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계절

  • 연합 예배 (2006년 12월 03일)
  • 슥 9장 9~10절
  • 설교자: 레이흐뜨르

Text: 스가랴 9, 9-10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가장 즐거운 교회절기인 성탄절기가 바로 오늘 시작됩니다. 금년에 저는 60번째 맞이하는 성탄절입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언제나 우리들에게 성탄을 기다리는 시간은 특별한 느낌과 경험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성탄절기를 교회달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강림절이라고 부릅니다.) 강림절 동안에 각종 크리스마스 콘서트가 아니더라도 성탄 찬송의 메시지는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성탄장식 전등은 그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시간 우리들이 강림절의 특징을 숙고하고, 그 메시지를 한번
들어보십시다. 강림절 그 자체가 우리들에게 주는 어떤 이미지는 어두운 밤이 빨리오고 시들어 낙엽 지는 이 계절에서 오는 것 과는
다른 어떤 느낌입니다. 이 계절은 하나님 나라의 때이며, 그 나라의 소망이 사라져 없어지지 않고 점점 성장하며 무르익어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오시는 그 날을 성경은 어린양이 이리와 함께 풀을 뜯고, 진리와 평화가 입을 맞추고, 슬픔과 고통이
사라지며, 죽음이 없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때가 이미 문을 두드리며 우리들의 수첩과 달력에 그리고 매일 성경 읽기 하는 그
순서에 그 날을 기록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이 늦가을 시간과 함께 우리들의 시간에 슬그머니 스며들어 우리들의 시간의
한 부분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강림절은 우리들에게 단지 일어나고 있는 것들과, 경험하는 것과, 우리들이 억눌려있는 것과
또는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들 외에도 다른 것들이 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세상에는 짧은 인생의 인간들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반듯이 오며, 우리를 찾아오며, 우리들이 가질 수 없고 어디에서도 구입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옵니다. 바싹
메마른 사람에게 원기를 불러일으키고, 지쳐 기진맥진하는 이에게 쉼을 주고, 낙심한 이에게 살맛을 나게합니다. 빛이 점점
희미해지고 열정이 점점 식어갈 때, 이젠 건강하지도 않고 숨쉬는 것도 점점 힘이 드는 것을 어느 날 느꼈을 때 바로 그 순간
하나님 나라는 즐거움과 함께 옵니다. 그래서 강림절은 다른 어떤 교회절기보다 우리로 하여금 진실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명을 깨닫고 실천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없이 날이 점점 짧아지고 빛은 점점 꺼져가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겸손히 깨닫게 하는 것은 이 대강절 절기만한 다른 교회 절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을 찾아오소서 그리스도여> 진정 우리는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우리 힘으론 모든 것을 감당하기 힘듭니다.

우리들 마음에 깨달음을 주시지 않으면 떨어지는 마지막잎새처럼 우리들은 처절함을 맛보게 될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오십니다.
어둠이 더 깊이 깔리기 전에 오십니다. 저희들이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에 대해 들었고 지금도 수
없이 우리들은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교회 공동체에서 대강절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주님의
오심은 성경에 기초를 둔 옛날 교회달력에 따라 면 일년에 오직 두 번 낭독됩니다. 하나가 강림절 첫번째 주일이고 다른 하나는
종려주일입니다. 아주 옛날에 일어났던 일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센세이션으로 즐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문의 일면을 도배질한 긴급한 사건들과
그 순간들이 한 두 주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벌써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잊어버립다.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나 성급하게 순간적으로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이며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들이
어디에 희망을 둘 수 있는지 이러한 질문에 시간이 없습니다. 현재 이러한 우리의 모습이 싫증이 난다면, 강림절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고 고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그를 환영하였습니다. 그 환영은 마치 대관식을 연상시킬 정도였습니다. 이미
구약의 예언자가, 누군가 에게는 유용하겠지만 전쟁이나 싸움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짐승, 농사일이나 짐을 옮기는 일에 사용되는
짐승을 타고 환영하는 강림절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바라던 왕은 의로운 분으로 묘사됩니다: 왕들과 주인들로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그들이 의로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나귀새끼를 탄 왕은 체코 공동번역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있습니다. 구원을 베푸는 왕, 겸손한 왕입니다. 그는 특별한 왕입니다. 10절 말씀에 나온 대로 병거를 씻고 전투
말들의 힘을 빼는 왕이십니다. 평화의 왕은 겸손하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누구도 위협을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 고통을 당하는 사람,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 버림을 받은 사람, 지독한 질병에 걸린 사람, 미움과 질투를
받는 사람들 모두에게도 겸손하고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십니다. 그 왕이 모든 이들에게 오십니다. 겸손하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십니다.

