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의 설계

  • 한인 예배 (2004년 01월 25일)
  • 사 55:8-9
  • 설교자: 끄라딕

040125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는 다시 일정한 계획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신년계획을 아주 자세하게 세운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냥 대충 outline만 잡아 놓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새해 계획이 다 세워지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 계획들이 성취되도록 도와주시길, 또 축복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신실한 크리스찬이라는 느낌으로 새해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무엇을 위해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는 지가 중요합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얼마나 이성적이지 못한 계획들을 세웠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또 그 계획들 속에 우리가 얼마나 무지 했었는지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좋지 않은 모습을 배워 세우게 된 계획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축복해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선한 것이 악한 것과 뒤죽박죽 섞여있는 것을 하나님께 들고 나가 축복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혼자 자신의 계획을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것이 실현되도록 도움을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 일을 도와주는 보조자로, 우리 이익을 위해 쓰여지는 도구로 비하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보조자로 혹은 도구로 비하시키는 것은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비하하거나 모욕하지 않고 그 분께 도움과 축복을 간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신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다스릴 수만 있다면 가능한 것 입니다.   

새해에 난 무슨 계획을 세워야하나? 미래를 위해선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나? 라는 차원의 질문을 하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대신에 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새해에 나에게 세워놓으신 계획은 어떤 것일까, 나의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어떤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정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질문의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우리의 보조자나 도구가 아닌 우리의 주님으로, 현명한 아버지로 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최고의 경배를 받으셔야 하며, 그 경배함은  말 뿐만이 아닌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서,우리의 모든 존재 속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라는 첫 번째 계명이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교리문답서에 보면 그 계명을 잘 풀어 설명해 주고 있는데 „ 우리는 만물에 뛰어나신 주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두려워해야 하며, 그 분을 사랑하고, 유일하신 그 분을 믿어야 합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 네 마음과 혼을 다해, 네 힘과 생각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의 큰 계명이 이 경외함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해야하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 이 시간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통한 당신의 계획은 무엇인지요? 어떤 사명을 저에게 주셨는지요? 내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시는지요? 나의 최선의 노력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요?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질문들이 하나님 경배에 대한 우리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경외함으로 행할 때, 우리 삶의 많은 것들에 올바른 질서가 잡힙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은 우리 모든 관계의 기초가 됩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들과의 관계도 정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정상이 되면 다른 많은 관계들도 정상이 됩니다.

사람은 한계적인 존재며 너무나 많은 것에 무지합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우리가 세우는 인생 계획 속에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인생 계획 속에는 참 많은 실수와 미흡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인생 계획도 하나님께 맡긴다면 정말 신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새롭고 높은 수준의 계획들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커다란 차이에 대해 오늘 본문 이사야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람은 죄악된 교만함으로 행합니다. 그리고 „내 인생은 내 것이며, 내 인생에 신도 간섭할 수 없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결심한 사람은 자신의 인생 계획의 더 높은 단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영원히 낮은 영적인 수준에 가두워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또 두번째 가능성이 있습니다. : 믿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들이 우리들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인생계획을 하나님의 뜻에 맡길 수 있다면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고 우리의 인생계획을 세운다면 우리는 내면에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한편에는 우리가 계획한 자신의 계획들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을 위해 우리를 예비하셨고, 삶의 방향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안에 일정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과 조화를 이룰 때만이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만 인생을 계획하고,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통해 무엇을 이루시려는지 살피지 않을 때 우리 내 면이 불안해지고 긴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에 가까워질수록 우리 내면에서는 점점 평화를 얻게 됩니다.

내면의 평화와 안정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갈망하는 것이며, 특히 내면의 불안함으로 고통을
체험한 사람에겐 더욱 더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 그 내면의 평화를 향한 길을 우리는 꼭 가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의 인물들을 통해서 사람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그 계획대로 살았을 때 그 내면이 진실로 행복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예가 바로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그리스도 입니다.

예수님의 인생 계획과 행적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예는 그 조화를 위해 끊임없이 자기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드렸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가장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내면의 싸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이러한 예로서 여러 선지자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선지자로서의 사명은 정말 어려운 것이었고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과 계획은 늘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계획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인생 계획을 세우기까지 시간이 걸린 선지자들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선지자의 사명이 어렵고 힘들었을지라도 그들의 내면은 행복했습니다.

