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22년 10월 2일)
- 누가복음 17장 11-19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연합예배20221002 - 눅17,11-19.docx
<누가복음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공생애 막바지,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소리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께서 보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시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열 사람이 다 치유를 받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것은 이 하나 뿐이냐 하시고, 그 돌아온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은 열 명의 환자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경험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궁극적인 초점은 그 치유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 그 치유를 경험하고 그 즉시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했던 한 이방인이 그 믿음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모습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멀리 서서” 예수님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병환자는 그 부정한 질병이 나을 때까지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도록 율법이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유대사회 속에서 나병에 걸린다는 것은 단순히 건강을 잃는 것을 넘어 소속된 공동체로부터 내쳐지고 이전의 관계성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이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 즉 갈릴리로부터도 사마리아로부터도 모두 변두리에 해당하는 경계 지점에 섞여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이런 소외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날에도 이처럼 치료가 쉽지 않은 여러 신체적, 정신적 질병으로 인해 고통과 소외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적 현실 속에서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타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들이 소리 높여 부를 때 그분이 들으시고 보십니다. 그리고 치유와 구원을 베푸십니다. 아무리 비참하고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소망을 놓치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열릴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인생에 닥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예수님을 간절히 부르는 계기가 되고, 참된 구원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나병환자가 병이 나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고자 할 때 그처럼 제사장에게 가서 진찰을 받고 필요한 의식을 치르도록 율법이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말을 하실 때 그들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적잖이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을 당시 그들은 병이 나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병이 나았음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은 그 다음 단계의 일, 즉 병이 나은 사람이 취할 행동을 지시받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즉시 치료해주시고,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하게 한 후 보내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눈에 보이는 질병의 치유 이상을 예수님이 그들에게 기대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말씀에 의지해 움직여가는 거리와 시간 속에서, 그리고 마침내 그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는 경험 속에서, 그들 속에 믿음이 생겨나기를 바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절박함 때문이었을까요? 열 사람 모두 그 말씀을 따라 움직였고, 또한 열 사람 모두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런 순간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이후의 반응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드렸고, 나머지 아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아홉은 내처 자기 마을 제사장에게로 뛰어갔을 것입니다. 그 일까지 마무리되어야 나병으로 인해 생겨난 그들 삶의 문제가 다 해결됐다 느끼며 안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9:1이라는 숫자의 대비가 보여주듯, 어쩌면 이것이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반응일지 모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반드시 돌아와 감사를 표하라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마리아 사람이 마음에서 우러나 스스로 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행동을 ‘그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십니다. 그 믿음이 언제부터 있던 것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치유가 임한 것을 느꼈을 때 그의 마음이 그 일을 가능케 하신 그분을 향해 발돋움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방식입니다. 반면, 돌아오지 않은 그 아홉은 예수님을 통해 치유를 경험한 이후에도 자기중심의 원 안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것을 경험했음에도 한 사람에게 그것은 ‘은혜’였고, 나머지에게는 그저 ‘잘 된 일’이었습니다.
내게 일어난 어떤 좋은 일이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게 호의를 지닌 다른 누군가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값없이 주어진 선물임을 인식할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은혜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마음은 내가 받은 것과 동일한 것으로 되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사의 빚, 그 선물 속에 담긴 그분의 호의와 진심을 내가 마음 깊이 인식하고 인정한다는 것과, 이 은혜 의식 속에서 이제 내가 그분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음을 고백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감사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일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받은 자와 베푼 자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치유의 은혜는 열 사람 모두에게 베풀어졌으나 마음이 예수님과 하나로 묶일 수 있었던 사람은 돌아와 감사했던 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구원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전에 속해 있던 세계에서 건져져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 즉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살게 되는 것이며, 이전과는 다른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으로 여기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그분께 드렸던 감사가 그의 믿음의 표현이며, 그 믿음의 감사를 통해 구원이 그에게 임하였음을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이 예수님의 반응은 그분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 모두가 그 감사의 자리에 나오길 그분이 바라고 계셨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려고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은혜를 입은 후에 그 예수님께로 나아가지 않고 자기 마을 제사장에게로 달려가 바로 이전에 살던 세계로 복귀한 그 아홉 사람의 이후 삶은 어땠을까요? 한 가지 문제가 지나가면 또 다른 문제가 찾아오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리고 같은 문제로 늘 다시 넘어지곤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코로나가 끝나고 전쟁이 끝나면 우리 삶이 퍽 나아질 것 같지만, 그 삶의 자리에 오셔서 나를 만나주시는 주님을 통해 내가 바뀌지 않는다면 근본적인 삶의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나병의 치유를 넘어 더 온전한 구원이 그들에게 필요함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치유의 은혜가 그들 속에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님께 나아온 자리에서 그들이 참된 구원을 경험하길 예수님은 바라신 것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어떤 교리에 동의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 마음의 방향이고, 우리가 믿는 그분과의 묶임입니다. 믿음 자체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믿음의 증거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감사’와 ‘사랑’은 신앙인의 삶 속에서 믿음이 표현되는 방식이자 구원받은 삶의 증거입니다(골2:7;갈5:6).
감사는 믿음의 표현인 동시에 소속감의 표현입니다. 자신의 존재와 삶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또한 내가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지 불분명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감사를 잃어버린 채 살기 쉽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권면하고,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상황이 좋을 때 뿐 아니라 상황이 안 좋을 때에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7세기의 성자 니느웨의 이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 뿐이라”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에 반복해서 나오는 이 말씀은 감사의 근거가 우리 눈에 보이는 상황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있음을 알려줍니다. 바로 이 근거 위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과일나무에 열매가 없고 논밭에 소출이 없고 우리에 가축이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리라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감사가 더욱 넘치게 하는 삶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이를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 그것은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더욱 넘치게 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9:8-15).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선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도록 능히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주시는 분이며, 우리에게 먹을 양식뿐 아니라 또한 심을 것, 즉 나눌 것을 주셔서 의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추수감사예배의 근거는 지금 내 창고 안에 쌓여 있는 것들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게 하신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감사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께 받아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서로 나누었던 것들로 인해 또한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게 은혜를 베푼 그 사람을 생각하며 내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듯, 누군가는 나를 통해 받은 어떤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지 모릅니다.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한 새로운 만남들, 그리고 더 깊어진 관계들로 인해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두를 생각하며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시50:23) 말씀합니다. 열 사람이 간청했고, 열 사람이 기적을 경험했으나, 주님께 감사하러 온 것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일컬어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라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사람과 같이, 감사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구원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