오시는 주님은 환영을 받으실 만한 분이십니다. 그 분은 높은 성이나, 특별한 귀족들에 둘러싸여 도도하게 생활하지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들 가운데 오십니다. 아니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모든 가난하고 고통받는 형제들과 함께 계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모든 것에 대해 화가 나고 스트레스 받고 고통스러워 주님께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기도하고 주님께 질문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여러분은 우리 인생의 통치자이신 우리 주님과 제일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는 길은 우리들의 성공과 명예와 부요함이 아니라 우리들의 겸손함과 우리들이 겪는 고통입니다. 여러분의
고통, 여러분의 무기력함, 여러분의 죽음에 이를만한 낙심이 여러분을 그 분에게 가까이가게하며 그의 보좌에 참예하게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겸손하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당할 때, 여러분의 영혼은 평화의 왕께 아주 가까워지고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첫번째 성탄절 촛불을 밝혔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조용히 가까이
다가오고 세상의 빛은 비추고있습니다. 강림절, 그 은혜로운 시간이 왔습니다. 아멘

2006년 12월 03일 주보

꼬빌리시 교회 예배 3.12.2006
강림절 첫째주일 체코한국연합예배

인트로이트: 시편 142편
찬송 : 146, 1-4 여호와께 찬양하라
인사:
끼리에: 801
기도:
첫번째 성경일기 Mt 21, 1-9 한국어/체코어
찬송가: 288, 1-3 /한국찬송 106장
Nejsem hoden:
설교본문: Za 9, 9-10 (스가랴)
Interludium:
설교후 기도, 죄의 고백과 용서의 선포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찬송가ň: 860 Ososo (오소서 오소서)
성만찬과 찬송: 397장; 주앞에 성찬받기 위하여; 하늘나는 새를보라; 빌립보서 2장
찬송: 355장 /한국찬송 243장
교회소식
중보기도
파송의 말씀: Ef 3, 14-20 (에베소서) 한국어/체코어
축도:
찬송: 177장, 3절
Jděte ve jménu Páně

성령의 사람이 되는 길

  • 한인 예배 (2006년 11월 26일)
  • 행 3:1~18
  • 설교자: 이종실

061126

본문: 사도행전 3장 1~18절

제목: 성령의 사람이 되는 길

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설교>

성령강림절에 능력이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절망하고 좌절하고 깨어진자들을 다이나믹한 제자들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약속을 받았고 위로부터 오는 능력의 옷을 입었습니다. 능력의 옷을 입은 이후 그들의 모습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은 후에 그들은 걸어 다니는 것이 구름을 밟는 것 같고 이상한 능력에 쌓여있는 자신을 느끼면서 마치
환상적인 꿈에서 깨어나기 싫은 사람처럼 혼자 그 느낌을 즐기며 매몰되어,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자신들의 재산들을 나누어 쓰면서
천국 공동체를 탐닉하면서 지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탐닉하는 공동체를 세우고 그 공동체를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소통하며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아픈 곳을 고치고 변화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령강림 이후 성령에 감동된 제자들이 인간의 삶을 치유하는 것을 봅니다. 사도들의 그 첫번째 이야기가 오늘 본문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 하나인 미문이라는 곳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이야기 입니다. 이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라는 한 인간의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이야기를 통해 성령이 인간의 삶의 모든 차원의 치유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불행한 한 인간의 모습을 앉은뱅이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었습니다. 그
불행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결코 설수도 걸을 수도 없었고 다른 소년들처럼 뛸 수도 놀 수도 없습니다. 그는 그의
부모님의 도움 없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하며 집 문밖을 한발자국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성적을 비관하고 쌍커풀 수술이 잘못되었다고
비관해서 자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이 앉은뱅이는 몇 번이고 자신의 불행을 자살로 끝을 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22절은 지금 그는 40세의 성장한 어른이라고 합니다. 지금 그는 매일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까지
와서 구걸하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불행의 상황은 처참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그의 심성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쉽게 상처를 받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을 때가 그의 생애가운데 단 하루도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는 걸을 수 없었고 일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
모두는 오직 거기 앉아서 구걸하고 사람들이 그를 불쌍이 여겨주는 희망뿐이었습니다.

