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04년 03월 21일)
- 약 3:1-12
- 설교자: 루께쉬
원고정리되는 즉시 곧 올립니다.
프라하 한인교회 | 체코 교회와 함께 호흡하는 한인 공동체

원고정리되는 즉시 곧 올립니다.
040229
본문: 사도행전 17:16-34
제목: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사람의 특징
<본문>
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수 있겠느냐
20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1)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1)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설교>
오늘 본문은 바울의 아덴(아테네) 선교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도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풍부한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전통이 있는 언젠가 한번쯤 가보고 싶은 도시입니다.
오늘 설교를 위해 인터넷으로 아테네 이곳 저곳을 방문했습니다.
BC 5세기부터 융성했던 문화의 흔적이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철학과 정치사상의 교과서에서 보았던 지명들과 장소가 모두 아테네를 중심으로 그 근교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어린시절 동화로 읽었던 신들이 모여 살고, 사랑을 나누고 그리고 서로 다투던 그 장소들 모두가 아테네를 중심으로 있었습니다.
아마 어려서 부터 바울도 이 아테네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선진국가인 아테네는 지식인 바울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런 아테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부터 전도를 위한 목적으로 아테네에 온 것은 아닙니다. (16:13-15)
그의 다음 선교 목적지인 고린도를 가기 위해 아테네에서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렸습니다.
며칠간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바울은 어려서부터 소문으로 들었던 아테네를 관광하면서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힘들었던 심신의 피로를 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해변가로 나가 아름다운 지중해의 풍경을 만끽하였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마주하고 서서 지긋이 눈을 감은 채 오랜 여행길에 지친 심신을 씻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에 아마도 흥겨운 노래곡조가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돌아오라 Sorento로)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아침해와 저녁놀 밤하늘 빛난 별
망망한 바다와 늘 푸른 봉우리 다 주 하나님 영광을 잘 드러내도다(78장)
그리고 아테네 도시 이곳 저곳을 둘러봅니다.
16절에 “바울이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그는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바울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이지 않고 호메니우스의 대서사시와 같은 문학과 예술이 보이지않고 왜 우상이 보였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낭은 “저 추하고 보잘 것 없는 유대인은 아테네의 동상들을 우상이라고 말함으로서 헬라의 예술을 모욕했다.”고 사도행전 17장 16절의 바울을 비난하였습니다.
지난 주 로마에서 대회기간 내내 안내로 수고하신 밀라노 한인교회의 집사님 한 분이 저와 세분 강사들을 공항까지 안내하여 주었습니다.
그 분은 밀라노에서 조그마한 사업을 하고있어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자주 밀라노를 안내할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한번은 한국에서 대리석 수입을 하러 온 분들과 다니는데 그 분들은 어디를 가도 바닥만 보고 다니신 답니다.
한번은 식당을 들어갔는데 음식은 주문할 생각하지도 않고 모두 바닥만 열심히 내려다 보았다고 합니다.
저의 눈에는 모두가 아름답다는 프라하와 그 야경은 눈에 들어오지않고 오직 종교개혁유적지 프라하와 폐쇄적인 교회와 무신론의 사회 만이 눈에 보입니다.
사람들이 관광을 할 때 자신의 관심과 아는 것 만큼 만 보고 느끼고 갑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들을 가이드 했는데 그 중의 한 분이 까렐다리에 있는 성인들의 동상을 보고 “저 우상 덩어리들!”하고 소리치는 것을 들고 참 무식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도 아테네에서 우상을 보고 그리고 격분하였습니다.
먼저 우리는 16절에 나오는 바울의 분노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에는 바울이 <마음에 분하여>라고 번역되어있고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격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체코어 성경에는 <znepokojovat se> 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화가나서 미워하는 마음이 있을 때 쓰는 Zlobit se 가 아닌 심기가 불편해서 평안하지 않는 znepokojovat se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해외에서 살면서 그리고 교회생활로 만나면서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눈에 거슬리고 심기가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그런 상태가 바울의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와 여러분들이 주목해야 될 것은 심기불편한 감정이 계기가 되어 계획이 없던 바울의 아테네 선교가 시행되었다는 사실 입니다.
바울은 아테네 선교의 계획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아테네 선교를 원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와 같은 선교사나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바울 처럼 우리는 기도하며 믿음 가운데 우리의 삶의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 가운데 세운 우리의 삶의 계획일지라도 완전히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알려주시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 뒤 돌아 보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뿐 입니다.
미처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때가 있고 어떤 경우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라 여겼는데 그것을 참고 인내한 것이 우리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간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꾼, 하나님이 쓰는 신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 사이에서 일어나는 영적 불협화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테네 선교를 원하시는 하나님과 계획하지 않은 바울 사이의 영적 불협화음은 바울의 심기가 불편함으로 왔습니다.
해외생활에서 그리고 해외의 교회생활에서 우리는 심기가 불편한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사촌이면 남이 아닙니다.
남이 아닌 사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전혀 알지 못하는 프라하의 이웃이 조금 잘되면 배가 아픈 정도가 아닙니다.
심사가 뒤틀리고 이유없이 무조건 미워집니다.
이 좁은 바닥에 그 얼굴이 그 얼굴인데 눈을 마주쳐도 인사는커녕 아는 체 하지도 않으면 내가 또 무엇을 잘못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다가 괜히 무시당한 것 같아 하루종일 기분이 나쁘고 다음에 우연히 마주치면 또 기분 나빠질 것 같아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습니다.
