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 (5)

기독공보 (www.kidokgongbo.com)
* 호. 발행일:2473. 20040807
땅끝까지이르러/ (23)선교 베이스 뿌리내리기(체코편 5)

나의 체코 선교는 체코교회들과의 협력선교이다. 그러나 기관화된 교회와의 협력이 아니라 폐쇄적이고 세속화되어 하나님의 교회의 사명에 대한 인식과 고백이 없는 교회를 고통스러워 하는 체코 목회자들과 교인들과의 연대이다. 무신론적인 사회가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교회를 찾게 되는 그 날의 희망을 체코 형제 자매들과 연대하며 좌절하지 않고 함께 노력하는 삶이 체코 선교이다.

 교회 목사의 집안이 가업(家業)처럼 대대로 목사를 배출하는 것이 체코교회의 하나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이 수 백년 흐르면서 교권은 가문과 혈연의 영향을 받게 된다. 게다가 목사 사례비를 정부의 문화부 예산에 의존하고 있어 국가와 사회 안에서 교회의 역할이 제한을 받고 있다. 그리고 사회 언론들은 연극, 오페라와 콘서트 등 다른 문화 활동과 예산을 그 근거자료로 비교를 하며 교회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효율성을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체코교회가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스스로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그들의 노력에 동참하는 것이 이곳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는 나의 삶의 영역이다.

 당장 나의 눈에 지역 교회들이 자신의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인다. 예를 들어 구멍가게도 없어 요일과 시간을 정해놓고 차량으로 이동하며 생필품을 팔고 사는 사람들이 찾는 그런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옹기종기 모여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젊은 이들을 위해 교회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그러나 교회가 사회를 향해 열린 교회로 나아가기 위한 프로그램을 구체적으로 어떤 지역교회에 제안했을 때 그 교회의 목회자나 당회가 책임 있게 응답을 하지 못해 몇몇 시도들이 번번히 좌절되는 것을 겪으면서 교회와 국가와의 특별한 관계에서 비롯된 체코교회의 구조들을 이해하게 됐다.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교회이기에 교회헌금의 사용용도가 법적으로 제한되고, 교회의 대 사회활동은 대체로 교회의 사회봉사단체인 ‘디아코니아’를 통해 하고 있어 교회 건물 안에서 예배와 성경공부 및 좌담회 이 외의 활동을 지역 교회들이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체코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워 했다.

 그리고 선교의 장애가 되는 또 다른 구조는 목사와 그가 시무하는 교회와의 관계이다. 체코 목회자의 역할은 시무하는 교회가 필요로 하는 활동을 수행하는 일종의 종교 공무원 비슷하다. 청빙한 교회가 자신의 조건으로 제시한 교회 활동에 대해 부임할 목사와 협의를 한 후 합의 내용을 문서로 작성하여 양쪽이 서명함으로써 청빙을 확정한다. 서명된 이 문서는 법적인 효력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나의 제안은 교회와 목회자 사이에 이미 청빙할 때 합의된 활동 밖의 일이 되기에 누구도 책임 있게 추진할 수 없는 교회의 구조를 넘어가지 못했다.

 이와 같이 체코교회의 구조가 선교 장애물로 나타났을 때 2000년 5월 체코형제개혁교단 총회가 나를 ‘전체교회를 위한 목사’로 임명하는 것을 결정하여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전도목사’에 해당되는 ‘전체교회를 위한 목사’는 체코형제개혁교단에 소속된 2백 50개가 넘는 지역 교회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활동을 허락받은 교회 직책이다. 아울러 총회의 각 전문위원회 회의로부터 필요에 따라 참석을 요청받기도 하고 내가 참석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리고 에큐메니칼 전문위원회 위원으로 늘 회의에 참석을 한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체코교회 안에서 나의 선교 베이스가 구축되어 갔다.

