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예배-Ondřej Kolář

본문: 마태복음16: 13-17

Matouš 16, 13-17 Když Ježíš přišel do končin Cesareje Filipovy, ptal se svých učedníků: „Za koho lidé pokládají Syna člověka?“ Oni řekli: „Jedni za Jana Křtitele, druzí za Eliáše, jiní za Jeremiáše nebo za jednoho z proroků.“ Řekne jim: „A za koho mě pokládáte vy?“ Šimon Petr odpověděl: „Ty jsi Mesiáš, Syn Boha živého.“ Ježíš mu odpověděl: „Blaze tobě, Šimone Jonášův, protože ti to nezjevilo tělo a krev, ale můj Otec v nebesích.

13 예수께서 가아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Jednou ta otázka přijít musela. Až se divíme, že přišla docela pozdě. Podle Matoušova evangelia se nacházíme přibližně v polovině Ježíšova příběhu. Je nejvyšší čas, aby si alespoň Ježíšovi nejbližší ujasnili, kdo jejich mistr vlastně je. Kdo je ten, se kterým se rozhodli spojit své životy. Ta klíčová otázka stála dlouho v pozadí. Evangelista zatím vyprávěl především o tom, co Ježíš zvěstoval a co vykonal. Když Ježíš o několik kapitol předtím vystoupil na horu a představil svůj program, možná někteří čekali, že jim své tajemství prozradí. Ale on místo toho začal hovořit o chudých v duchu, plačících, tichých, hladovějících a žíznících po spravedlnosti, milosrdných a dalších, kteří mají být blažení, protože jejich je království nebeské. Ano, království Boží, to je společný jmenovatel Ježíšova vystoupení.

한 번은 이 질문이 던져져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이 꽤 늦게 던져진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한 가운데 쯤에서 이 질문을 접하고 있습니다. 이제 최소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주로 따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르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 전체를 어떤 한 분에게 내어주기로 결심했다면, 그 분은 누구십니까? 이 결정적인 질문이 오랫동안 주변만 맴돌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이 질문 전까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하는 것들을 진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몇 장 앞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산에 오르셨을 때,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알려주실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 대신에 심령이 가난한자들에 대해, 애통하는 자들에 대해, 온유한 자들에 대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자들에 대해 등등.. 이런 자들이 복이 있음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는데, 그들이 복이 있음은 천국이 그들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Dá se říci, že Ježíš nezvěstoval Ježíše. Přinejmenším pro počáteční období jeho působení to tak skutečně platí: nezvěstoval sebe, ale Boží království a jeho blízkost. Zval do něho všechny, kdo sami sebe vnímali spíš jako Bohu vzdálené, Bohem zapomenuté, z jeho království vyloučené. Takže byl Ježíš takovým Božím poslem? Tak by tomu bylo v případě, že by o Božím království jen mluvil. On ho ale lidem zcela konkrétně a přímo hmatatelně přinášel, jak o tom svědčí mnohá jeho uzdravení a vymítání démonů. Kam Ježíš vstoupil, tam se začal svět skutečně proměňovat, tam – i když třeba jen na malém prostoru – musely mocnosti zla a zmaru vyklidit pole a ustoupit Boží moci. V Ježíši se lidé setkávali nejen se slovem o Bohu, ale s Bohem samotným.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전파하지 않으셨습니다. 적어도 예수님 사역 초기에는, 이 진술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전파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와 그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에 의해 잊혀지고,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된 존재 쯤으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정도 쯤 되는 하나님의 사자이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만약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다면, 위 진술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사람들이 아주 구체적으로, 직접 손으로 만져볼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 가신 곳은 정말로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곳은, 그곳이 비록 작은 공간일지라도, 악과 멸망의 세력들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권능이 임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만났습니다.

 

Proto se dříve či později musela tato otázka vynořit: kdo je Ježíš? Je zajímavé, že Ježíš se nejprve ptá svých učedníků nikoli na jejich názor, ale na názor ostatních lidí. A navíc ještě otázku formuluje nepřímo: Za koho lidé pokládají Syna člověka? Syn člověka je označení, které bylo Ježíšovi samotnému zřejmě blízké. Odkazuje ke knize Daniel, kde se mluví o tajemné postavě posledního času. Synu člověka má být dána vladařská moc, sláva a království, a mají ho uctívat všichni lidé různých národností a jazyků. Nicméně to nevylučuje, že se jedná skutečně o pouhého člověka. V Ježíšově otázce se skrývá možná právě tato pointa: Ježíš, navzdory všemu velkému, co učinil, nepůsobí jako nebeská nadpřirozená postava. Nechová se jako Bůh chodící po zemi. Je to člověk – se vším, co k němu patří. Za koho jej tedy lidé pokládají?