해외에 살다 보면 한국말도 자꾸 어눌해지고 그 뉘앙스도 둔해져 말한 사람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마음의 상처를 받아 혼자서 심기가 불편해져 다른 사람들은 이유도 모르고 함께 불편해 하게 됩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다고 이런 심기 불편한 마음이 풀리지 않고 해를 거듭하면서 쌓이고 쌓여 결국 우리는 오랜 해외생활의 대가로 “인격 파탄자”가 되고 맙니다.
근 10년 전에 독일에서 만난 한 광부출신의 교민이 “20년 해외생활에 나의 머리는 한 5도쯤 돌았습니다.”라고 한 말을 이제 막 해외생활을 시작한 저에게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20년 후의 나의 모습이 그분의 모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년이 지난 후 치열하게 자기성찰을 하는 그분의 모습 정도만 되어도 괜찮겠다고 해외생활 10년이 지나가는 지금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외생활에서 심기 불편함이 쌓여 서서히 <인격 파탄자>가 되어간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해외생활에서 인격 파탄자로 만들 수 있는 심기 불편한 감정이 우리들의 자기 주장과 하나님의 뜻이 서로 충돌하는 영적 불협화음의 사인임을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좋지않는 감정이 처음에 계획되지 않았던 바울의 아테네 선교의 계기가 됩니다.
바울이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또한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하였다.”(17)
바울은 심기 불편하여 격분한 감정을 감정으로 노출시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화가 나게 한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심기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감정이 나면 부부도 그리고 부모와 자식도 대화가 힘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의 특징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심기가 불편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 바울이 격분하였습니까?
그가 십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를 보자 화가 났습니까?
그것은 이유가 아닙니다.
보통의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십계명을 어겼다고 분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지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유대인들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 처럼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의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우상에 하나님이 분노한 경우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오늘 분노한 것은 그 우상과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 아테네 시민들 때문이 아닌 다른 더 깊은 뜻이 있었음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 도시는 우상 위에 우상으로 쌓여있었습니다.
아마 유대인 묘지처럼 묘지 위에 묘지들이 켭켭이 쌓인 것 처럼 우상들이 도시 전역에 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 전국에 있던 우상숫자들보다 아테네의 우상숫자가 더 많아고 심지어 아테네 시민들 숫자 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합니다.
시내를 다니다가 그 많은 우상의 상들과 제단들 속에서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이름의 제단을 발견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
제단에 적힌 이름을 보는 순간 사도 바울은 갑자기 알지 못하는 신까지 숭배해야 하는 인간의 처량함이 느껴졌습니다.
요나 이야기를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요나로 인하여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것은 신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나가 제비에 뽑히고 그는 풍랑이 이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러자 거센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자연재해를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공포를 배경으로 한 성경 말씀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우리나라의 심청전도 이런 종류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와 관련되어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 관한 에피소드는 키프러스의 에피메니데스 라는 사람이 쓴 시와 관련이 있습니다.
6세기 때에 아테네에 전염병이 빠르게 퍼져갔을 때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원인이 그들이 신가운데 하나를 화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지도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신을 화나게 하였는지 조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신이 화가 났는지 발견하지 못하였다.
화가난 신은 아직 아테네에서 “알려지지 않은 신”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는 한가지 제안을 하게 된다.
우선 양 몇 마리를 골라 며칠동안 먹이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풀밭 위에 풀어 놓았습니다.
배가 고픈 양들은 초원 위에 돋아난 풀들을 마음껏 뜯어 먹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풀을 먹지 않은 곳이 있으면 그곳에 재단을 세웠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신을 위해 이와 같이 재단을 세우자 전염병이 차츰 수그러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상숭배의 배경에는 재앙과 불행에 대한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공포>가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공포의 노예가 되어 있는 아테네 시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적 사고와 고도로 발전된 문학과 예술 그리고 신의 뜻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자유가 있는 신화를 생산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대단히 자랑하면서 공포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성찰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그들의 모습에 바울은 분노가 치밀었던 것입니다.
18절을 보시면 “몇몇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도 바울과 논쟁하였는데”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테네에는 많은 학파들이 형성될 만큼 지식의 전당 대학이 발전하였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공포로 온갖 신들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기는 아테네가 이성과 논리를 자랑하는 지식인들의 중심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은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처한 이 모순에 대해서 분노한것입니다.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심기불편함과 분노의 감정이 우리의 이웃과 개인을 향하지 않고 해외생활의 현실이 가져오는 긴장과 구조에서 고통을 겪는 인간의 모습임을 사도 바울처럼 깨달을 수 있어야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살아가면서 우리들의 심기가 불편해지고 감정이 일어날 때 이것은 나의 계획을 하나님의 계획으로 선회 시키려는 영적신호가 아닌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감정으로 표출하면 나와 이웃을 인격 파탄자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 감정의 원인을 추적해 가면
해외생활에서 오는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긴장과 구조적인 어려움을 발견하고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으로 결심하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들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처한 자신의 현실적인 모순을 바라볼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은 그들과 대화를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대화가 결국 아테네에서 복음 선포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그리고 다른 날에는 광장에서 아테네 철학자들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광장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활동장소 였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토론하였습니다.
