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3년 9월 10일)
- 로마서 13장 8-14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 롬13,8-14.docx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지진 피해를 입은 모로코에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가 임하길 기도하며,
오늘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딱 하나의 계명을 남기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요13:34)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한다는 건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 같이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장에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6-8)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우리가 사는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일서 4장 9절에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자격 없는 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며,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던 사람들을 살리며 새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4:19)
우리가 행하는 사랑은 우리가 받은 사랑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을 경험하여 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이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만 사랑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로 초청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부정하지 않으셨고,
율법의 근본정신이 사랑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그것이 율법의 핵심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상호성을 내포합니다.
때문에 이 말씀은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서로 사랑의 계명은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게 주어진 계명이며,
모든 시대 교회들에게 주어진 계명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른 이들과 구별짓는 특징,
교회를 세상의 다른 공동체들과 구별짓는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서로 사랑’을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일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3:35)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함께 노력하라는 말씀이지,
나와 똑같은 수준의 사랑을 상대방에게 요구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장 완벽한 사랑의 모습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간의 사랑,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연합하고 동역하는 사랑이겠지만,
그런 상호적 사랑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죄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 실현되기 쉽지 않습니다.
한 쪽에서 사랑을 실천해도 다른 쪽에서 사랑으로 응답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교회 밖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연스럽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정도의 인격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나타내신 사랑이 ‘십자가 사랑’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이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누리던 ‘사랑의 기쁨’은
죄 많은 이 세상 속에서 ‘사랑의 고통’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랑 아닌 것’(non-love)에 저항함에 따른 고통이었고,
사랑 아닌 것에 의해 피해입은 사람들과 함께함에 따른 고통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상호적 사랑은
죄 많은 이 세상 속에서 때로는 일방적으로(one-way)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형태로 번역되어 실천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인 ‘은혜’와 ‘용서’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은혜와 용서 모두 이미 그 전에 존재하던 악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사랑입니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이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라는 이 법을 범하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율법의 기본 틀입니다.
그런데 이를 어긴 범법자들에게 벌이 면제되고 용서가 주어진다면 그것이 은혜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은혜가 율법을 폐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는 율법의 부정이 아니라 보류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그 빚에서 풀려나게 해주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잘못이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용서는 정의의 부정이 아니라 초월이며, 바로 그렇게 때문에 그것이 용서인 것입니다.
은혜도 용서도 그저 수동적인 자기-희생(self-sacrifice)이 아닙니다.
이 둘은 모두 너와 나 모두의 구원을 지향하는 자기-내어줌(self-donation)이며,
죄 많은 이 세상 속에서 번역되어 실천되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말할 때,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나에게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사랑으로 행할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가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는 세상에 만연한 악에 무기력하게 흡수되지 않는 사랑,
그리고 그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는 사랑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여기서 ‘밤’은 죄악된 세상의 어둠을 말하고,
‘낮’은 새 창조의 빛, 하나님의 구원을 말합니다.
바울이 깨어나라 말하는 지금은 이미 밝아진 대낮이 아닙니다.
아직 밖은 어둡습니다.
죄로 가득찬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사랑은 어떤 형태를 띠고 실천되어야 할까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여기, ‘낮에와 같이’ 행한다는 말은 ‘마치 밤이 아니라는 듯’ 행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두운 밤인데도 그것이 어둠이 아니라 주장하며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두운 밤에도 밝음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어두운 세상 속에 있지만 그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갑옷, 이것은 전투 중에 입는 보호장구입니다.
어두운 밤에도 낮에와 같이 살 수 있으려면
그 어둠의 일과 맞설 수 있는 빛의 갑옷이 필수적입니다.
본문의 맥락을 고려할 때, 이 빛의 갑옷이 의미하는 바는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14절에서 바울은 이 빛의 갑옷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이라 표현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사랑 안에 거하며 그분이 먼저 가신 사랑의 길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2-3)
그러나 고난 중에도 예수님이 십자가 사랑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또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성 속에 있었기 때문임을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두 가지 일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인데도 그것이 어둠이 아니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의 결과는 악을 용인하고 거기에 흡수돼 버리는 일일 것입니다.
어둠을 어둠이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다툼과 시기를 벗어버릴 것을 권면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얽매여 있는 어둠의 일들이 더 있을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지고 이웃에게 악을 행합니다.
그러나 현재 내가 붙들고 있는 진리와 정의도 불완전한 것일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 현재의 ‘진리’와 ‘정의’도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에 의해 구속될(redeemed) 필요가 있습니다.
어둠의 일을 계속 몸에 걸치고 있는 한 진정한 사랑의 실천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일을 벗어버립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또 한 가지 일은 빛의 갑옷을 입는 일입니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밝음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의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요14:23)
바로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하라
이 주님의 새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여정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사랑의 기쁨보다는 사랑의 고통이 더 크게 다가오는 순간을,
자기를 내어주는 일방적 사랑을 행해야 할 순간을 맞이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우리가 하나님과의 상호적 사랑의 관계성 속에 거할 때,
그 예수님 닮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공급받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에게 임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여
우리가 주님 가신 사랑의 길을 잘 따라갈 수 있기를,
죄 많은 이 세상 속에서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 입고 승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