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3년 2월 12일)
- 마태복음 5장 1-6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마5,1-12.docx
<마태복음 5장 1-6절>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이유는 제각각이었을 것입니다. 병 낫기를 소망해서, 바라는 바를 이루려고, 혹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무리를 보신 예수님은 조용히 산을 오르기 시작하십니다. 그러자 무리 중에 일부가 그분을 따라 산을 오릅니다. 그렇게 예수님 주위로 더 작은 규모의 공동체가 산 위에 형성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 산을 오른 사람들, 예수님께 배우려고 몇 걸음 더 수고하여 나아간 사람들을 성경은 ‘제자들’이라 부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바로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입을 열어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습니다. 아마도 이 한 말씀이 뒤에 이어지는 모든 말씀들을 이해하는 열쇠일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πτωχοίΰ τῶ πνεῦματι)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요? 어째서 그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라 말씀하시는 걸까요?
여기 ‘심령’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뉴마’입니다. 영어로는 spirit, 우리말로는 ‘영’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란 “The poor in the spirit” (NIV), ‘영에 가난함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할 것입니다.
뭔가 더 어려워진 느낌이죠. 그냥 쉽게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하면 안 될까?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마음은 heart입니다. 이 heart와 관련해서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깨끗함’입니다. 마음의 깨끗함. 그런데 팔복의 시작인 이 3절에서 예수님이 초점을 맞추시는 것은 좀 다른 것입니다. Poor in the spirit, 영의 가난함입니다.
여기서 ‘영’(πνεῦμα/spirit)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우리 사람의 영, 즉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을 가리킵니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을 접촉하고 영적인 것들을 깨닫는 기관입니다. ‘가난’(poor)은 뭐가 없는 상태를 말하죠. 부정적 의미로는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결핍된 상태, 긍정적 의미로는 다른 것으로 채워질 수 있게 비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의 가난이 복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후자의 의미일 것입니다. 채워질 수 있기에 비어 있어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즉, 영에 가난함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영,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이 지금 비워져 있고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다, 그래서 그곳이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의 가난이 오히려 복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오히려 복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나로 충분하다, 다른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다, 어떠한 변화도 필요없다, 그야말로 이미 충분한 인생,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영의 가난함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내 영이 이미 나와 내 것으로 꽉 차 있어서 하나님과 그분에게서 오는 새로운 것으로 채워질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을 뒤집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지금 배부른 자, 지금 부유한 자, 지금 울 일이 없는 자가 복받은 사람이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배고픈 자, 지금 가난한 자, 지금 우는 자가 오히려 복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벼랑끝에 몰린 상황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향해 두 팔을 뻗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가난한 자가 그 복을 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가 지금 경제적으로 부유한 자보다 하나님을 향해 두 팔을 뻗을 가능성은 높지만 반드시 그렇다 말할 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 마태는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하지 않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천국’이라 하십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을 누리는 곳입니다. 이 천국의 복은 우리가 죽은 뒤에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이 세상 밖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이 세상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그 영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고 또 비어 있는 사람은 이미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천국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들 속에서 예수님은 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릴 천국의 복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애통한다는 것은 “몹시 슬퍼하고 가슴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는 슬프고 아픈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코비드 판데믹,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지난 주간에 우리는 또다시 튀르키예와 시리아에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거나 매몰되었다는 가슴아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고의 의미를 누구도 다 안다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사고로 소중한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그 어떤 말도 충분한 위로가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세상 끝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애통하는 것이 다시 없으리라’(계21:4) 계시록에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대담한 소망의 말씀을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고 계십니다. “애통하는 자가 오히려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여기서 ‘위로’란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다운 위로를 의미할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슬프고 아픈 현실 속에서 하늘을 향해 통곡하며 호소하는 사람들, 오히려 그들이 그 영의 가난함 속에서 하나님의 채우심,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메시지성경)
이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일반적으로 ‘온유한 자’ 하면 성품이나 표정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을 연상하기 쉽지만, 성경에서 ‘온유’는 힘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힘을 제어하며 물릴 줄 아는 능력,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히 하나님 뜻에 순종할 줄 아는 능력, 하나님을 의뢰하고 소망함으로 자기를 비우고 낮추며 뒤로 물릴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런 사람은 땅을 차지하기는커녕 있는 땅도 다 빼앗길 것 같은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의 땅은 분명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땅을 말하는 게 아닐 겁니다. 온유한 자의 전형이신 예수님은 머리 뉘일 땅 한 평 갖지 못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분 마음의 땅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그대로 다 품을 만큼 넓었고, 그가 지나간 마음의 자리에는 마치 황무지가 옥토로 변하듯 새 땅이 만들어지곤 했으니,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온유한 자에게 기업으로 주어질 땅이란 이 세상 사람들 마음과 관계 속에 보이지 않게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할 것입니다. 땅을 투기와 이윤의 대상으로만 보면 이 예수님 말씀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땅은 ‘생명의 터전’입니다. 땅은 생명을 받아 안고, 생명을 움트게 하고, 생명을 자라게 합니다. 또한 생명을 꽃피게 하고 열매맺게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뒤로 물려 마련된 공간을 그처럼 하나님이 일하시는 생명의 터전으로 내어드리는 사람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그가 서 있는 자리에 하나님이 오셔서 일하실 때,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 그가 하나님께 받는 기업이 될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어떤 사람일까요? 세상에 만연한 불의로 인해 억울함을 경험한 사람, 이 세상 어디에도 호소할 길이 없어 가슴을 치며 하늘을 향해 호소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자기 안에 있는 죄악과 불의를 마주하고 무력함 속에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을 구하며 갈망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 누구보다 비참해 보이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일 텐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복이 있다, 배부름을 경험할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이유는 동일합니다. 의에 대한 갈망, 그 영의 가난함 속에서 그들이 의로우신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의로 채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에 취해 있는 사람, 자기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주림과 비참함을 경험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래서 무력함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두 팔을 뻗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통해 배부름과 구원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어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내용들을 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오늘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집이나 땅이나 돈이나 음식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정말 복있는 사람이 누구이고 정말 복된 삶이 무엇인지 달리 생각하게 되리란 것입니다.
누가 복있는 사람입니까? 영의 가난함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두 팔을 뻗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는 사람,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까? 나와 내 것으로 꽉 차 있던 곳을 비워 하나님과 하나님 주시는 새 것으로 채워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