아테네에 있던 다양한 학교 가운데 에피쿠로스 그리고 스토아 학파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아마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이었던 것 갔습니다.
그들은 다음 세상의 존재에 대한 지식이 없어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외국의 낯선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 고 말하는 사람들은 범신론의 스토아 학파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은 18절에서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토아 학파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에서 나오는 예수와 부활을 각각 신의 이름으로 이해하였던 것 같습니다.
대화는 이처럼 힘이듭니다.
아테네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관점으로 바울의 이야기를 평가합니다.
사오정 수준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놀 때 자기들끼리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서로 열심히 이야기 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내 이야기에 왜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하느냐”고 다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쓰임 받는 신자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이 왜 그렇게 이야기 하는 가를 이해하는 대화의 출발점으로서의 역할을 기쁘게 감당합니다.
대화는 설득과 굴복을 시키는 것을 목표로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말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22)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 대한 깊은 이해심에서 대화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억지로 무엇을 노력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쓰임받는 일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누룬 것도 의도적으로 아테네 시민들과 대화를 시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공포에 둘러쌓여 우상숭배를 하면서 이성과 논리를 자랑하는 그 모순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그러나 그들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대화를 시도한 것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그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생활실천 목표 가운데 하나가 <숨은 봉사생활>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집사님을 위시해서 거의 전교우들이 조그마한 봉사한가지도 모두 맡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 처럼 앞으로도 그 작은 봉사를 통해 지금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서로 다른데서 오는 영적
불협화음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듣고 그것에 투신하려는 자신의
노력의 장으로서 저와 여러분들은 교회의 봉사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는 우리 교우들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누구가 나서기 싫은 일이 구정물에 손을 넣고 설거지 하는 일, 화장실 휴지통이 차면 누군가가 치우는 일, 주방일 간수하는 일과 같이 표시 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굳은 일들입니다.
굳은 일을 앞에 두고 처음에는 서로 눈치 보며 신경전을 부리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들을 서로 주저하지 않고 나서서 하는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의 성장이자 곧 하나님의 쓰임 받는 일꾼의 소양을 갖춘 우리 교우들 개인들의 신앙의 성장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이라고 믿거나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이라고 추켜 세우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은 오늘 사도 바울처럼 그 사실을 모르면서 그저 생활하고 행동할 뿐입니다.
단지 저와 여러분은 꾸준히 묵묵히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돌이키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하며 맡은 작은 봉사일지라도 그 동기가 교만하지않도록 자신을 채찍질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도록 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사순절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그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며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참 신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의 길을 모두 함께 걸어가십시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현재의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신약성경에서 만날 수가 있으며 그 말씀들은 현재에도 살아서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안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 대한 그 분의 계획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행하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지를 읽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함께 오늘 본문말씀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 속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독교의 가장 큰 명절인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회로 삼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돌아오는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교회전통에 따라 이 날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장로들, 대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시게 될 사건을 미리 예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도 아주 큰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이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어땠는지 더 명백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 이다.“(마10:22)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된다고 마치 예수님의 스승처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스승에게 무엇은 할 수 있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말하기 시작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지도 않았으며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 않았고, 그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즉각적으로 자신의 충고를 스승에게 말했습니다.
그러한 베드로에 대해 예수님의 완고한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을 인간적인 경솔함이라며 꾸짖으셨을 뿐 아니라 그런 말은 사탄의 말이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사탄은 히브리어로 적대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며 하나님을 위배하여 행하는 자,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자가 바로 적대자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말씀을 비판하며 자신의 생각을 주장했을 때 베드로는 바로 적대자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에 예수님을 대항했으며, 바로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는 적대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단언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은 모든 제자들이 자신들의 인간적인 부족함으로, 또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기를 바라는 뜻에서 하신 훈계와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인간의 뜻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해 이 상황을 이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가져오는지(무엇이 따르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이성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도 않고 좋은 것도 아니라고 말할 지라도, 그래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인 우리는 우리를 위해 정말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 인생의 중심방향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되지 않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불러 알게하는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 인생은 정말 헛되고 의미가 없는 것이 되 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의 목숨을 잃는다는 표현을 더 잘 이해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의 생명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가치 있게 살 수도 없고, 자신의 인생 사명과 하나님의 뜻이 충만해질 수도 없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우리가 잘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행복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충만한 삶이 아닙니다.
그리고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이 오히려 자기 인생 전체를 낭비하는 것이라고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부와 권력,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 세상의 (눈으로 본)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세상적인 성공에만 쏟지 않는 그런 사람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사람인양 무시를 당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 자신의 시간을 이웃을 위해 투자하는 사람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자기 일만을 위해 열심을 내는 우리는 이제는 자녀들이나 부모를 위한 시간도 없습니다. 교회에 갈 시간이라던가 이웃을 위한 시간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사람이 오히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갈 때, 사실상 그 인생은 구한 것이 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많은 수입을 가지고 살지만 진정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멋진 자동차와 집을 소유하며 자녀들에게도 최고의 교육을 시키고 자신의 가족을 위한 재정적인 수단을 마련해놓습니다.
그러나 이미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그들 중 대부분은 진정한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 가족을 위한 시간도 자신을 위한 시간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참 많은 것을 갖게 되었지만 행복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 버린 결과는 어떻게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입니다.
