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부활로

<요한복음 5 19-29>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아들에게 보이시고 그보다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속에 있게 하셨고

27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부활의 아침,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습니다! 사망 권세 이기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모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아리마대 요셉이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장사되었고, 그 무덤 입구는 큰 돌로 인봉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따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혹시나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할까 하여 자기 경비병들을 보내 무덤문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식 후 첫날 새벽 여인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다시 무덤을 찾았을 때 이미 그 돌문은 굴려져 있었고, 무덤은 비어 있었으며, 지키던 자들은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인들은 그곳에 있던 천사들로부터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28:6)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눅24:5-6)

이어 그 여인들은 그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러 달려갔고, 요한복음에 따르면 베드로와 요한도 무덤으로 달려가 그 빈 무덤을 확인했으며,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인 곳에 또한 나타나셔서 그분 몸의 상처를 보여주시고 제자들 마음 속의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의심 많은 제자 도마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그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바로 하늘 아버지께로 가시지 않고 지상에 약 사십 일을 더 머무르시며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고 가르치시며 이후 그들이 성령을 받아 주님의 증인으로 설 수 있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지금 여기서 믿음으로 그분의 길을 따르는 자들에게 복음인 이유는 무엇인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서 십자가의 길을 가며 선한 일을 행한 자기 아들을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살리신 것 같이, 그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따르며 이 땅에서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그 예수님께서 세상 끝에 다시 일으켜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산 소망이 예수 믿는 자들을 예수 따르는 길로 담대히 이끄는 놀라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그분의 부활 이후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 이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본문 앞에는 예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이야기와 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 19절에서 예수님은 그분이 행하신 그 일들이 그분 스스로 행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고 그 하나님의 일의 연장선상에서 하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본문 21절에서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시는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여기서 ‘죽은 자들을 살린다’는 말은 단지 생물학적 생명이 다한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린다는 의미도 갖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나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예수님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신 적이 있었고, 또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나 무덤 속의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리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다 집중하셨던 하나님의 일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통해 병이 낫거나 다시 살아난 사람들도 얼마 후 다시 죽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우리의 생물학적 생명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받아 영적으로 살아난 사람, 즉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은 그 생물학적 생명이 다한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이고 마침내 세상 끝에 새 몸을 입고 일어나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원의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본문 22절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취소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심판은 분명 있을 것이나, 그 심판의 권한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온 그의 아들에게 일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운명이 그렇게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심판의 권한을 죄인들에 대한 즉각적인 정죄와 형벌의 형태로, 혹은 그분에게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만 용서와 구원을 베푸는 형태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예수님은 그 심판의 권한을 더 많은 사람을 자기 안에 품고 구원하시려는 방향으로, 모든 죄인에게 자기 생명을 주어 다시 살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바로 그 마음과 결단으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하나를 오늘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시는 것을 그의 아들이 보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기 이전에도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시는 일을 하고 계셨고, 그 아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들을 이미 보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로 나아갈 때 결국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켜 살리실 것을 그 아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 아들의 믿음대로 하나님은 행하셨습니다. 모든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기 아들을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살리셨습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육중한 돌문도, 그 앞에서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다시 살려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문은 밖에서 만이 아니라 안에서도 잠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던 날 저녁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몸의 상처를 보여주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두려움 가운데 안에서 닫힌 문도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시는 그 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그 아들 예수님 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21)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26)

생명의 주 예수께서 행하시는 그 살리는 사역에 대해 오는 본문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25절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각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면서 그 아들 예수님을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보냄 받은 분이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낸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 심판의 권한을 위임 받아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이 땅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 죽음의 자리에서 일으켜질 수 있는 길을 본문 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께서 행하시는 살리는 사역 두 번째가 본문 28절과 29절에 나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것은 세상 끝에 있을 일을 예고합니다. 생명의 주 예수께서 마침내 심판주로 세상에 임하실 때 무덤 속에 있는 자들, 죽어 묻혀 있던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 합니다. 이천 년 전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그분에게서 들었던 음성은 모든 죄인을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시는 은혜로운 초청의 말씀이었지만, 세상 끝에 그분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사람들이 그분에게서 들을 음성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사람들을 구분짓는 준엄한 심판의 말씀일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롬2:16)에 각 사람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따라 어떤 이는 일어나 새 몸을 입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것이고, 어떤 이는 일어나 정죄를 당하며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것입니다(마25:33,46).

그 구분하는 기준은 선을 행하느냐 악을 행하느냐에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질문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의 기준을 따라 ‘선’을 정의하고 ‘정의’를 정의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전한 선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이를 행한다는 뜻이며, 이 땅에서 그렇게 살아간 사람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일을 행한 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행하는 선행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믿음은 서로 배치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말한 것은 자신이 행한 선행을 공로로 내세워 당연한 구원의 자격으로 삼는 것을 비판한 것이지 선행 자체를 잘못된 것이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표지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5:6)이라 말합니다. 믿음의 진실성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의 선행을 통해 표현되고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그 마지막 심판의 때에 그의 선행을 인정받아 생명의 부활에 이를 수 있을까요? 이 땅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이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사는 사람, 그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예수님 가신 길을 따라 그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설령 사람들의 배척과 박해를 불러오는 일이 되고, 심지어 죽음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할지라도, 예수님처럼 그 십자가의 길 끝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신뢰하고 소망하며 끝까지 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내가 이루고 싶은 어떤 것을 하나님 도움 받아 이루는 게 믿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분께 나를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는 것 또한 그 일이 실제 일어난 사실임을 믿는 것을 넘어, 예수님을 통해 일어난 그 하나님의 역사가 나를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고 또 그래야 함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42-44,58-59)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분의 제자 공동체는 와해되었을 것이고 교회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이 부활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였으며, 이 부활의 소망 가운데 모진 박해를 다 이겨내며 그들 속에 살아 역사하는 복음의 능력을 증거했던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그 박해의 상황 속에서 오히려 사도들은 “그(예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41)고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들에게 단지 교리로만이 아니라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모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는 이 복된 기쁨의 날에 하나님께서 그 부활의 복음을 통해 우리 속에 믿음과 소망을 새롭게 하시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기쁨의 샘을 터뜨려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 무덤을 나오는 것을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와 같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마침내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살리시는 것을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부활의 믿음과 소망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