이 종 실
총회 파송 체코 선교사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 (4)

기독공보 (www.kidokgongbo.com)
* 호. 발행일:2472. 20040724
땅끝까지이르러/ (22) ‘이해’하니 ‘사랑’이 싹트네 <체코편(4)>
‘이해’하니 ‘사랑’이 싹트네

1415년에 시작된 소위 ‘후스파’ 또는 ‘양종성찬주의자’라 불리우는 체코 종교 개혁파는 오늘날 개신교의 뿌리라 할 수 있다. 이들이 18세기 말에 비록 제한적이지만 종교의 자유를 허락 받고, 1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가 신생 독립국이 되어 체코 종교개혁파들이 1918년에 ‘체코형제개혁교회(교단)’로 공식적인 조직 교회의 모습을 갖추면서 드디어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 자유도 잠시 뿐 체코교회는 1948년부터 1989년 공산정부의 통치 아래서 다시 박해와 탄압을 받았다. 현재 체코형제개혁교단은 전국 2백64개 개교회에 약 15만 명의 교세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예배에 참석하고 활동하는 교인 숫자는 넉넉하게 잡아서 1만 5천 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2백여 명의 목회자들이 있으며 이 가운데 10퍼센트가 넘는 30여 명이 목회자 숫자의 부족으로 은퇴 이후에도 계속 활동을 하고 있다. 체코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시무교회가 아닌 정부로부터 봉급을 받고 있기에 계속 활동 중인 30여 명의 은퇴 교역자들은 국가 연금을 받으면서 하던 일을 계속하는 셈이 된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교회의 조직에 영향을 끼쳐 교회는 예배 모임 조직체와 교회 활동 조직체인 ‘디아코니아’로 양분되어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교회의 선교사명은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니라 교회의 봉사단체인 ‘디아코니아’의 일이 된다. 심지어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개 교회와 목회자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고있다.

 그리고 오랜 박해와 탄압을 견뎌내면서 교회는 매우 폐쇄적이 되었다. 지금도 전인구의 70퍼센트가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체코 사회에서 전 인구의 1천분의 일에 불과한 체코개혁교회는 그야말로 미비한 존재에 불과하다. 생존 그 자체가 최고의 목표일 수 밖에 없었던 박해의 시대를 살면서 그들은 대부분 서로 혼인을 하여 지금은 거대한 하나의 친인척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는 마치 집안 식구들 모임 같고, 성만찬 예식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신들의 조상들을 기념하는 추도식과 같은 분위기를 가끔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체코개혁교회의 신학과 신앙 안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소중한 개혁전통의 흐름이 있다. 교회권력이 독점하던 성경을 평신도에게 돌려주고, 교회의 타락이 전통을 강조하는 교회의 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여 교회를 성경의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복원하려는 체코개혁신앙의 전통의 흔적이 오늘날의 예배와 교인들의 신앙생활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직 무엇을 해야될지 모르고 언어를 익히며 선교현장을 연구하던 초기에 이들 교회들을 끊임없이 방문했다.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는 시골에서 이방나라의 목사가 어줍지 않은 체코어로 동방의 조그만 나라의 문화와 기독교에 대해 소개를 한다고 하니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한 교회를 방문하기 위해 그 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목회자의 최근의 글들과 그의 학위 논문과 졸업논문을 도서관에서 찾아 읽고 그리고 그와 그 교회에 대한 정보들을 최대한 얻어 연구를 했다.

 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체코교회를 이해해야 된다는 막연한 생각에서 시작한 교회탐방이 횟수를 거듭하면서 체코교회의 연약함과 아픔을 점점 사랑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교회를 새롭게 고쳐 교회사명을 감당하려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들의 교회가 곧 나의 교회라 생각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민족과 전통과 문화가 다른 교회일지라도 세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라는 교회론이 이 땅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는 나의 삶 속에 형성되고 있었다.

