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1 백설의 성모 마리아 교회

III 신도시 – 남쪽과 남서쪽 코스

1. 백설(雪)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 (Kostel Panny Marie Sněžné) – 2. 프란띠쉑 빨라쯔끼의 집 (Dům Františka Palackého) – 3. 체코형제개혁교회의 후스의 집과 그의 상징 (Husův dům Českobratrské církve evangelické a jeho symboly) – 4. 예로님 쁘라슈스끼 문화재 안내판이 있는 집 (Dům s pamětní deskou M. Jeronyma Pražského) – 5. 신도시 시청과 구 하나님의 몸 채플 (Novoměstská radnice a někdejší Kaple Božího těla) – 6. 슬로반의 엠마오 수도원 (Emauzský klášter na Slovanech) – 7. 블타바 강변에 있는 프란티쉑 빨라쯔끼 동상 (Pomník Františka Palackého u Vltavy) – 8. 즈데라제에 있는 성 바쯜라프 교회당 (Kostel sv. Václava na Zderaze) – 9. 찌릴과 메또뎨이 교회당 (Kostel sv. Cyrila a Metoděje) – 10. 보이뗴흐 거리의 보이뗴흐 교회당 (Kostel sv. Vojtěcha ve Vojtěšské ulici) – 11. 이르하지 거리의 성 미할 교회당 (Kostel sv. Michala v Jirchářích)

무스텍 지하철 아래 쪽 정거장에서 부터 신도시 후스 추종자인 급진파 지도자 얀 줼리브스끼(Jan Želivský)의 흔적을 따라가는 세 번째 코스가 시작된다. 남동쪽 융만 광장쪽으로 가면 약 100미터쯤에 프라하에서 교회당 높이가 가장 높은 백설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의 높은 벽이 가까이 우리들 앞에 우뚝 솟아있다. 오스트리아 문화원이 있는 사제관 북쪽 문으로 들어가면 교회 앞마당에 도착하게 된다.

1. 백설(白雪)의 성모 마리아 교회당 (Kostel Panny Marie Sněžné) 나중에 세워진 교회당 토대 가운데 일부는 까렐 4세가 자신의 체코왕 대관식 때 카르멜 수도회를 위해 1347년에 세웠다. 세 구역의 회중석을 가진 장엄한 양식의 대규모의 고딕교회당 건설을 계획하였다. (프라하 교회당들 가운데 가장 큰규모로 구상된, 길이 100미터 높이 35미터의 교회당이었다. 그러나 1398년 까렐이 죽을 때 까지 완성 완성되지 못하였다.) 로마의 Esquilin의 교회당 건축양식과 관련된 “백설의” 또는 “눈(雪)속의” 성모 마리아라는 교회당 이름은 일반적이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교회당을 세운 사람은 교회당의 좋은 터를 하늘의 뜻으로 알게되는데 8월달에 눈이 쌓인 곳이 바로 그 곳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대교회당 건설은 후스파가 두 파로 나뉘어져 서로 전쟁을 하기 시작할 때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카르멜 수도회는 1412년에 위클리프(Viklef)의 사상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일반대중이 좋아했던 베들레헴의 얀 후스 선생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예로님 선생(Mistr Jeronym)의 지도아래 있었던 후스파들은 교회로 강제로 들어가서 교회의 장식을 파괴한 다음에 그들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미꿀라쉬(Mikulaš) 수사를 블타바강에 던졌다. (그러나 그는 어부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콘스탄츠에서 후스가 죽은 후 1415년 2월에 프라하 시민들은 카르멜 수도회의 수사들에게 그들의 교회에서 양종성찬의 성만찬미사를 하도록 강요하였다. 그 다음해에 그들은 양종성찬의 성만찬미사를 요구하러 콘스탄쯔까지 갔지만 성공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공의회는 예로님 선생에게 화형선고를 하게된다. (1416. 5.30)

양종성찬을 위해 투쟁하던 시대에 카르멜 수도회의 수사들이 도망간 교회였던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는 1419년에 후스파의 압력으로 바츨라프 4세가 정기적인 양종성찬 미사를 허락한 프라하의 세개의 교회가운데 하나였다.(II/2) 왕의 명령으로 성 슈떼빤(sv. Štěpán) 설교단을 떠나야했던 얀 줼리브스끼(Jan Želivský)가 이때 이 교회 설교자가 되었다.