이 앉은뱅이의 불행은 우리 인간이 겪고 있는 불행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우리 인간의 실재 상황의
상징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미문이라는 문에서 앉아서 구걸하였습니다.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는 동서남북으로 문이 나 있었습니다.

사람 들은 그 중에서 동쪽으로 난 정문에 해당하는 니카노 문을 미문이라 불렀습니다. 성전의 문들 가운데서 그 문이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출입하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문은 고린도의
황동으로 만들어져 아름답고도 장엄했다고 합니다. 해가 빛날 때 멀리서도 그 빛나는 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진작가가
성전으로 통하는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의 모습을 사진 한 장에 담았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사진작가가 이 장면에 남기고 싶었던 기록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일지라도 그리고 그 뒤에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가 있을지라도 앉은뱅이 거지에게 그 문은 사람들이 가장 빈번하게 다니는 길목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에게 그 문은
들어오고 나가는 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문안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거룩한 전이 있지만 이미 그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 보다 그
문 앞에서 얻을 수 있는 동전을 자신의 생활을 위해 더 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미 그 마음 속에 자신은 그 아름다운 미문을
통과할 수 있는 존재라고 스스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그 문은 절망의 문이요, 고통의 문이요, 눈물의 문이요, 비참의
상징이었기에 그 문을 등지고 앉아있습니다. 분명히 그가 등지고 앉아있는 문 뒤에 그의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3등> 이라는 제목의 시를 인터넷에서 알게되었습니다.

1등은 하고 싶은 일 / 2등은 해야 하는 일 / 3등은 하나님 만나는 일… /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 해야 하는
일도 다 마치고… / 그 후에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 하나님은 3등입니다. / 어려운 일이 생길 때도 하나님은
3등입니다. / 내 힘으로 한 번 해보고… / 그래도 안되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하고… / 그나마도 안 될 때
하나님을 부릅니다. / 하나님은 3등입니다. / 거리에서도 3등입니다.. /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나 자신, / 그
다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 그 다음에야 저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님은 3등입니다.. /

우리들은 이야기 합니다. <나는 상처를 받았고 실패하였고 내 인생은 모두 엉망이 되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나는 하나님의 치유와 도움이 꼭 필요하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役事)가
필요합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마치 앉은뱅이처럼 매일 성전문
앞에서 나의 노력으로 내 문제를 해결해 보는 노력입니다. 그가 살고 있는 예루살렘 성안 어느 다락방에서 오순절날 성령강림을
기다리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경험과 자신이 스스로 정한 삶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이 정한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상처를 받지만 절대로 그것을 내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은밀한 상처를 이웃과 나누려고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방법대로 그것을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장소입니다. 심지어 교회를 진리의 가면을 쓴 위선자들의 사회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의
문제를 해결할 곳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생각하는 앉은뱅이의 삶과 매우 닮지 않았습니까?

