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코스
구 시가 – 중앙과 북동쪽
1. 나 프지꼬삐에 거리에 있는 둠 우 체르네 루쉐(검은 장미의 집)와 이전 왕의 궁전 – 2. 히베른의 집, 화약 탑 뒤에 있는 이전 동전제조공장, 부꾸요스끼 궁전 – 3. 틴성당 사제관 – 4. 이전 오떼르스도르프 식스뜨의 집 – 5. 띤 앞의 마리아 교회(옮긴이-띤 성당) – 6. 부도브의 바츨라브 부도베쯔의 집 – 7. 살바또르 개혁교회 – 8. 성 두흐 교회 – 9. 쉬몬과 유다 교회 – 10. 성 하슈딸 교회 – 11. 끌리멘트 개혁교회 – 12. 뽀지치의 성 뻬뜨르 교회
까롤린의 대학에서 시작한 첫번째 코스와 마찬가지로 두번째 코스 역시 15세기 초 프라하 까렐대학의 역사와 후스시기와 관련된다. 프라하 중심시내를 “금의 교차로”라고 부른다. 이전 대학인들의 집인 둠 체르네 루쉐(검은 장미의 집) 이다. 무스텍 지하철 정거장 출구로부터 나와 지하철 역쪽으로 약 100미터 떨어져 있는 현재 상가인 나 프지꼬삐에 12/853 체르나 루쉐(검은 장미) 까지 간다. (우를리즈스까 거리 반대편에 있는 멀지않은 까로린까지 약 100미터)
II/1. 나 프지꼬삐에 검은장미의 집 (Dům U černé růže Na Příkopě) 과 이전 왕의 궁전(Králův dvůr) (1-2분)
현대식 상가가 매우 유명한 종교개혁의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데 우선 우리들은 놀란다. 원래는 고딕건물로 체코 대학선생들을 위한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1408년 이곳에서 예로님 선생(M. Jeronym)이 옥스포드에서 프라하로 가져온 영국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의 문서들에 대한 첫번째 학술 토론이 열렸고 후에 얀 후스 선생(M. Jan Hus) 이 진지하게 그를 연구하였다. 위클리프에 대한 연구와 토론은 위클리프에 대한 관심으로 종교재판을 앞두고 프라하로 도주한 드레스덴의 독일인 교수들이 체코 형제단과 접촉을 하면서 1412년에 더욱 심화되었다. 마기스터 니꼴라우스가 그들중의 지도자가 되어 프라하에서 미꿀라쉬 드라슈댠스끼 선생(M. Mikuláš Drážd´anský) 그리고 그의 동생 뻬뜨르(Petr) 그리고 얀 드라엔도르프(Jan Draendorf)와 뻬뜨르 뜨르노프(Petr Turnov)의 체코이름을 갖게되었다. 미꿀라쉬 선생(M. Mikuláš)은 양종성찬에 대해 스뜨지베르의 야꼬우벡 선생(M. Jakoubka ze Stříbra)과 매우 활발히 협력하였다. 그의 성서신학적인 견해로 야꼬우벡이 프라하에서 양종성찬의 성만찬을 벽속의 마르띤 교회(kostel Martina ve zdi)(I/11)에서 시행하게 하였다.
체코형제개혁교인들 가운데 체코종교개혁시대의 독일인 후스추종자들의 실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후스종교개혁시대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후스의 죽음 이후 많은 독일인들이 체코 선생들 보다 더 열정적으로 성찬잔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얀 드라엔도르프는 1417년에 양종성찬을 시행하는 교회에서 신부서품을 받았다. 다른사람들은 후스파 종교개혁 프로그램의 열정적인 전파자들이 되어 그들 대부분은 독일에서 종교재판의 희생자들로 화형장에서 사라졌다.
현재 후스파의 역사를 지닌 건물 „검은장미의 집“에서 제정시대 풍의 건물전면의 발코니의 금색바탕위에 검은장미의 옛 문장을 볼 수 있다.
„검은 장미의 집“으로부터 아주 예쁘게 수리된 넓은 보행길 „나 프지꼬삐에(Na Příkopě)“ (이전에 구시가의 토성으로 제방이었다.) (옮긴이 – 프지꼬프의 뜻을 뚝방으로 해석할 수 있다) 거리를 따라 계속 걸어간다. 같은 쪽에 얼마가지 않아 고전적인 교회당 성 크지쉬(sv. Kříž). 약 100미터 역시 같은 쪽에 있는 슬로반스끼 집(Slovanský dům) 걸어간다. 이 집은 프지호브스끼 귀족가문을 위해 전통적인 양식으로 18세기말에 건축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작은 고딕양식의 집이였으며 1414년부터 뜨로즈노브의 얀 쉬쉬까(Jan Žižka z Trocnova) 소유였다. 당시 그는 „왕실 문지기“ 였고 그리고 „애꾸눈 야넥“ 으로 유명하였다. 거리의 끝나는 곳에 있는 화약문(Prašna brána)으로 불리우는 신고딕양식의 탑까지 걸어간다.