줼리브 출신의 얀은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 설교자가 되기 전에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사였다.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죽을 때까지 활동하였다. (I/4) 그는 설교를 통해 대담하게 세속화된 교회의 지도계층과 프라하의 타락한 사회상을 비판했다. 그는 욕망이 가득한 프라하의 지배계층을 반대하는 프라하의 하층 계급 시민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첫 번째 프라하 투척사건 이 후( 1419년 7월 30일에 신도시 청사 창문 밖으로 공무원들을 던졌던 사건 III/5) 그는 프라하의 모든 후스파 신자의 지도자가 되었다. 줼리브스끼는 슬퍼하는 군중들의 애도 속에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 묻혔다.

지그문드(Zikmund)의 십자군이 비쉐흐라드(Vyšehrad) 싸움(1420. 11. 2)에 진 이후 급진적인 따보르(Tábor)파 바츨라프 꼬란다 스따르쉬(Václav Koranda Starší)가 1421년 봄에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후스파 극단주의자 야쿱 블륵(Jakub Vlk)이 이 교회에서 줼리브스끼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의 조언에 따라 신도시 양종성찬파들이 1434년 봄에 왕의 군대와 구도시의 온건파에 대항하여 싸움을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따보르파와 고아파들과의 연대를 포기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쁘로꼬프 홀리(Prokopa Holý)의 지도아래 이들은 신도시 형제들을 돕기위해 신속하게 왔다. 구도시와 신도시의 싸움에 교회당은 심하게 부서졌고 교회 탑은 구도시의 승리로 파괴 되었다. Vlk신부는 프라하에서 격퇴당하였고 눈 속의 성모 마리아 교회의 신도시 후스파 중심역할은 끝이났다.

급진적인 후스파가 Lipan전투(1434. 5. 30 )에서 패배한 후에 카르멜 수도회의 수사들이 교회에 다시 돌아왔고 이 교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수도원도 재건하였다. 그러나 1483년의 프라하 반란 때 교회는 다시 파괴되었다. 그리고 1521년의 후스 기념일에도 교회는 다시 또 파괴되었다. 카르멜 수도회의 수사들이 16세기 중반까지 비바람으로 쓰러져 가던 교회당과 수도원을 사용하였다. 1603년에 루돌프(Rudolf) 2세가 폐허가된 건물들의 관리를 독일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에게 맡겼다. 그 이후에 수리된 교회당에서 1884년까지 독일어 미사가 진행되었다.

그 후에 세워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건물들 남쪽 앞에 지금까지 큰 수도원 정원이 남아 있다. 이 정원은 1950년에 프라하 시민들에게 개방 되었다. 1990년대 정원이 공원으로 개축되었고 이제는 소음이 많은 도시의 휴식공간이 되었다. 교회 앞 수도원 안 뜰에서 융만 광장까지 서쪽 정문을 통해 나갈 수 있다. 여기는 19세기의 뛰어난 민족 부흥 운동가 요셉 융만(Josef Jungmann)의 동상이 있다. ( 1878년에 조각가 쉬멕(L. Šmek)은 융만을 안락의자에 앉아 펼진 책과 펜을 들고 있는 학자로 만들었다. )

요셉 융만 (+ 1847 )은 시인이며, 문헌학자며 동시에 번역가이다. 그는 합스부르크의 반개혁운동으로 차츰 파괴되는 체코 문화와 특히 체코 언어의 미래를 걱정하여 체코어를 구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하였다. 그가 쓴 글이다 : “체코 민족은 교황을 벗어나는 영광의 시대에 유럽에서 가장 뛰어났지만 예수회가 지배할 때는 이처럼 밑바닥까지 떨어질 때가 없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역사가인 그의 친구 프란띠쉑 빨라쯔끼(František Palacký + 1876) 과 동일 하였다. 빨라쯔끼의 기념 집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하겠다.

융만 동상에서 일방통행의 융만거리로 들어간다. 왼쪽 두 번째의 우 트지 흐로젠(U tří hroznů)이라는 집은 융만이 죽을 때까지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집 뒤로 약 100미터 지나가서 왼쪽에 있는 빨라쯔끼 거리로 돌아들어간다.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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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 발행일:2481. 20041009
땅끝까지이르러/ (24) 오픈 하우스 체코선교정책 <체코편(6)>

체코교회의 폐쇄성 극복을 위한 첫 시도로서의 선교 프로그램이 체코형제개혁교단의 쁠젠 꾸란두브교회에서 구체화됐다. 쁠젠은 프라하에서 동쪽으로 1백 킬로미터 떨어진 체코 제 3의 도시이다. 체코 동부지역은 개혁파들이 왕성했지만 1620년대부터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대대적인 박해를 받아 소위 ‘재가톨릭화(세계 교회사에서 ‘반종교개혁운동’으로 때론 설명을 함)’ 되어 현재 개신교회가 가장 미약한 지역이다.