그러므로 좀 더 일찍 또는 좀 더 늦더라도 이 질문은 반드시 물어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의 의견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어떠한지 물으신 것은 흥미로운 점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이 질문을 간접적으로 공식화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인자‘라는 호칭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상당히 익숙한 호칭입니다. 이 호칭은 다니엘서에 나오는데, 거기서 마지막 때의 신비한 인물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쓰였습니다. 이 인자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질 것이요, 여러 나라와 방언의 모든 백성들이 그를 경배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진술들로부터 인자가 단지 사람이라는 사실이 배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질문 속에 이러한 점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엄청나게 위대한 일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속한 초자연적인 인물처럼 행동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을 걷는 하나님처럼 행동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이 그에게 속한 사람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사람들은 누구라 합니까?“

 

Ježíše zajímá, co si o něm běžní lidé myslí. Zajímá ho, jaký mají jeho slova a činy dopad. Nestojí o popularitu a slávu, ale chce, aby mu lidé porozuměli a přijali jeho poselství. Proto je jeho otázka na místě. A proto bychom jí neměli pohrdat ani my. Co si dnešní lidé myslí o Ježíšovi? Bylo by zajímavé, kdyby existoval nějaký výzkum na toto téma. Ze své zkušenosti vím, že někteří lidé považují Ježíše za obdivuhodnou a inspirativní postavu, avšak ihned dodávají, že jeho poselství církev překroutila a zatemnila. Ježíš ano, církev ne. Tento postoj nás možná dráždí. Ale také nás může přivést k zamyšlení, zda se církev často nechová právě velice neježíšovsky: Zatímco Ježíš neukazoval především na sebe, ale nad sebe, k Božímu království, církev ne vždy ukazuje nad sebe k Ježíši. Ne vždy dáváme my křesťané jasně najevo, že zde na světě nejsme kvůli sobě, ale kvůli svému Pánu a jeho díle ve světě. Připusťme také, že lidé mimo církev mohou postihnout o Ježíši cosi zásadního, co se nám v naší zvěsti někdy vytrácí. Například církev příliš často ve jménu Ježíše soudila, vylučovala, trestala – tedy činila přesný opak toho, co činil on sám.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과 행동이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인기와 명성에 관심이 있어서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고,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질문은 꼭 필요한 질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또한 이 질문을 소홀히 넘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이 주제에 대한 연구가 있다면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경하고 영감을 주는 인물로 여긴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즉시 예수님의 메시지가 교회에 의해 왜곡되고 모호해졌다고 덧붙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원하지만 교회는 원치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를 안타깝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교회가 매우 비예수적으로 행동해 오지 않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키시지 않으시고, 당신 너머,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셨는데, 교회는 늘 자신 너머, 예수님을 가리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여기 이 세상에 있는 이유가 우리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주님의 사역 때문에 있음을 드러내지 않을 때가 많았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 교회 밖의 사람들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에 언제부터인가 예수님에 관한 본질적인 것이 슬그머니 사라진 것을 알아차려버린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를들어, 교회는 너무 자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배제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교회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과 정확히 반대로 행했습니다.

 