부모가 충분한 시간과 사랑으로 자녀들을 돌보지 않을 때, 자녀들의 독립적인 삶을 위한 경제적인 준비나 멋진 장난감이 그 사랑을 절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느낌과 감정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결여되거나 그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이 있을 때에는 평생 그것에 상처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 속에 잘못되었던 것을 고치기 위해 다시 인생을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다시 돌이킨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과거의 어떤 일이나 상황 속에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들을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행하지 않았기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갖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 영혼 깊숙한 곳에 짐으로 남아 있는 경험은 아마 다 해 보셨을
겁니다.
전형적인 예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 해주지 못한 말들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마음 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설교의 첫 부분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교회전통에 따라 오늘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리는 부활절을 예비하기 시작합니다.
나사렛 예수 없이는 기독교가 생겨날 수 없었고, 우리를 크리스챤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크리스챤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우리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것으로서 그 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일상 속에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인생이 무엇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에게로 하나님께로 끊임없이 부르고 계시며, 누구를 위해,무엇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들과 함께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의 베드로처럼 그 말씀을 듣지만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처럼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분 앞에서 자신의 방법과 계획을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고 동의하실 거라 확신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지만 모두 자신의 관점에서 읽기 때문에 성경을 우리의 상황에 맞추게 됩니다.
성경 속에 자기 상황에 비추어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그것을 골라 읽습니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안들고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이 나오는 구절들은 생략해버리고 무시해 버리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그 분을 무시하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행하시도록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인식조차도 하지 못합니다. 점점 더 세상 것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닌 세상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다시 살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뜻을 지금 당장, 이 순간에, 그리고 매일 매일 들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내일로, 다음 주로, 다음 달로, 내년으로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우리가 더 많은 시간을 가졌을 때 해야지 라고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직장에서 할 일이 좀 줄었을 때, 회사가 잘 되어 번창할 때, 먼 훗날 정년퇴임을 해서 시간이 날 때 등으로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시작하는, 또 그 삶을 계속(지속)해 나가는 가장 올바른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Amen
설교 후 기도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길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을 감사하며 당신을 찬양합니다.
형제, 자매들과 함께하는 공동체 속에서, 또는 성경을 읽을 때에도 주님을 만나는 순간들은 저희들에게 있어서 큰 축복입니다.
그 순간들이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 주며, 또한 살아가는 힘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에게 뒤돌아 서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실 거라고 잘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얼마나 자주 믿음 안에서 무너지는지 주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당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또 당신의 사랑을 우리 이웃을 위해 실천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의 행동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낡은 우리의 인생 폐허 속에 성령으로 임하셔서 당신의 복음의 진리가 스며든, 당신에
대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 충만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한 그런 새로운 인생을 건설해주시옵소서.
주님의 도우심과 축복을 간구합니다.
Amen
040215 사순절전 두번째 주일
본문: 사도행전 17:1-15
제목: 신사적인 신자가 됩시다.
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쫓으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 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설교>
오늘 본문은 16장에 이어 그리스 도시들에서 진행된 바울과 그 일행의 선교이야기 입니다.
16장에서 빌립보 도시가 나오고 17장에는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도시 이름이 나옵니다.
이들 도시는 그리스 북동쪽 에게 해협에 위치한 항구도시들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터어키 쪽에서 올라와 만나는 첫 도시가 빌립보 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이그나티우스>라고 불리우는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여행을 합니다.
이 국도는 에게 해협을 따라 가는 해변가 도로입니다.
빌립보에서 160키로 미터 떨어진 곳이 현재에도 그 이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입니다.
데살로니가로 가면서 제법 큰 도시였던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그냥 지나쳐 갑니다.
아마 그들은 당시에 수도이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을 하였던 데살로니가로 직행하였던 것같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유대인들의 생활 중심인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선교전략은 언제나 먼저 이 회당을 찾아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 유대인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입니다.”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유대인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회당에 함께 모이던 이방인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르친 이후 바울은 자연스럽게 이방인의 전도자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2절과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습니다.)
“바울은 자기 관례대로 회당으로 그들을 찾아가서,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해석하고 증명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여기서 “세 안식일”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 말에서 바울은 적어도 세번의 안식일을 데살로니가에서 체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기록한 바울의 선교행적 가운데 아마 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의 체류가 가장 길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4장 16절에 “내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내가 쓸 것을 몇 번 보내 주었습니다.”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도 바울의 데살로니가 체류가 길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뒷바침 합니다.
데살로니가 체류가 길어진 이유는 바울이 단지 예수, 천당을 외친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지고 그곳 사람들과 토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단지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증명하면서 성경을 토론하였습니다.
아마 같은 유대인들일지라도 마케도니아(그리스)의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성경을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증명을 하여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였습니다.
저 역시 체코선교를 위해 바울이 이방인 지역에 있는 유대인 회당을 이방인 선교를 위한 전략지로 삼았던 것 처럼 직접적인 무신론 사회를 위한 복음 전파가 아닌 체코교회를 통한 복음의 무신론 사회접근을 하고있습니다.
무신론 사회 속에서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것이 체코교회입니다.
교회재정도 국가에 의존되어있고 사회의 소수파입니다.
처음에는 사회가 교회를 고립시켰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스스로 자신을 사회와 이웃에 대해 문을 닫고있습니다.