예레미아 선지자 같은 경우는 그 어려운 선지자의 사명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신의 인생외에 그의 내면에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바울을 통해 인생 계획의 방식이 완전히 전환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자신의 생각대로만 인생을 계획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메섹에서 그의 인생을 간섭하셨을 때 그의 인생 스타일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께 정말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그후 그 질문은 그의 인생 동안 끊임없이 되풀이
됩니다. „ 주여, 내가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십니까?“ 다른 말로 하면 „ 주여, 내 인생에 대한 당신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바울의 질문을 잘 기억해야 하며, 내 자신의 질문으로서도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하게 자신의 인생 계획을 세워나갔던 사람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 사람들의 얘기를 단계적으로 공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자세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인생이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어 그들의 인생계획의 방식을 닮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천사를 보내어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고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다면 좋을텐데..라고 바랄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그럴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정말 극히 드문 일이고,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엔 하나님이 사명을 주신 그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수 있는지를 물어본다면 그에 대한 보편적인 하나님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너희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따를 것이라“

우리는 기쁨으로 이 말씀을 이렇게 더 확대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모세와 선지자들과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가졌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 그리고 예수님 –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가 정말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요?라는
질문과 함께 열심히 성경을 읽는다면 어떤 성경구절하나가 혹은 어떤 이야기가 어느 순간 놀라움으로 다가와 이런 말을 하게 합니다.:
이 말씀이 나에겐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하나의 체험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우리 인생 계획의 모자이크를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우리는 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렸던 예수님의 기도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할 때,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내면의 싸움을 해야 할 때,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각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다르고 다양할지라도 거기에는 또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정말 중요한 공통점 하나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고, 수백년, 수천년을 걸쳐 살아있는 그 분의 모습을 간직하게 하십니다. 아름다운 인간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를 끊임없이 간섭하도록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굉장히 특별하게 들리지만, 분명히 성경적인 생각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우신 계획의 가장 중요한 한가지이기도 합니다.

새해는 계획을 세우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의  계획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만이 아닌, 예수님께 „내가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던 바울의 질문으로 우리의 인생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이든 나중이든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이 나에게 세우신 계획이 무엇인지를 묻고 깊이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빛을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더 그 계획에 따라 살아가려고 할 것이며, 우리가 오늘 맞이하는 2004년이 더 행복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

  • 한인 예배 (2004년 01월 18일)
  • 출1:, 마2:13-23
  • 설교자: 뻬뜨르 슬라마

040118(두번째 주현주일), 슬라마 설교

Ex 1

Mt 2, 13-23

형제 자매 여러분

 

교회력은 오늘 우리에게 요단강가에서의 여수님의 세례를 생각나게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짧은 시간에 베들렘으로부터 애굽을 지나 나사렛까지, 즉 예수님의 어린시절까지를 말해주는 성탄 이야기를 다시 들었습니다.

성서적으로 애굽은-아마 여기 계신 분들중에서 어떤 분들의 여행 경험으로부터 느끼신 것과는 달리- 아주 악한 곳이었습니다. 

성경 어느 곳엔가 한군데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 놀라면서 노래한 한 선지자의 글이 있습니다.  (사
19: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애굽은 노예의 땅이요 거만한 땅이요 영적으로 자기만족적이며 스스로 크다 일컫는 땅입니다.

애굽은 멀리 지평선 위로 불길한 징조를 품고 피어나는 먹구름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애굽은 노예생활로부터 건져내는 장면을 생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을 수 있는 고난의 가능성을 나타내 줍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도 애굽은 동일한 가능성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2장 말씀은 아기 예수님께서 그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와 몇 년간 애굽으로 내려가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과 비슷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으며 어린 아이처럼 부모님의 돌보심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모님과 함께 질투와 두려움의 노예가 된 헤롯왕을 피해 도망을 가고 있습니다.  헤롯왕의 유아살해에 관한 기사는
성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오래된 문서에 보면 헤롯왕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동족 유대 백성들을 얼마나
학대 했는가에 대해 잘 기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 헤롯왕과 애굽의 바로왕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애굽의 바로왕은 예루살렘의 헤롯왕인 것입니다.