 2000년 2월에 꾸란두브교회에서의 선교 프로그램이 구체화되기 훨씬 이전인 1996년부터 꾸란두브교회 담임 목사와 교제를 하다가 1998년 하반기부터 교회에 상담실을 개설했다. 교회 안에서 구호차원의 상담실을 운영하는 예는 있으나 상담을 목적으로 하는 상담실은 체코교회에 존재하지 않았다. 상담은 종교비판에 근거를 둔 심리학의 사회 과학적인 접근으로 공산정부가 종교의 대안으로서 정책적으로 접근한 분야였다. ‘목회상담’이란 용어 자체가 이제 체코교회에 소개되고 있고 많은 목회자들은 목회와 상담을 구분하여 서로 다른 영역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직 이곳의 교회 분위기이다. 여전도회 전국 연합회가 관심을 가지고 이 활동에 재정 지원을 하면서 나는 상담실과 연계를 시켜 목회자와 지역주민이 자연스럽게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오픈 하우스(Open House)’ 선교 프로그램으로 기존의 활동을 확대할 계획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을 위해 더 넓은 교회 공간 사용이 필요하여 꾸란두브교회 당회를 설득하여 허락을 받고 이어 2000년 1월 꾸란두브교회 공동의회에서 교인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직접 설명했다. 꾸란두브교회에 접한 부속 건물들은 맥도널드가 위치할 만큼 시내 요지의 장소여서 교회 수입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교회의 동의를 끌어내기가 쉽지않았다. 이때부터’오픈 하우스’는 선교 프로그램 이름이자 동시에 나의 체코선교정책의 대명사가 됐다.

 (아래의 내용은 2000년 1월말 꾸란두브교회 공동의회에서 교인들에게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설득하던 내용을 요약 정리하여 공동의회 자료로 제출한 것이다.)

 프로젝트 ‘오픈 하우스’는 특별히 기독교의 증언 가운데 하나인 ‘섬김’을 표현하길 원한다. 그리고 교회 밖의 사람들과 교회 안의 사람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중간장소’가 되길 원한다. 그리고 ‘오픈 하우스’가 특별히 가난한 계층(소비 또는 문화 생활 등의 다른 삶의 출구가 없는 이들)에게 교회가 제시하는 삶의 대안이 되길 원한다. 이 프로젝트는 다른 말로 ‘선교적인 목회’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선교적인 목회’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모든 면에서 기독교에 대해 넘쳐나는 정보를 갖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위해 교회로부터 어떤 기본적인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교회는 그들을 무관심 속에 버려두었다. 교회가 무관심 속에 버려두었던 사람들을 만나 ‘기쁜 소식’을 나누는 희망은 그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지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고백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도움을 세상에 육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집으로서 교회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져야 한다.

 선교적인 목회의 중요한 모습은 강의나 설교가 아니라 사람들과 형식 없는 만남이다. 프로젝트 ‘오픈 하우스’는 이러한 만남의 모든 기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여러분들의 교회당과 부속건물의 지붕 아래 증언자의 보물을 감추지 않아야 한다. 욕심 없는 섬김으로 사람들과 즐거운 만남을 이루어야 한다.

이 종 실
총회 파송 체코 선교사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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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 발행일:2473. 20040807
땅끝까지이르러/ (23)선교 베이스 뿌리내리기(체코편 5)

나의 체코 선교는 체코교회들과의 협력선교이다. 그러나 기관화된 교회와의 협력이 아니라 폐쇄적이고 세속화되어 하나님의 교회의 사명에 대한 인식과 고백이 없는 교회를 고통스러워 하는 체코 목회자들과 교인들과의 연대이다. 무신론적인 사회가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교회를 찾게 되는 그 날의 희망을 체코 형제 자매들과 연대하며 좌절하지 않고 함께 노력하는 삶이 체코 선교이다.

 교회 목사의 집안이 가업(家業)처럼 대대로 목사를 배출하는 것이 체코교회의 하나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이 수 백년 흐르면서 교권은 가문과 혈연의 영향을 받게 된다. 게다가 목사 사례비를 정부의 문화부 예산에 의존하고 있어 국가와 사회 안에서 교회의 역할이 제한을 받고 있다. 그리고 사회 언론들은 연극, 오페라와 콘서트 등 다른 문화 활동과 예산을 그 근거자료로 비교를 하며 교회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효율성을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체코교회가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스스로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그들의 노력에 동참하는 것이 이곳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는 나의 삶의 영역이다.