이 절망적인 상황을 터지(touch)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 베드로와 요한이 나옵니다. 그들은 앉은뱅이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우리를
보라> 그는 돈을 줄까 기대하고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는 말씀은 거지 앉은뱅이에게 자기
자신들을 자세하게 바라보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동냥하기 위해 건성으로 바라보지 말고 비록 잠시 동안일지라도 진지하게 만나자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를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어도 내가 가진 것을
내게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 말씀은 <지금 당신이 원한 것은 돈이지만 실제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가 아닙니까?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은 가진 것이 없지만 당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라는 말걸기였습니다.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그도 거지 앉은뱅이와 다름없는 인생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앉은뱅이처럼 우리들 처럼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가려고 시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때 자기는 살겠다고 자신의 스승을 배반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뒤따르면서 큰소리는 칠 줄 알았지만 재판과정에 증인으로 나와 당당하게 자신의 스승을 배반할 배포도 가지지 못한
위인이었습니다. 사람들 틈에서 곁 불을 쬐면서 예수님 재판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대제사장 집에서 종 노릇
하는 한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베드로를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이라고 의심을 하자 그 조그마한 어린 여자아이 앞에서 맹세하며
즉각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마태복음 26장)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시자 자신도 잡혀갈까 두려워 숨어 지내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함께 먹고 자면서 가르침을 받았던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루 생계를 걱정하며 다시 갈릴리 바다에서 노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의협심강하고 혈기왕성한 베드로가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강림이후 베드로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령을 받은 후 이제 진정으로 예수에 의해 변화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변하였는지 그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고 거지생활을 했던 40세 한 남자가 치유된 것을 보고 솔로몬 행각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설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 주었고, 빌라도가 그를 놓아 주기로 작정했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운 그를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 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또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습니다. /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하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고 미리
선포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습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 (표준새번역
12~19절)

16절과 17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무지해서 빌라도가 무혐의의 판결을 내렸지만 여러분들이 거부해서
그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로 여러분 스스로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성경에 예언대로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회개하면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요지의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는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설교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세 번의 닭 울음 소리에 그는 가슴을 찢으며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이후에도 베드로의 모습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회개가 있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지라도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죄책감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체험이 있고 날마다 회개를
하여도 우리 안에 세상을 향한 능력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용서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회개해도 죄와 실수와 허물로부터 완전한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 주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상처는 우리들의 용서로 치유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그는 자신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용서를 우리 주님을 대신해서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알지 못해서 한 일입니다. 다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한 뜻을 이루려는 그 섭리 안에 있었던 일입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였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설교였습니다. 형제들 때문에 억울한 인생을 살았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온 세상이
기근이 들어 그에게 곡식을 사러 온 형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는 형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형님들은 내게 한 일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먼저 저를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형들에 대한 미움과 복수와 원망에 찬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고백이었습니다.

만약에 배설을 하지 못하면 우리의 몸은 심각한 상태가 됩니다. 우리의 입을 통해 들어간 음식물들의 나쁜 지꺼기들이 몸 속에
남아서 우리의 몸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급기야 생명을 위독하게 하는데 까지 나갑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면 강제로 배설을 시킵니다.
용서는 우리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온갖 더러운 마음의 상처들을 씻어내고 배설시키는 영적 배설기관입니다.

저는 이곳에 모여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모두는 어느 누구도 자기 힘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간섭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분 모두는 성령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서 활동하고 계심과 그 하시는
일들에 민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받은 것을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내 안에 임재 하시는 성령의 존재를 더 확실히
알게 되고 성령의 역할을 더 자세히 경험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우리를 보라>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살전5:19) 그렇기위해 한마음으로 함께 기도하던 백이십명의 초대교회 신도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을 기대하고 환영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마십시오.(엡 4:30) 무엇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입니까? 이 말의 전후를 살펴보면 알게
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 (엡 4:29-31)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
바로 덕스럽지 못한 말을 하는 하는 일입니다. 분열과 공격과 비난과 분노와 덕스럽지 못한 말을 하면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다른
말로 용서가 없으면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고 우리를 용서하며 성령에 충만하여, <우리를 보라>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담대히 외치며, 이웃을 치유하고 세상을 치유하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교회

  • 한인 예배 (2006년 11월 19일)
  • 행 2:1~13
  • 설교자: 이종실

061119

본문:사도행전 2장 1~13절

제목: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교회

<성경>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설교>

지난 주일에 읽었던 1장 말씀가운데서 13절부터 15절말씀까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성 안으로 들어와서,
자기들이 묵고 있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이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와 빌립과 도마와 바돌로매와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다. /이들은 모두, 여인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에 힘썼다. /무렵에 신도들이 모였는데, 그 수가 백이십 명쯤이었다.>