이 종 실
총회 파송 체코 선교사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 (3)

기독공보 (www.kidokgongbo.com)
* 호. 발행일:2471. 20040717
땅끝까지이르러/ (21) 선교사와 시행착오 <체코 편(3)>

선임 선교사가 없는 선교현장에 오니 처음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될지 막막했다. 자신의 일을 찾지못해 길 잃은 양처럼 선교지에서 헤매는 선교사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여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많았다. 하나님이 일을 보여주실 때까지 묵묵히 공부를 했다. ‘여행은 아는 만큼 본다’는 말이 선교지에서도 적용된다. 내가 선교현장을 공부한 만큼 언제나 그만큼 하나님은 내게 해야 될 일들을 깨우쳐 주셨다.

 처음 해야 될 일을 발견하게 된 그 순간은 선교지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나에게 존재의미를 느끼게 하는 큰 희망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천의 단계에 들어가면 그것은 마지막 안방 문을 열기까지 거쳐 가야 할 많은 문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마치 펌프로 우물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 미리 부어 주는 물과 같은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됐다. 내 앞에 놓여있는 이 선교현장이 앞으로 열어야 할 문이 얼마나 많은 지 상상할 수 없는 구중궁궐과 같은 곳이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물을 부어야 할 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메말라 있는 우물과 같은 곳임을 알게 될 때에 기쁨과 확신에 넘치던 희망이 한 순간에 보잘 것 없는 사소한 일로 보였다.

 그 일을 더 이상 진행시킬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될 때 나를 위해 기도와 사랑으로 격려하며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후원교회와 개인들에게 어떻게 보고해야 될지 염려부터 생겼다
 주인으로부터 다섯 달란트를 받아 다섯 달란트의 이익을 남긴 종에게는 아직 필적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할 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실패를 두려워하여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고 그대로 보관만 했다가 후에 꾸지람을 들은 종을 본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시행착오로 손해를 볼 지언정 도전을 멈추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똑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해서는 더 더욱 안된다고 다짐했다. 손해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시행착오에 대한 반성이 없기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 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판단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나의 희망을 한 순간도 좌절시킨 적이 없다. 왜냐하면 시행착오는 선교현장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한 하나님의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선교활동의 신학과 실천이 틀을 잡아가고 동시에 선교현장을 깊이 이해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싹트게 되었다. 아직도 준비되지 않은 선교사를 위해 하나님은 시행착오에 큰 관용을 베풀며 통 크게 투자를 하셨다. 나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투자 고객이다. 투자가라면 누구나 투자의 이익이 발생하는 시점을 학수고대한다. 그러나 그 투자 고객의 기다림에 나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언제나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선교현장에 온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시행착오는 계속되고 있어 언제나 이제 막 선교 일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이 종 실
총회 파송 체코 선교사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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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 발행일:2469. 20040703
땅끝까지이르러/ (20) 배수의 진을 치고 <체코 편(2)>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나뉘어진 1993년에 필자는 체코 프라하에 입국했다.

 당시 체코는 1989년 혁명이후 10년 만에 전체인구의 절반쯤 되던 기독교 인구가 30퍼센트로 줄어들었다. 그 중에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합해서 8~10퍼센트가 실제로 종교활동을 하는 인구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머지 인구 70퍼센트 이상이 ‘나는 무신론자’라고 말한다. 필자는 이곳 무신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동기가 나 자신의 계획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부르심인지 확인하려는 하나님과의 배수의 진을 친 씨름을 시작했다.
 