Za koho považovali Ježíše během jeho života? Široká veřejnost překvapivě nebyla nějak zvlášť pomýlená a Ježíše hodnotila vysoko. Vnímala ho jako znovuzrozeného proroka, například Jana Křitele, Elijáše či Jeremjáše. S každou z těchto postav měl Ježíš skutečně leccos společného. Nejvíce asi to, že se kvůli svému poslání dostali do konfliktu s vládnoucí mocí, avšak ze své cesty neuhnuli, i za cenu pronásledování. Lidé si nejspíš představovali, že Ježíš na tyto velké proroky naváže a bude pokračoval v tom, co jim samotným nebylo dopřáno dovést do konce. Všimněme si, že Ježíš tyto názory nekritizuje a neodmítá: mají totiž v sobě kus pravdy. Ale není to pravda celá, Ježíš není jen Boží posel. Proto se Ježíš obrací na své učedníky. Co si o mně myslíte vy?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로 생각했습니까?“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주 잘 못 알고 있지 않았고 예수님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에를들어, 세례 요한,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인물들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위에 언급된 선지자들이 예수님과 가장 닮은 점은 아마도 집권세력과 충돌했지만 핍박을 겪으면서도 그들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위대한 선지자들의 뒤를 이어 그들 힘으로 끝까지 감당해 낼 수 없는 일을 계속해 나가실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의견들을 비판하신다거나 거부하시지 않으신다는 점을 주목합시다. 이러한 생각들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의 사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Slova se ujme vždy pohotový a energický Petr: „Ty jsi Mesiáš, Syn Boha živého.“ Víme, že Ježíš byl vůči titulu Mesiáš zdrženlivý, protože se s ním spojovala očekávání, která mu byla cizí. Mesiáš – ale jaký? Hned o pár řádků dál se ukáže, že Petr sám nechce připustit, aby mesiáš trpěl a byl zabit svými nepřáteli. Nicméně v tom zásadním se Petr nezmýlil. Ježíš není jen další z řady proroků. V Ježíšově přítomnosti je přítomen Bůh sám. Nejen Syn člověka, ale také Syn Boží. To zatím není žádná propracovaná teologie, ale tu Ježíš po svých učednících ani nepožaduje. Ostatně: ani po dvou tisících let teologického vývoje na tom nejsme o mnoho lépe. Stojíme před tajemstvím. Ježíš: člověk jako já a ty, člověk z masa a kostí – ale právě v něm se zpřítomnil Bůh sám a ukázal, kým je. Totiž Bohem lásky a milosrdenství.

항상 준비가 되어있고 에너지가 넘치는 베드로가 외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메시야에 대해 잘 못 된 기대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불리우는 것을 썩 내켜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메시야, 그러나 어떤 메시야입니까?“ 몇 절 뒤에 가서 베드로는 바로 예수님께서 적들에 의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실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내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것에서 베드로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계보에 있는 또 다른 선지자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임재 속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도 합니다. 이 진술은 아직 정교한 신학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진술과 같은 대답을 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신학이 발전하기는 했지만 이 점 즉, 기독론에 있어 우리는 많은 발전을 이루지 못 했습니다. 기독론과 관련하여 우리는 신비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여러분과 같은 사람, 살과 뼈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분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며,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을 통해 보이셨습니다. 즉, 그 분을 통해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심을 보이셨습니다.

 

Za koho mě pokládáte vy? To je otázka namířená i na nás. Samozřejmě na ni můžeme odpovědět třeba příslušnou pasáží apoštolského vyznání, anebo si vzpomeneme na to, co jsme se učili při konfirmační přípravě. To je v pořádku. Tato otázka je ale zároveň velmi osobní. Ve své víře se sice můžeme a máme opřít o církev a její tradici a je dobře, že jsme jí obklopeni. A přece nakonec stojíme před svým Spasitelem každý sám za sebe. Co pro mě znamená Ježíš? Jak to, co o něm vyznávám, prostupuje a ovlivňuje mé myšlení, cítění, jednání? Stojím si za svým vyznáním v různých situacích, které mě potkávají? Vpustím evangelium skutečně do všech oblastí svého života, anebo si raději vyhradím i nějaký prostor, kde si rozhoduji po svém? Ani Petr, ani nikdo z nás o sobě nemůžeme říci, že věříme tak, jak bychom měli. Ale i my, se svou často kolísající a zmatenou vírou, jsme pozvaní do Božího království. Amen.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우리를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질문에 예를들어, 사도신경의 관련 구절로 대답할 수도 있고, 입교교육 때 배운 것을 떠올려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동시에 아주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질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관련하여 교회와 전통에 의존할 수 있고 또 의존해야 하며, 그렇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국 각자가 지금의 나로, ‚나의‘ 구주 앞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요?“ „예수님에 대한 나의 고백이 내 생각과 내 감정과 내 행동에 어떻게 스며들고 있고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나는 내가 만나는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 내가 고백하고 있는 나의 고백에 부합하게 서 있습니까?“ „나는 정말로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 복음을 적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스스로 결정하는 공간을 따로 떼어두는 것을 더 선호합니까?“

베드로도 또는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완벽한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흔들리는 믿음과 혼란스러운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