한번 여러분들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너무나 다양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들은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긴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긴장은 없던
긴장이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계실 때 부터 불거졌던 문제였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옥의 땔감처럼 생각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그들에 대한 편견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백이십명은 마음에 큰 상처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할 수
있는 분위기 조차 형성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이십명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불과 얼마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고 사형에 처할 만큼 중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재판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친 사람도 그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악의 세력에 패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고 자기를 합리화 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다윗왕국의 옛 영화를 가져올 정치적
메시야라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은 고집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대하고 의지했던 부활하신 예수님마저 이제
훌쩍 하늘로 올라가시자 그들은 희망을 상실하였고 절망을 맛보았습니다. 더 이상 자신들 스스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토록 마음에 큰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이들은 서로 대화하기 힘든 사람들이었고 더구나 이 모임이 예루살렘 사회와 소통이 가능하지 못할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한 자리에 모여있지만 마치 모래알처럼 나뉘어져있고 깨진 질그릇처럼 마음들이 산산히 부서져있는
이들 백이십명이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는 놀랍고 신비한 현상이 있는 성령강림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때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들에게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갈래 갈라지면서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다른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2~4절)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날 성령이 강림하시던날 한 마음으로 힘써 기도하던 백이십명 신도들이 성령충만함으로 성령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방언>란
(체코어 성경번역을 보면 그 의미가)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던 다른나라 언어입니다.

오늘 본문을 꼼꼼이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방언으로 말하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로 생각을
하는데 오늘 본문 5절부터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와서 살았다.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 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의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들은 놀라서,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보십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2:5~8)

이것은 오순절날 성령강림으로 처음 교회가 시작될 때 일어났던 기적입니다. 교회가 탄생할 때 동시에 나타난 성령의 기적을
통해 세상속에서 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 본문은 우리들에게 잘 보여줍니다. 교회가 있는 사회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집니다.
교회를 둘러쌓고 있는 인간사회는 의사소통의 부재로 늘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의사소통의 수단이 언어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외에서 가장 잘 사용할 수 있는 말이 한국말(일본말)입니다. 그러나 같은 한국말(일본말)을 해도 말이 잘 전달되지 않고 왜곡되고
오해가 생기는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반면에 정말 표현능력이 제한된 외국어로 외국인들과 대화를 할 때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의사소통의 도구는 단지 언어만이 아니라 언어 뒤에 있는 마음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은 언어가 틀려 서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엄청난 정치 사회 경제적인 견해를 달리하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언어를 배경으로 하는 마음이 서로 통하지 않아서 싸우는 것입니다.

어머니 태에서 응아~하고 갓 태어난 아기처럼 이제 이 세상에 교회가 탄생하자 마자 그 교회와 예루살렘 사회가 말이 통하고 말
뒤에 숨어있는 마음이 통해서 의사소통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대화가 통하지 않던 이웃과 세상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자기들끼리만 교제하고 사회와 격리된 문화를 가지고 신앙인의 언어가 자기들끼리의 암호
내지는 은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이 인간의 현실과 자꾸 멀어져만 가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들의
언어와 복음이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과 소통하고 있는지 아니면 너무 떨어져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회와 그토록 잘 통하던 교회의 언어가 이해할 수 없는 자신들의 언어로 변한 것이 고린도교회의 방언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의 방언은 그 뜻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이었습니다. 오순절 방언은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했는데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역작용을 낳았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방언을 함으로써 의사소통에 방해를 받고, 대화의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이들은 방언이 제일이다 다른 은사가 더 낫다 하면서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인간들의 어리석은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 18절과 19절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의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단절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잘 알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서 복음이 잘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이지 슈토렉 목사님께서 체코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반종교개혁의 박해와 사회주의의 통제를 경험한
체코교회는 경계심과 염려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데 모든 관심을 기울여 자발적으로 게토화 되었고 그
결과 사회에서 교회의 신뢰를 상실하였다> 1620년부터 1 9 1 8년까지 지속된 반종교개혁시기의 극심한 박해를 견디고
1945년부터 1989년까지 사회주의의 통제를 받으면서 오랫동안 자신의 믿음을 다른사람에게 전하여 새교인을 영접해 본 경험이 없이
교회의 생존이 지금까지 그들의 지상 과제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인들이 서로 결혼을 하여 교회는 거의
친인척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사회와 대화가 단절된 교회입니다.