 당장 나의 눈에 지역 교회들이 자신의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인다. 예를 들어 구멍가게도 없어 요일과 시간을 정해놓고 차량으로 이동하며 생필품을 팔고 사는 사람들이 찾는 그런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옹기종기 모여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젊은 이들을 위해 교회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그러나 교회가 사회를 향해 열린 교회로 나아가기 위한 프로그램을 구체적으로 어떤 지역교회에 제안했을 때 그 교회의 목회자나 당회가 책임 있게 응답을 하지 못해 몇몇 시도들이 번번히 좌절되는 것을 겪으면서 교회와 국가와의 특별한 관계에서 비롯된 체코교회의 구조들을 이해하게 됐다.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교회이기에 교회헌금의 사용용도가 법적으로 제한되고, 교회의 대 사회활동은 대체로 교회의 사회봉사단체인 ‘디아코니아’를 통해 하고 있어 교회 건물 안에서 예배와 성경공부 및 좌담회 이 외의 활동을 지역 교회들이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체코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워 했다.

 그리고 선교의 장애가 되는 또 다른 구조는 목사와 그가 시무하는 교회와의 관계이다. 체코 목회자의 역할은 시무하는 교회가 필요로 하는 활동을 수행하는 일종의 종교 공무원 비슷하다. 청빙한 교회가 자신의 조건으로 제시한 교회 활동에 대해 부임할 목사와 협의를 한 후 합의 내용을 문서로 작성하여 양쪽이 서명함으로써 청빙을 확정한다. 서명된 이 문서는 법적인 효력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제안은 교회와 목회자 사이에 이미 청빙할 때 합의된 활동 밖의 일이 되기에 누구도 책임 있게 추진할 수 없는 교회의 구조를 넘어가지 못했다.

 이와 같이 체코교회의 구조가 선교 장애물로 나타났을 때 2000년 5월 체코형제개혁교단 총회가 나를 ‘전체교회를 위한 목사’로 임명하는 것을 결정하여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전도목사’에 해당되는 ‘전체교회를 위한 목사’는 체코형제개혁교단에 소속된 2백 50개가 넘는 지역 교회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활동을 허락받은 교회 직책이다. 아울러 총회의 각 전문위원회 회의로부터 필요에 따라 참석을 요청받기도 하고 내가 참석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리고 에큐메니칼 전문위원회 위원으로 늘 회의에 참석을 한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체코교회 안에서 나의 선교 베이스가 구축되어 갔다.

이 종 실
총회 파송 체코 선교사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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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 발행일:2472. 20040724
땅끝까지이르러/ (22) ‘이해’하니 ‘사랑’이 싹트네 <체코편(4)>
‘이해’하니 ‘사랑’이 싹트네

1415년에 시작된 소위 ‘후스파’ 또는 ‘양종성찬주의자’라 불리우는 체코 종교 개혁파는 오늘날 개신교의 뿌리라 할 수 있다. 이들이 18세기 말에 비록 제한적이지만 종교의 자유를 허락 받고, 1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가 신생 독립국이 되어 체코 종교개혁파들이 1918년에 ‘체코형제개혁교회(교단)’로 공식적인 조직 교회의 모습을 갖추면서 드디어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 자유도 잠시 뿐 체코교회는 1948년부터 1989년 공산정부의 통치 아래서 다시 박해와 탄압을 받았다. 현재 체코형제개혁교단은 전국 2백64개 개교회에 약 15만 명의 교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예배에 참석하고 활동하는 교인 숫자는 넉넉하게 잡아서 1만 5천 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2백여 명의 목회자들이 있으며 이 가운데 10퍼센트가 넘는 30여 명이 목회자 숫자의 부족으로 은퇴 이후에도 계속 활동을 하고 있다. 체코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시무교회가 아닌 정부로부터 봉급을 받고 있기에 계속 활동 중인 30여 명의 은퇴 교역자들은 국가 연금을 받으면서 하던 일을 계속하는 셈이 된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교회의 조직에 영향을 끼쳐 교회는 예배 모임 조직체와 교회 활동 조직체인 ‘디아코니아’로 양분되어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교회의 선교사명은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니라 교회의 봉사단체인 ‘디아코니아’의 일이 된다. 심지어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개 교회와 목회자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고있다.