이것이 체코교회의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자폐증세 가운데 하나가 <소심한 믿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가문대대로 기독교 집안이면서 대학교수인 분이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조상들의 신앙을 맹목적으로 따를 수 없어 고민을 하다가 한국교회의 큰 인물인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이성으로 믿을 수 없는 자신의 신앙의 문제들을 다 듣고 난 후에 한마디 하신 말씀이 “그냥 꾹 믿어 두라우!” 였다고 합니다.
유럽의 합리주의와 기독교 비판을 경험한 체코교회에게 만약 “그냥 꾹 믿어 두라우” 라고 권면을 한다면 아마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을 누구도 강요해서는 안되는 것은 사회의 불문율처럼 되어있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강요하면 바로 나오는 반응이 “사람은 믿을 자유도 있지만 동시에 믿지 않을 자유도 있다.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 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가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한번은 체코교우들과 연합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설교를 했을 때 우리 한인교우들은 “목사님, 오늘 말씀 참 좋았습니다.
은혜받았습니다.” 저를 격려하였는데 체코교우들은 “오늘 목사님 설교는 매우 선동적이었습니다.”라고 반응을 한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설교를 놓고 체코와 한국 교우들의 서로 각각 다른 반응의 원인에 대해 연구를 하였습니다.
우리 한국교인은 설교를 직관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성경의 해석과 증명보다 말씀의 적용을 통해 성경의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야 한국교인들은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코교우들은 설교를 직관이 아닌 이성으로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성경을 해석하고 증명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성경을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문제는 청중인 교인들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그것을 설교자가 간섭하면 그 설교는 선동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성경을 해석하고 증명하였습니다.
그의 설교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의 전달 방법은 토론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7절에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또한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토론이 곧 선교이고 말씀 선포였습니다.
그 결과는 오늘 본문 4절에서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승복하여 바울과 실라를 따르고, 또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서 보다 이방인들 사이에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게다가 소위 “귀부인들” 즉 권력을 가진이들의 부인들이 회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처럼 방해가 여기서도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5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시기하여,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다가 소요를 일으켜서, 성을 혼란에 빠뜨리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끌어다가 군중 앞에 세우려고 찾았다.”
왜 똑같이 앉아서 성경 해석하고 증명을 듣고 함께 토론을 했는데 이방인들 사이에는 믿는 사람들이 생기고 유대인들은 거부자들이 되었는가?의 문제입니다.
히틀러 시대 때 체코교회에서 예수와 그의 복음을 반대하는 성경의 유대인들을 부각시켜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합리화시키려는 일부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을 극단적으로 끌고 가면 복음에 반대하는 유대인종의 문제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데살로니가 사건과 함께 연속되는 이야기로 베뢰아 사건을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그 베뢰아에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찾아갑니다.
이 기록으로 베뢰아의 유대인들과 데살로니가의 유대이들이 자연스럽게 서로 비교가 됩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의 사건과 베뢰아의 사건을 연결시킨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의 의도입니다.
모든 이방인들은 복음을 수용하고 반대로 모든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였다면 우리는 인종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과 전혀 다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11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 보다 더 고결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 하였다.”
이에 반해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에 대해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그러나 (데살로니가) 유대 사람들은 시기하여,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다가 소요를 일으켜서, 성을 혼란에 빠뜨리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끌어다가 군중 앞에
세우려고 찾았다. 그러나 그들을 찾지 못하고,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을 성읍의 관원들에게 끌고 가서, 큰소리로 외쳤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5-6)
저자 누가는 두 도시의 사건을 연결시켜 자연스럽게 베뢰아의 유대인들과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베뢰아 유대인들은 <고결한 사람들>인데 데살로니가 유대인들 <시기와 질투하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두 유대인들의 차이는 성품입니다.
좋은 성품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쁜 성품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합니다.
성품은 사람됨됨이를 뜻합니다.
신앙생활 잘 하면 좋은 성품의 소유자로 바뀝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는 곧 신앙의 성품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면 사랑의 사람, 기쁨의 사람, 평화를 만드는 사람, 잘 참을 줄 아는 사람, 친절한 사람, 착한 사람, 맡은 책임을 잘하는 신실한 사람, 온순한 사람 그리고 절제를 잘 하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해 설명을 한 갈라디아서 5장 22절 말씀을 거울로 삼아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자주 들여다 보아야합니다.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오래되고 보기 좋고 나뭇잎이 무성해도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소용없습니다.
10년 20년을 믿어도 성품이 바뀌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매일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사람들끼리 살다가 새로운 얼굴이 한인사회나 교회에 나타나면 반갑고 해서 한인사회와 교회와 사람에 대해 많은 정보를 줍니다.
해외생활에서 남의 이야기를 하지않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저 역시 새롭게 오는 분들이 사람들에 대해서 가급적 편견을 갖지않도록 이런 저런 평들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 하지만 꼭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수 없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대체로 좋은 이야기보다는 주로 부정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힘드는 것은 새로운 분이 교회에 올 때 그 분을 환영하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기존의 교우들이 돕는 일로 새로 오는 교우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동시에 다른 교우들에 대해 그리고 교회에 대해 객관성이 결여된 부정적인 정보를 주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편견을 갖게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기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정보를 받는 새로운 교인도 아무래도 부정적인 시각에 영향을 받아 교회생활과 그리고 다른 이웃들과의 교제를 이루어가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고국을 떠나 해외 마케도니아(현재 그리스) 수도 데살로니가에 정착하며 사는 이민자들인 유대인들은 성품들이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온 방문자들을 적대하고 부정적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유대인 사회가 부정적인 것은 데살로니가의 이민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됨됨이가 부정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려 그런 사회에서는 교회도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해외의 한인교회가 왜 칭찬을 듣지 못하고 욕을 먹습니까?