정확한 이름은 화약탑(Prašná věž)이다. 후스종교개혁 시대에 구시가를 둘러쌓고 있는 8개의 탑가운데 하나였다. 1475년에 블라디슬라브 2세 야겔론스끼(Vladislav II. Jagellonský)가 원래의 화약탑에 새로운 더 크고 아름답고 웅장한 르네상스양식의 탑을 세웠다. 그러나 이 탑이 완성되지 못하였다. 1757년에 프라하를 포위하여 공격할 때 크게 파괴되었고 후에 오늘날의 유사 고딕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8세기 초에 그 탑안에 화약을 넣어두었기에 화약탑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계속해서 걸어가면 원래 프라하시의 성문이 나온다 – 이 곳에 현재 시민회관(Obecní dům)이 있다 – 중세시대에 바츨라프 4세(Václav IV) (+ 1419)에 의해 세워진 왕의 궁전(Královský dvůr 또는 Králův dvůr)으로 불리우는 체코 통치자의 구시가 성이 1383년부터 있었다. 그의 계승자들 가운데 후스파의 왕 뽀제브라디의 이지 이지 (Jiří z poděbrad) (+1471) 까지 여기에 거주하였고 그 다음 계승자인 블라디슬라브 2세 야겔론스끼(Vladislav II. Jagellonský) (+1516)가 흐라드차니에 있는 자신의 궁전으로 이사를 하였다.
연대기적으로 구시가의 왕의 궁전(Královský dvůr)은 얀 후스 선생(M. Jan Hus)의 프라하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 1414년 8월 26일 콘스탄츠로 가는 것을 결정하기전 성문에 이단자로 자신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붙였다. 왕 바츨라프 4세의 새로운 명령으로 그를 반대하는 어떠한 증거도 누구도 제시하지 못해 그를 신임하기위해 소환명령을 내렸다. 만약에 그가 이단임을 증명하게 되면 콘스탄츠에서 열리는 공의회에 그를 세워 이단으로 벌을 받게하겠다고 하였다. – 격변의 1420년에 꼬란다 스다르쉬(V. Koranda Starší) 신부에 의해 지도되는 따보르파들이 황폐화된 궁전에 주둔하였고 그들은 비뜨꼬바 산(山) 전투를 앞둔 프라하 시민들을 돕기위해 왔다.
후스파의 왕 뽀제브라디의 이지(Jiří z poděbrad)가 자신의 거주지로 1458년부터 왕의 궁전을 사용하였다. 1462년 8월 10일 공회 참석자들이 „콤팍따따“가 무효임이 선언되고 그리고 왕 이지는 왕관의 맹세로 이단을 축출해야만 한다는 교황으로부터 온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왕은 „나는 왕위를 위해 신앙을 팔지않을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깨닫게 한 것은 나와 나의 아내 그리고 자녀들 우리들은 위대한 왕위와 생명까지도 내어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후 공회에 중요한 것은 이지가 1467년 4월 공회에서 교황으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이 찍혔고, 다음 공의회에 교황의 결정 철회를 요청한 것이다. – 왕의 궁전에서 1471년 3월 25일 후스파의 왕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의 시신은 성 비뜨 성당의 왕의 묘지에 모셨고 그의 심장은 은 상자에 넣어 띤 성당에 두었다.
광적인 카톨릭 신자로서 형제단을 억압하고 소유를 몰수하려고 한 왕 블라디슬라브 2세(Vladislav II.) 는 새로운 프라하 소란의 시기인 1483년에 성에 거주하였다. 왜냐하면 구시가가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소위 제2차 프라하 투척사건이 발생하였다. 왕의 임명을 받은 부패한 집정관들이 시청 창 밖으로 투척 되었다.) 버려진 궁전은 곧 황폐화되고 점차적으로 이웃하고 있는 수도원에서 사용하다가 후에 군거주지 그리고 시청직원들의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20세기 초에 원래의 왕의 궁전의 모든 건물들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프라하 시민회관(Obecní dům)의 대표적 인 건물이 들어섰다. 큰 홀에서 1918년 12월 17-18일 체코 개혁파들
(당시 루터와 칼빈의 신앙고백 교회들)의 총회가 열려 이 회의에서 두 교회는 체코형제개혁교회(Českobratrskou církev evangelickou) (III/3)로통합선언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