헤롯왕은 자신이 의도하는 것에 대해(권력유지) 스스로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을 다 죽이고자 결심하였습니다.

자신의 계획들을 위해 동방박사들을 이용하고자 하였지만 실패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는 고역의 땅 애굽이 반대로 예수님의 가정에는 피난처가 됩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어떤 불길한 조짐이나 낯설음이라든지, 우리를
위협하는 어떤 것이라든지,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이나 또는 우리에게 애굽적인 것이 구체적인 상황가운데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망감으로 슬픔으로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숨어 계시는 듯한, 우리를 피해 계시거나 공동체에만 계시는 듯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비록 애굽을 고난의 땅으로 묘사하기에 주저함이 없지만 그러나 그 애굽 땅에서 자신의 고난을 다 감당했던 사람은 이제
이스라엘에 속하게 됩니다.  애굽이 이스라엘로 가는 길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과 같이 슬픔과 눈물은 크리스찬의 길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장미빛 정원을 지나든 황무지를 지나든 그 선택은 주로 우리의 것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길은 두가지 상황 즉 애굽 또는 약속의 땅이 반복되는 상황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애굽 사람들이 될것인지 애굽 사람들이 되지 않을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애굽의 관습들에 동화 될 것인지, 애굽 사람들이 부는 피리소리에 우리가 뛰며 춤을 추며 온갖 수고를 다 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출애굽기 1장에는 비록 애굽에서 살지만 –애굽사람들이 된다든가, 애굽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이 있었지만-  애굽사람이 되지 않았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두 용감했던 여인들 십브라와 부아로서, 히브리 산파들이었으며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거절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바로와 함께 행하기를 거절했으며 오히려 그의 계획을 방해 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어떤 주석자들은 이 여인들이 거짓을 저질렀다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인 어떤 규정이나 규칙은 중요성에 따라 어떤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유대 지혜서에 따르면 어떤 것이 생명과 관계되는 한, 예를들어 어떤 명령이 살인이나 간음이나 하나님께 대한 모독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그 명령이 어떠한 명령이든지 거부 할 수 있었습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17)

그들은 “남자다운” 행동을 행하고자 결단 하였습니다.(그러나 그들은 두 여인이었으므로 우리는 “여성스러운” 이란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체코어에서 “여성스러운” 이란 말은 다른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마 나약한 이라는-

아무튼 이스라엘의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용기 있는 방해 행동을 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합시다:  십브라와 부아는 용기있는 행동을 결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 한인 예배 (2004년 01월 10일)
  • 창 3:1-11
  • 설교자: 이종실
  • 참고: 교회창립기념주일

2004-01-10 교회창립 기념예배
본문: 창세기 3: 1-11
제목: 믿음의 사람들

<본문>
1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2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3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설교>
오늘 이 본문은 4년전인 2000년 1월 둘째주일(9일)에 이곳에서 한인들이 매주 교회로 모이는 첫번째 예배에서 <인간 아브람과 믿음>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였던 바로 그 본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갈등으로 서로 자기 갈 길로 헤어지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면서 저는 교회로 모인 교우들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믿음을 가졌는가?”

프라하에 유일했던 한인 교회, 1994년 나의 첫 사랑 나의 첫 목회지 프라하 한인교회, 불과 짧은 일년의 목회기간 이었지만 무려 일곱분의 교우들이 학습과 세례를 받았던 몹시도 뜨겁게 신앙의 길을 갈구했던 프라하 한인 교회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을 성령의 일을 위해 안타까움과 아쉬움으로 자신의 목회자들을 목회로부터 자유롭게 했던 안디옥 교회처럼 부족한 종을 체코교회에 보내준 그 교회, 그때 그 사랑을 잊지 못해 프라하를 떠나 한국에 가서도 또 다른 나라로 스페인으로 홍콩으로 근무지를 옮길 때 마다 저와 프라하 한인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때로는 헌금으로 마음을 함께 나누던 그 교회 교우들, 그들의 사랑이 지금까지 있기에 그들이 함께 모여 이루었던 프라하 한인 교회를 위한 남모를 애정과 책임을 더 크게 느끼고 살았습니다.

