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볼 수 있도록

<사도행전 9:10-20>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람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기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성경에는 꿈(dream)과 환상(vision)에 관한 내용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꿈과 환상을 통해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셔서 하늘의 뭇별을 보여주시며 그의 자손이 그와 같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속임수로 복을 가로채고 도망길에 오른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하룻밤 유숙하던 곳에서 꿈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타국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석해주며 이집트 총리직에 오르고 형들과의 재회 속에서 비로소 어린 시절 꾸었던 꿈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여호와의 전에 누워 자는 중에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어린 솔로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원하는 것을 구하라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의 이스라엘 포로들 가운데 있던 선지자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여러 환상들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 것과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위기 상황 속에서 다니엘이 간구했을 때 하나님은 바벨론 왕이 꾼 꿈에 관한 은밀한 것을 밤에 환상으로 그에게 보여주십니다.

구약성경에서만 그런 내용들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약혼녀 마리아의 결혼전 임신 사실을 안 요셉에게 하나님은 꿈을 통해 그 일의 의미를 알려주시고 이제 그가 어떻게 행해야 할지 분부하십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러 왔던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갑니다.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꿈에 헤롯을 피해 이집트로 가라는 지시를 받아 떠나고, 헤롯이 죽은 후 다시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로 와서 삽니다.

경건한 이방인 고넬료는 환상 중에 주의 사자의 분부를 듣고 시몬 베드로를 청하고자 욥바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 시각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던 베드로는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고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주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시아에서 전도의 문이 막히는 상황에서 바울은 밤에 환상 중에 한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말하는 것을 듣고 이를 주의 부르심으로 여기며 떠납니다.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은 밤에 환상 중에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 년 육 개월을 거기 더 머물며 가르칩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모든 내용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방식,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예상과 기대와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방식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말씀하시고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보다 깊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도 우리 이성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 하나님의 빛을 받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많은 한계를 지닌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알려주고자 하실 때 그분은 어떤 방식을 사용하셔야 할까요? 때때로 우리의 예상과 기대를 초월하는 방식으로 다가오셔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은 꿈이나 말이나 이적을 마치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양 속이는 일, 그리고 거기에 미혹되는 일을 경계하고 있습니다(신13:1-3;렘23:25-32). 그런 거짓선지자들의 활동, 오늘날 이단-사이비라 불리는 집단들의 폐해를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사례들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자체를 거부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 인생과 세상 역사에 개입하시는 방식을 우리의 예측과 추론의 범위 이내로 제한하는 것은 마치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꼴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사람에게 개입하시고 역사하셨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체를 관통하는 큰 사건은 후에 바울이 될 사울의 회심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 전하는 자로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오늘 본문은 이렇게 사울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일에 주님께서 다른 한 사람을 역시나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불러 사용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10) 그 날 아나니아는 “환상 중에” 그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평상시와는 다른 차원의 시야, 즉 새로운 비전 속에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그에게 정보를 주고 임무를 맡기기 위한 부르심이었지만, 또한 대화를 통해 그의 시각을 바꿔주기 위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 직가라 하는 거리에 유다의 집이 있다. 거기 가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며,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며 다시 보게 하는 것을 환상 중에 보았다.

아나니아의 말: 주님, 그 사울이란 사람에 대해 제가 주위에서 들은 게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잖은 해를 끼쳤고, 이곳 다메섹에 오면서도 예수 믿는 자들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 받아왔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 가라. 그 사람은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지 내가 그에게 보일 것이다.

이에 아나니아는 떠납니다. 일러주신 곳으로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며 말합니다: “사울 형제, 나는 주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당신이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당신에게로 보내셨습니다. 당신을 다시 볼 수 있도록,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도록!” 그러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그가 다시 보게 되었다 합니다.

여기서 ‘다시 보게’ 되었다는 말은 단순히 이전의 시력을 회복했다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전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던 것들을 이제는 보게 되고 알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이제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보게’ 된 사람은 사울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나니아 역시 그 과정에서 ‘다시 보게’ 되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박해자로만 알고 있던 사울이 주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위해 택하신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이제껏 많은 고난을 끼쳤던 그 사람이 앞으로 주님의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게 되리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사울이라는 사람을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 보게 된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입에서 나왔던 ‘형제 사울’이라는 호칭은 이 다시 보게 되는 체험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6-17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예수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나타내주는 표지 중 하나는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사람도 그 사람 자체로만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람을 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그리스도를 사이에 둔 사귐입니다.

다시 보게 되는 일을 경험한 것은 아나니아만이 아닙니다. 다메섹에 있던 제자공동체 모두가 그 일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19) 주님은 아나니아를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 직접 사울을 다시 보게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나니아를 통해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신 것은 회심한 사울이 아나니아를 비롯한 그 다메섹의 제자공동체에게 받아들여지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보게 된 사울은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그 다메섹의 제자들과 며칠간 성도의 교제를 나눕니다. 그 일에 아마도 아나니아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다시 보게 된 한 사람은 이처럼 공동체 전체에 새로운 관계성을 창조하는 중요한 매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프로이드나 융 같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듯 우리가 자면서 꾸는 꿈은 한 개인이나 집단의 무의식이 표현되는 방식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꿈이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분별이며 우리 마음의 방향입니다. 꿈으로 길흉을 점치려는 모습은 그 사람 마음 속에 존재하는 두려움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 사람은 꿈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길보다 높은 하나님의 길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꿈이나 환상 같은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뭔가를 나타내실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일반화하여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볼 때 유력한 경우 중 하나는 이전에 보던 대로 보는 일을 멈추고 모든 것을 ‘다시 보게’ 하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할 때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특별히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나의 적대감이나 선입견이 너무나 견고해서 주님의 선하신 뜻이 진행되고 이루어지는데 계속해서 장애가 되고 있을 때, 어쩌면 주님은 평소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지평 속으로 나를 이끄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다시 보게 하시고 이전과는 다른 마음과 태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우실지 모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여정 속에서 계속해서 다시 보게 하시는 은혜를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