해외 한인교회는 말 많고 피해야 할 곳으로 사람들이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람됨됨이의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의 사람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 보다 사람됨됨이가 더 못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도덕과 윤리와 양심의 잣대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높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똑 같은 욕을 여러분들과 목사인 제가 한다면 당연히 제가 비난을 더 받게 될 것입니다.
이유는 여러분들은 평신도이고 저는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인 기준이 목사와 평신도가 같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통념으로 신자와 신자가 아닌 분들과의 도덕과 윤리의 잣대가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이 자주 이러한 사회적 책임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한발자국 더 나아가 해외이민 사회에서 교인들은 교회의 문제를 사회화 시킵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 자신의 정당성을 교인들에게 알려 자신의 지지자를 얻으려고 하고 더 나아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알립니다.
오늘 데살로니가 유대인들과 바울의 문제는 신앙의 문제, 회당(교회)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6절과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 그 사람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을 합니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 내용을 이슈로 삼지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설교한 복음을 국가반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즉 사회문제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 선동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와 신앙의 문제를 사회의 이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마케도니아)의 소수 민족입니다.
자신의 교회 문제, 자신의 민족 문제를 이방인 사회까지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 밖의 사람들 이방인들이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처음부터 아예 <예수의 예>자도 그들에게 말을 꺼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2장 16절에서 “그들은 우리가 이방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려는 일까지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죄의 분량을 채웁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이르렀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들이 교회 안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허물과 실수를 서로 감싸고 덮어주는 마음은 결국 복음을 전하는 신자의 자세입니다.
반대로 허물을 들추고 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방해하는 일로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해외 이민 생활의 성공을 누구나 꿈을 꿉니다.
여러분, 무엇이 성공입니까?
사업하는 분들은 돈 많이 벌고, 공부하는 분들은 학위 받아 한국가서 교수로 임용되면 성공한 것입니까?
돈은 벌고 교수는 되었는데 그것을 담을 만한 인간됨의 그릇이 미치지 못하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돈과 명예가 적어도 3세대 이상은 유지되어야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과 명예가 3세대 이상 유지되려면 그것을 담을 만한 인간됨의 그릇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돈과 이름을 조급하게 얻으려고 애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와 하나님이 주시는 명예를 담는 그릇을 준비하는 일을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야가 가난한 과부에게 축복을 하기 전에 먼저 집안에 그릇을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준비한 그릇 만큼 기름이 채워졌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시기 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되지만 동시에 이해하는 마음을 넓히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의 씨앗이 어떤 밭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말라 죽을 수도 있고 새의 먹이가 될 수 도 있고 조금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
표준새번역에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 보다 더 고결한 사람들이어서…”
한국어 번역의 <신사적이다> <고결하다>는 단어가 좀더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체코어 성경에는 „přístupný“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přístupný člověk“ 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신사적인 사람, 고결한 사람>이란 결국 <속이 좁거나 편견이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기와 질투하는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편협하고 좁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우리는 해외 이민생활과 신앙생활을 성공하기 위해 마음의 장벽을 자꾸 무너트려야 합니다.
특히 시기와 질투가 생산하는 마음의 장벽을 무너트려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베뢰아 유대인들 처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는 마음을 키워감으로써 극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에게 있는 하나님의 달란트를 발견하는 놀라운 사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공동체안에 있는 우리는 나의 형제 자매를 더 이상 내가 갖지않거나 나보다 더 가진 소유자가 아닌 하나님의 달란트를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체험이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 저와 여러분들은 베뢰아의 유대인처럼 신사적이고 열린마음을 가져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을 체코의
한인사회에 그리고 체코의 무신론 사회와 폐쇄적인 체코교회에 드러내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기업을 감당하고도 남는 신자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040208 (사순절 전 세 번째 주일)
본문: 사도행전 16:11-34
제목: 이유 없이
<본문>
11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4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17 바울과 우리를 쫓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설교>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표준 새번역으로 다시한번 더 읽어드립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니, 죄수들이 듣고 있었다.”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혀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는 바울과 실라에 대한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어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여 이 말씀이 우리들의 삶에 그리 감동을 주지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어려움이지 나와 같은 평범한 신자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단지 이 말씀을 근거로 기도와 찬양의 능력에 대한 설교를 우리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것 처럼 사방에 우겨싸임을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바울과 실라처럼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면 감옥 문이
열리고 손발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저절로 풀리듯이 우리들의 문제가 풀린다는 주제의 설교를 우리는 자주 들었습니다.
바울의 두번째 전도여행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바울과 실라에게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보내는 바울의 서신에서 그는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을 받고 모욕을 당하였으나”(살전2:2) 라고 할만큼 그날의 고통과 모욕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 바울과 실라가 기억 속에서 평생 지울 수 없는 이런 모욕과 수치를 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옥에 갇힌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사건의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모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감옥에 간 이유가 최소한 복음을 전하거나 신앙의 문제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에 머무르는 동안 그들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납니다.