 그리고 오랜 박해와 탄압을 견뎌내면서 교회는 매우 폐쇄적이 되었다. 지금도 전인구의 70퍼센트가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체코 사회에서 전 인구의 1천분의 일에 불과한 체코개혁교회는 그야말로 미비한 존재에 불과하다. 생존 그 자체가 최고의 목표일 수 밖에 없었던 박해의 시대를 살면서 그들은 대부분 서로 혼인을 하여 지금은 거대한 하나의 친인척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는 마치 집안 식구들 모임 같고, 성만찬 예식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신들의 조상들을 기념하는 추도식과 같은 분위기를 가끔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체코개혁교회의 신학과 신앙 안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소중한 개혁전통의 흐름이 있다. 교회권력이 독점하던 성경을 평신도에게 돌려주고, 교회의 타락이 전통을 강조하는 교회의 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여 교회를 성경의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복원하려는 체코개혁신앙의 전통의 흔적이 오늘날의 예배와 교인들의 신앙생활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직 무엇을 해야될지 모르고 언어를 익히며 선교현장을 연구하던 초기에 이들 교회들을 끊임없이 방문했다.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는 시골에서 이방나라의 목사가 어줍지 않은 체코어로 동방의 조그만 나라의 문화와 기독교에 대해 소개를 한다고 하니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한 교회를 방문하기 위해 그 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목회자의 최근의 글들과 그의 학위 논문과 졸업논문을 도서관에서 찾아 읽고 그리고 그와 그 교회에 대한 정보들을 최대한 얻어 연구를 했다.

 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체코교회를 이해해야 된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시작한 교회탐방이 횟수를 거듭하면서 체코교회의 연약함과 아픔을 점점 사랑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교회를 새롭게 고쳐 교회사명을 감당하려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들의 교회가 곧 나의 교회라 생각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민족과 전통과 문화가 다른 교회일지라도 세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라는 교회론이 이 땅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는 나의 삶 속에 형성되고 있었다.

이 종 실
총회 파송 체코 선교사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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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 발행일:2471. 20040717
땅끝까지이르러/ (21) 선교사와 시행착오 <체코 편(3)>

선임 선교사가 없는 선교현장에 오니 처음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될지 막막했다. 자신의 일을 찾지못해 길 잃은 양처럼 선교지에서 헤매는 선교사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여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많았다. 하나님이 일을 보여주실 때까지 묵묵히 공부를 했다. ‘여행은 아는 만큼 본다’는 말이 선교지에서도 적용된다. 내가 선교현장을 공부한 만큼 언제나 그만큼 하나님은 내게 해야 될 일들을 깨우쳐 주셨다.

 처음 해야 될 일을 발견하게 된 그 순간은 선교지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나에게 존재의미를 느끼게 하는 큰 희망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천의 단계에 들어가면 그것은 마지막 안방 문을 열기까지 거쳐 가야 할 많은 문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마치 펌프로 우물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 미리 부어 주는 물과 같은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됐다. 내 앞에 놓여있는 이 선교현장이 앞으로 열어야 할 문이 얼마나 많은 지 상상할 수 없는 구중궁궐과 같은 곳이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물을 부어야 할 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메말라 있는 우물과 같은 곳임을 알게 될 때에 기쁨과 확신에 넘치던 희망이 한 순간에 보잘 것 없는 사소한 일로 보였다.

 그 일을 더 이상 진행시킬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될 때 나를 위해 기도와 사랑으로 격려하며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후원교회와 개인들에게 어떻게 보고해야 될지 염려부터 생겼다
 주인으로부터 다섯 달란트를 받아 다섯 달란트의 이익을 남긴 종에게는 아직 필적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할 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실패를 두려워하여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고 그대로 보관만 했다가 후에 꾸지람을 들은 종을 본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시행착오로 손해를 볼 지언정 도전을 멈추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똑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해서는 더 더욱 안된다고 다짐했다. 손해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시행착오에 대한 반성이 없기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 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판단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나의 희망을 한 순간도 좌절시킨 적이 없다. 왜냐하면 시행착오는 선교현장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한 하나님의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선교활동의 신학과 실천이 틀을 잡아가고 동시에 선교현장을 깊이 이해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싹트게 되었다. 아직도 준비되지 않은 선교사를 위해 하나님은 시행착오에 큰 관용을 베풀며 통 크게 투자를 하셨다. 나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투자 고객이다. 투자가라면 누구나 투자의 이익이 발생하는 시점을 학수고대한다. 그러나 그 투자 고객의 기다림에 나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언제나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선교현장에 온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시행착오는 계속되고 있어 언제나 이제 막 선교 일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이 종 실
총회 파송 체코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