맞게 끌어다 쓰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학자들에 따라 각각 다른 시간 개념들을 갖고 있고, 여기서 우리가 그러한 시간 개념들을 다 살펴볼 수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마르틴 하이데거와 아이작 뉴튼의 시간 개념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시간이 ‘흐른다’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른다’라는 개념은 시간에 관련된 대표적인 개념이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엎질러진 물”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시간의 대표적인 속성이 흐른다는 속성인데 한 번 흘러간 시간은 되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주는 속담이라고 생각합니다.
3 요셉에게도 그런 시간, 되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인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요셉이 어렸을 때,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볏단들이 요셉의 볏단들을 빙 둘러서 일어서더니 요셉에게 절하는 꿈,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꾸고나서 아버지 야곱과 어머니 리브가 그리고 그의 형들에게 그가 꾼 꿈을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생각지도 못하게 그가 꾼 그 꿈 때문에 다른 형제들의 미움을 받게 되고 급기야 웅덩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현실은 그가 자랑하고 다니는 꿈처럼 되어지지가 않았던 것이지요. 요셉은 웅덩이에 던져졌을 뿐만 아니라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고, 노예로 팔려간 집 주인인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고, 같은 감옥에 갇혀있던 술 맡은 관원장의 도움으로 애굽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되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이제 그의 눈 앞에 7년 큰 흉년 때 애굽까지 양식을 구하러 내려 온 형들이 부복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형들이 자기 앞에 부복하고 절을 하였을 때 요셉이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요셉은 웅덩이에 던져지고 난 후 애굽 총리가 될 때까지 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은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삶 속에 있었던 고통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있었던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주마등처럼 스치는 삶의 모든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삶이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 꿈을 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요셉이 꾼 꿈과 전혀 상관 없는 것처럼 흘러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그 꿈이 이루어지고 흘러간 내 인생의 모든 삶이 이해가 되고 해석이 되는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 그의 인생이 해석이 되는 ‘운명적인 순간’이 – 체코어로, 오수도비 오깜지크라는 순간이 – 다가온 것입니다. 그런 순간이 다가왔을 때, 요셉이 꾸었던 꿈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의 삶이 해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그의 삶의 모든 아픔과 상처가 아물고 치유와 용서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위에서 시간의 대표적인 속성이 ‘불가역적인’ 속성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은 없어지거나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의미’는 변화됩니다. 현재의 내 삶이 하나님 안에서 해석이 되어질 때, 과거의 ‘사건’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지만, 그 사건의 ‘의미’는 시간의 불가역적인 속성을 거슬러 올라가 그 사건의 의미를 전혀 다른 의미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사건 자체는 그대로 있지만 그 사건이 내 삶에 주는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되고, 고통과 아픔이 치유가 되고 회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치유, 이러한 기독교적인 치유야 말로 참된 치유, 요즘 유행하는 말로 참된 ‘힐링’이 아니겠는지요..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4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요셉이 여러 아픔과 고통의 삶을 살아오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비근한 예를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젊고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한 청년이었습니다. 이런 요셉이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있었는데, 보디발이 궁으로 일을 나가고 보디발의 집에는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가 남겨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날마다 성적으로 유혹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면서 했던 말을 상기해 보아야 합니다.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 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39:8-9) “그런 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요셉은 하나님 앞에 살았습니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든지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요셉의 이러한 점을 깊이 본받고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놓여 있든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요셉이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주어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야곱과 형제들이 애굽에 내려왔을 때 그리고 그에게 절 했을 때 자기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러한 현실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오늘 본문 말씀의 고백을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45: 7-8)
5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내면에 어떤 상처, 어떤 남모를 고통, 이제는 지우고 싶은 어떤 아픔을 내면에 품고 살아오셨습니까?
삶에는 여러 단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 삶은 지금 어디 쯤 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꿈을 주셨습니까?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있습니까? 아니면, 애굽에 팔려가고 있습니까? 보디발의 집에 가정총무가 되었습니까? 뭔가 삶이 풀리고 우선한다 싶더니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까? 술맡은 관원을 도와줬는데 그래서 도움을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감감무소식이고, 어제와 같은 오늘 그리고 오늘과 같을 것 같은 내일의 답답한 감옥생활과 같은 하루하루의 삶이 이어지고 있습니까? 내 삶이 그렇게 흘러갈지라도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그런 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 (롬8:25) 참음으로 내 삶이 이해가 되고 해석이 될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애굽총리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야곱과 형들을 만나셨습니까? 그리고 내 인생이 해석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이하고 놀라운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합니다. (벧전2:9) 하나님께서 살아계심과 하나님께서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히11:6)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며 은혜받은 자답게 받은 바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6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로마서 2장 9절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환란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의 손에 묻은 피가 그의 머리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살고자 열심히 발버둥치며 사는대도 환란과 곤고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인내함으로 요셉과 같이 내 인생이 해석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 때, 내 인생이 해석이 되는 그 때에, 나는 내가 왜 꿈을 꾸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내 인생이 해석되는 그 때에, 나는 내가 웅덩이에 던져진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고,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고, 어느 날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생각하게 되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온 가족을 기근에서 구하게 되고, 야곱의 온 가족이 애굽 고센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기까지 이 모든 일이 나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을, 내 인생이 해석되는 그 때에, 나는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내 인생이 해석이 되는 그 때까지,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감으로써 요셉처럼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