우선 생계의 문제로 하나님과 대면했다. 이 문제는 선교사 파송을 나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파송을 기다리기로 한 나의 결심과 무관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파송의 때를 기도와 함께 선교현장 연구를 하면서 기다렸다. 선교를 하겠다고 하면서 총회 파송을 받지않고 더구나 프라하 개혁신학부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시작하니 주위의 도움은 물론이거니와 이해를 받기도 어려웠다. 몇몇 지인들의 도움으로 경제적 불안을 해소하기는 부족했다. 생계의 위기가 지속되면 해외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 씨름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인내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파송에 대해 점점 확신이 생기는 은혜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가족들의 적응의 문제로 하나님과 대면했다. 가족이 적응하지 못하면 해외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가족의 현지 적응은 선교의 중요한 요인이라 생각하여 달리 타협의 길을 스스로 두지않았다. 16년간 중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아내가 체코선교를 위해 사직을 하였고 국민학교 5학년을 마친 아들은 체코국민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현재 아들은 프라하 체코국립대학의 정치학도가 되었고, 하나님은 아내에게 프라하 체코국립대학 철학부 한국학과에서 계속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구했던 응답은 구체적으로 해야 될 나의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것이었다. 성급하게 나의 계획을 추진하려고 하지않았다. 아예 머리 속에서 나의 계획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는 이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체코인이든 체코에 사는 한국인이든 그리고 그 누구이든 절대로 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람을 만나거나 사귀려고 하지 않았다. 언제나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체로 생각하고 사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창의성과 도전정신을 가지고 선교현장을 끊임없이 공부했다.

 뒤 돌아 보면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씨름은 그 순간 모두가 하나님께서 직접 나의 손을 붙잡고 체코로 인도하는 과정들이었다.

이 종 실
총회 파송 체코 선교사

[기독공보 기고글] 땅끝까지이르러 체코편 (1)

기독공보 (www.kidokgongbo.com)
* 호. 발행일:2466. 20040612
땅끝까지이르러/ (19)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체코 편(1)>

선교단체에서 또는 다른 기회로 선교의 소명을 발견하고 헌신하는 복음 전파자들과는 사뭇 다른 선교의 여정으로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셨다.

 1988년 1월 총회 전도부 국제선교위원회부터 세계선교부가 신설된 지 2년 만에 총무를 모시게 된 그 때까지 만 4년이 넘게 우리교단 해외 선교사들을 돕는 행정간사로 일하면서 이해하게 된 선교의 경험들이 현재 나를 선교사로 일하게 하였고 그리고 나의 선교여정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있다.

 여러 선교사들의 현장감 넘치는 선교 보고서를 읽으면서 비록 임기 내내 한번도 방문하지 못하였지만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유럽의 선교 현장들이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고, 다양한 선교 프로젝트들의 형성과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왜 어떻게 선교프로젝트가 만들어졌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선교 보고서들을 면밀히 그 행간의 의미까지 읽으면서 선교사님들의 선교 프로젝트는 어느 하나 저절로 이루어지거나 단순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수많은 시행착오와 크고 작은 실패의 과정 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한 이것은 또한 선교사의 현지 적응과정과도 무관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행정을 통하여 후원하는 교회들과 선교사들의 가장 근본적인 선교의 동기가 무엇이며 선교의 과정이 그 동기에 어떻게 충실하고 있는지 그리고 만약 선교의 과정이 선교의 동기와 달라지고 있으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진단을 해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총회의 경험들은 내게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제를 새롭게 깨우쳐 주었고 그리고 이 명제의 바른 실천으로 하나님은 나를 부르고 계심을 고백하게 되었다.

 선교가 기관으로서의 교회들과 인간들의 욕망의 수단이 되지않고 하나님의 일로서 그 순수성을 어떻게 지켜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서구의 선교도 ‘제국주의’라는 세상의 가치관과 ‘기독교 왕국’의 신앙의 가치관과의 혼돈의 역사였다.

 선교를 하는 나 자신도 언제나 선교의 대상임을 잊지않고 선교를 임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총회의 만 4년간의 봉사를 되돌아보면서 선교에 대해 무지했을 뿐 아니라 잘못된 선교에 대해 전혀 자책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에 나는 새 창조와 새 피조물의 희망을 기다려야 하는 죄인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기도와 더불어 파송의 순간부터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확인하지 않고는 내게 선교사로서의 미래가 없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 종 실
총회 파송 체코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