처음에 저는 체코에와서 몇 년동안 체코선교를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되는지를 연구하였습니다. 게토화되고 폐쇄된 체코교회에
주목하였습니다. 체코선교는 다른 나라와 달리 먼저 사회의 섬처럼 존재하는 체코교회가 사회와 소통할 수 있도록 교회의 벽을 허무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 가능성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주위의 체코 슬로바키아 모든
교회들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보다 먼저 체코에서 활동하신 미국과 서유럽 선교사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체코교회와 교회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깊이 파트너십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체코사회의 소수인 개신교이지만 그 중에서도 90퍼센트 이상의 교세를
차지하고 있는 주류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체코개혁교회와 함께 일하도록 저를 이끌어주셨고 더욱이 그 교단 소속의 꼬빌리시 교회에
한국인들을 비롯해서 일본교우들 그리고 다른 나라교우들을 불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보다 한 세기 먼저 시작한
종교개혁의 시발 교회이자 개신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체코교회와 소통하도록 많은 교회들과 크리스쳔들이 있지만 왜 하나님은
교회역사도 짧은 아시아인인 우리들을 불러주셨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비록 미약해 보이지만 우리의 헌신은 상상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에서 위대한 사도요 전도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활동무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발길이 닿았던
곳은 지중해 연안이었으며 그의 최종 전도지 목표는 이탈리아의 로마였습니다. 저희들이 한국에서 체코에 온 거리에 비하면 불과
얼마되지 않는 거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동은 전세계를 복음으로 뒤덮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바울은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지만, 그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던 것 입니다. 그는 모두 한 지역 혹은 한 점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일했을 뿐이었지만,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온 세계를 위해 일한 셈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깨닫는 사실 한가지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시작을 이룬 백이십명의 신도들의 처지가 우리들과 많이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깨어지고, 연약하고, 상처투성이에, 공감이 가는 어떤것도 없고, 각자가 자기의 성을 쌓으며 살았던 이들 백이십명의
신도들처럼 우리들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공통분모도 없고 심지어 일과 관계속에서 힘들고 참기 어려운 갈등들이 생길 수 있고
그렇다고 서로 피하고 살아갈 수 없는 어쩌면 감옥생활과 같은 그런 이민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무기력한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는 도구가 되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백이십명 신도들처럼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한곳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며 기도하며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도시입니까? 불과 한달 전에 자신들이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박해했던 바로 그
땅이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머리에 못보다 더 날카로운 가시관을 쓰고 채찍에 맞으면서 피를 흘리며 시청 앞마당에서
사형장소인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가셨던 그 길이 바로 예루살렘 성안에 있었습니다. 그 길 위에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 뿌려진 예수님의
피가 아직도 마르지 않고 지워지지 않은 그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수치와 죄를 기억하게 하는 땅이었습니다. 그 땅에
머무른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주님의 성령은 바로 그곳에 임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아픔을 주고, 우리의 허물과 부끄러운 수치와 죄와 고통을
기억하게 하는 우리 땅 우리의 도시는 어디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체코와 나아가 동유럽교회를 회복하고 복음을 널리 전세계에
전파하시기 위해 우리를 그 장소 한 가운데 (바로 이곳에)이미 불러모아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땅에서 한 곳에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은 올바른 교회를 탄생시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 성령은 바람처럼 불처럼 강물처럼 옵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고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방언을 하고, 방언을 통역 하고, 예언을 하고,
귀신을 제압하고,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신앙이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을 우리들은 경험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체험이 있는
신자가 되어 모든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의 일을 크게 말하고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