그녀는 바울과 실라를 뒤따르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여자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오면서, 큰소리로 이 사람들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다 하고 외쳤다.”
정신나간 여자가 바울과 실라를 졸졸 뒤따르면서 이렇게 소리치기를 며칠동안 계속하였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린 자녀들에게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몇 차례 반복하면 그건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잔소리가 됩니다.
그런데 귀신들려 정신나간 여자가 며칠을 두고 뒤따라 다니면서 그러니 사람들이 볼 때 바울과 실라는 그 귀신들린 여자와 한 묶음이 되어 한편의 코미디가 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자신들이 코미디가 되는 것은 괜찮은데 이제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면 사람들은 미친 여자가 뒤따라 다니던 그 재미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들려 점치는 여자가 복음을 외치게 함으로써 귀신은 복음과 마술을 연관시켜 복음의 신용을 떨어트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전파를 방해하기 위한 귀신의 교묘한 전술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귀신에게 명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18)
그러자 귀신이 즉시 그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사건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 귀신들린 여종은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었습니다.
그 여종은 귀신으로부터 놓임을 받아 자유 하는 인생 행복한 인생이 되었지만 그 주인들은 그만 자기의 밥줄이 끊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생산을 지배하는 자본의 구조 아래 있는 전근대적인 노사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과 견주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시면 여종의 주인은 한 사람이 아닌 둘 이상의 복수입니다.
그 의미는 이 사건이 단지 스캔들이 아니라 사회적인 이슈가 된 것을 뜻합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4. 15선거 때문에 긴장이 팽팽합니다.
정치를 국회의원의 철밥통에서 해방시켜 국민의 행복으로 바꾸려는 싸움이 사회적으로 시끄럽습니다.
밥 먹는 개의 밥통을 잘못 건들면 개한테 물릴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밥통 잘못 건드리면 원수가 됩니다.
바울과 실라는 주인들의 밥통을 잘못 건들어 큰 화를 자초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종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잡아 agora로 끌고 갔습니다.
아고라는 시장이 열리는 도시의 공공 생활의 중심지입니다.
유럽의 광장과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광장의 중심에 있는 시청에 몰려가 그곳에서 근무하던 치안 판사들인 두 관원들에게 끌고 갔습니다.
이 재판은 법적으로 일반적인 손해배상 소송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정당한 심문의 절차에 따라 합법적인 조사가 선행되어야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완전히 비정상적인 재판이 진행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22절에 보시면 “무리가 그들을 공격하는데 가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 나쁜 것은 이것은 분노한 군중을 조용하게 하기위해서 치안 판사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기고 “그들을 매로 치라”고 명령한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심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상황은 끝이 납니다.
합법적인 재판 절차가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입니까?
그것이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기독교인이기에, 그렇다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여종의 주인들의 고발장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20)
다시 말씀드려 바울과 실라는 그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재판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빌립보 도시의 특별한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2절에 보시면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 였습니다.
이 도시는 작은 로마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도로 표지는 라틴언어로 되어 있었고 로마법이 통하였으며 통용되는 화폐도 라틴어로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주로 로마시민의 권리를 가진 전쟁영웅들과 같은 퇴역 군인들이 이곳에 거주하며 정착하고 살았습니다.
빌립보에서 이들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이미 식민지 지역의 정복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유대인들은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풍습을 유지하였고 그들은 로마 제국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특별한 민족으로 보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로마 내에 깊이 뿌리내린 반 유대 정서가 작지 않다는 것을 21절의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이란 말씀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 역시 빌립보에서 유대인들의 숫자가 매우 적고 그래서 세워질 수 없는 유대 회당과 같은 “기도처”를 찾고 있었음을 13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의 법에 남자성인 10명이 되어야 회당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빌립보에서 가졌던 습관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러한 사회상황을 배경으로 하고있습니다.
만약에 로마제국의 칙령에 의해서 경제적인 손실이 발생하였다면 그 주인들은 어떤 항의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멸시하고 경시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자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점치는 사업을 방해하고 손해를 끼친 이들 모두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거창하게 인종차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역과 출신에 대한 차별의식을 생각해보면 차별의식은 이성보다 감정이 앞섭니다.
마치 전염병 같습니다.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들이 아닌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비난합니다.
점치는 사업을 하는 빌립보 도시의 실업인들은 이해관계에 자신들이 앞장서지 않고 차별의식의 색깔을 칠해 일반대중들이 이 일에 앞장을 서게하고 자신들은 그 뒤를 따릅니다.
이러한 차별의식은 시를 다스리는 치안 판사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심문도 하지않고 두 사람을 매로 때리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바울과 실라가 겪은 모욕은 복음선포나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상황인 반 유대주의에 근거한 린치와 투옥이었습니다.
겪어야 할 고통이라면 참을 수 있습니다.
높은 뜻을 이루기 위해 감옥에 갇히고 피를 흘리는 고통이 필요하다면 인간은 그 고통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실현을 위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심지어 자부심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필요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 견디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내가 지금 왜 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 고통을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정당하지 못하고 가치 없는 것을 위한 고통은 견디기 정말 어렵습니다.
후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빌립보에서 겪은 고통을 모욕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 고통은 이해할 수도 가치를 느낄 수도 없는 참을 수 없는 수치였습니다.
기독교인 바울과 실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여행길에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와는 오히려 적대적이고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는 유대주의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전도 대상인 유대주의 때문에 당한 모욕은 완전히 그들에게 의미 없는 짐을 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때론 우리 자신들의 실수와 잘못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고 높은 뜻을 이루기 위해 고생을 사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생활을 뒤덮고 있는 우리들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고통과 모욕은 그 의미와 가치도 느끼지 못하거니와 때로는 내가
왜 이 고통과 모욕을 겪어야 하는지 억울할 때가 있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를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양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찬양할 가치가 있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그들은 주님께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을 보았기 때문에 찬양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감옥 밖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한 것처럼 그들은 감옥 안에서도 찬양합니다.
그들이 찬양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나”를 죽여 “나”를 찾는 삶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갈 2:20)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에서 경험한 고통과 모욕이 의미가 있든지 없든지 그것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그리고 두려움과 슬픔과 아픔과 상처를 느끼는 모든 사건들을 겪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그 의미를 질문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 의미를 찾는 자기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내적인 또는 외적인 행복이라는 욕망을 찾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과 두려움과 아픔의 의미와 그 뜻을 깨닫는 것이 내게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직도 버려야 할 나 자신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청춘 남녀가 사랑을 하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자식을 배아프며 낳고 먹지 못하며 먹이고 입지 못하고 입히는 것이 이유가 있습니까?
어머니의 사랑이 이유없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숭고한 행위는 이유없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랑하여 때로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때로는 고통을 겪게하십니다.
은혜를 받았기에 고통의 의미를 알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그 사실로 이유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지금 동행하시고 기억하고 있음을 그는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의미를 알기 이전에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감옥 밖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현존안에 있었던 처럼 지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고 감옥 안에 갇혀 있을 때도 그는 하나님의 현존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현존안에 있으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했을 때 왜 나에게 이 고통과 어려움이 있는가? 질문하고 불평과 원망과 비난을 하기 전에 사랑하는 주님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를 의지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할 신앙의 푯대를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표준새번역 합 3:17, 18)
오늘 말씀을 좀더 보시기 바랍니다.
밤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밤에 일어난 그 지진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연상시킵니다.
26절에 “갑자기(홀연히)”란 단어와 “곧 문들이 모두 열리고, 모든 죄수의 수갑이며, 차꼬가 풀렸다.”라는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이 26절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강조하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의 체험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놀라운 사건을 목격한 간수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깨닫지 못합니다.
감옥 문이 저절로 열리는 사실은 그에게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라 죄수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죄인들이 도망을 쳤다고 생각하여 간수는 자신의 무기를 꺼내 자살하려고 합니다.
그때 그는 어둠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28) 하고 외치는 바울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의 음성을 듣고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안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바울과 실라가 찬양을 하던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 안에 자기 자신이 들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수들이 도망치지않았다는 것이 기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무서워 떨었습니다.
무서워 떨며 간수는 바울과 실라 죄수들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서 “선생님들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말했습니다.
사람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안에 있음을 깨닫기 시작할 때 한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지난 주일 체코 교우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기 시작한 베드로의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나도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지 질문합니다.
그래서 간수는 두려움을 피한 장소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질문합니다.
그는 “내가 무엇을 해야(어떻게 해야)” 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대해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중요한것은 “어떻게 해야”가 아니라 “누구를 믿어야” 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믿습니다.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31) 대답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간수와 그의 가족들에게 주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간수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그들에게 어떤 일들이 진행되었는지 우리들은 알 정보가 없습니다.
단지 빌립보에 교회가 생겨 고난과 고통에 빠진 다른 기독교인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가 시작되었으리라 추측할 뿐 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해외생활에서 숱한 고생들을 하며 그때마다
하나님, 왜 나를 낯설고 물선 이 해외에 보내셔서 이 고생을 하게 합니까?
이 고생을 시키는 그 뜻이 무엇입니까?
그 뜻을 알 수 있다면 나는 그래도 그 고생을 참아 낼 수 있겠습니다.
도무지 의미 없고 가치 없고 내 인생을 피폐 시키는 그런 마음과 육신의 고생은 감당하고 싶지않습니다.
하나님 복음 전하라 이곳에 보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도 확신 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 온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조차도 모르겠습니다.
고생을 하면 할수록 더 강팍해지고 악해지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도 하기 어렵습니다.
자꾸 자존심만 상하고 그래서 허풍선 처럼 나 자신을 떠벌리게 됩니다.
하나님,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합니까?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의 이 질문에 비록 우리 주 하나님 여호와가 대답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이 믿는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들을 사랑해서 이땅에 오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현존안에 있어 용서 받고 받아들여졌다는 진리의 말씀을 진심으로 의지한다면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그리고 그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으며 그래서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이 귀신으로부터 놓임을 받듯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해방이 되듯이 그리고 비록 자유의 몸이지만 죄의 사슬에 매여 있던 간수와 그의 가족이 죄로부터 해방되고 영생의 구원을 얻듯이
이유없이 오직 하나님 한분 때문에 드리는 우리들의 기도와 찬양이 우리의 모든 문제로부터 해방을 시킬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누룩처럼 퍼져 나가게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