그 애정과 책임은 인간의 단순한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교회를 더 올바르게 섬겨 받들어야 겠다는 목회자의 순수한 책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가 오랫동안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 체코의 한인 사회의 비웃음이 극에 달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질문을 프라하의 기독교 한인들에게 던졌습니다.

저는 첫주일 첫번째 설교에서 오늘 본문을 가지고 지금의 프라하 한인교회와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가 누가 아브라함이고 누가 롯인가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이 갈림의 선택에서 저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든 프라하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믿음을 가졌는가?”

이 질문은 곧 하나님의 약속 즉 교회를 신뢰하는 신자의 자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교회는 단순한 서클이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정말 믿음을 가졌다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에게 던진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해야하는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 말씀을 믿는 다면 우리는 롯의 눈에 보인 인간적인 모든 조건들을 양보하고 버리야 합니다.

바로 이 버림에서 나의 첫 사랑 첫 목회지 프라하 한인 교회는 프라하 꼬빌리시 야곱의 사다리교회에서 새롭게 출발하게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교회답지 못했던 모든 모습을 자복하는 회개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2000년 2001년 2002년 2003년 저의 설교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고집스럽고 허물이 많은 존재들인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객관적으로 알자,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신앙의 눈이 열린다. 그 신앙의 눈으로 우리의 이웃과 세상을 한번 바라보자. 그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감격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숨은 봉사의 삶을 하게 되고 그 입술의 말은 부드럽고 온화하여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말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4년 동안 끊임없이 이 강단에서 흘러나온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신앙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신앙의 생활 목표로 삼았습니다.

2001년인가 2002년인가 정확히 기억을 못하지만 한번 지금 프라하 한인교회의 박상욱 목사님이 만나자는 요청이 있어 홍콩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한적이 있습니다.
그때 진심으로 박목사님께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가 나뉘어지는 것도 어렵지만 다시 만나는 것도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박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듯이 박목사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를 테니 우리가 목회를 통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마음을 비운 하나님의 종들인지 서로 보여주고 그리고 교우들을 신실하게 잘 목회하면 자연스럽게 좋은 기회들이 오지 않겠습니까?”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그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위대한 신앙인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처럼 치졸하고 야비한 인간이 없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과 2절을 함께 읽어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사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지시할 땅>이 어딥니까?
당시에 지도도 없는데 창세기 12장에 지명 이름이 자세히 나옵니다.
우선 4절부터 7절 상반절까지 함께 읽어 보십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이 본문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미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12장 10절을 보시면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지시한 땅,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 가나안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고 해서 그 약속의 땅을 버리고 인간의 땅, 우상의 땅 애굽으로 갔습니다.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도 믿음의 조상이란 별명을 갖는 사람이면 굶어 죽어도 그 땅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브람도 먹을게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이고 뭐고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우리들에게 위로가 됩니까?)

하나님의 땅에는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고 인간의 땅 저주의 땅 애굽은 먹거리가 풍족합니다.
인간사의 아이러니입니다.
그 먹거리를 좇아 애굽에 간 아브람이 수치를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람의 인간 됨됨이가 밑바닥까지 만천하에 공개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집트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아브람은 거대한 권력을 쥔 바로 앞에 자신이 무방비 상태임을 깨닫고, 살아남기 위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14절에 따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매우 미인이었습니다.
자기 살자고 예쁜 아내를 권력자 바로에게 팔아 넘긴 것입니다.
16절에 보시면 바로가 아브람이 누이로 속인 아내 사래를 취하는 대가로 아브람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주었습니다.
집을 사기 위해 남편과 합의 하에 부인이 매춘을 한 사건이 제가 체코에 온지 얼마 안되어 체코사회를 떠들썩 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사람입니다.
자신의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물 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음을 받는 아브라함도 이런 사람인데 하물며 저와 여러분 그리고 프라하의 한인 기독교인들이 인간적인 면에서 아브라함 보다도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들이 우리들이라고 그 누구의 우리도 그렇게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12장에서 먹거리를 위해 약속의 땅도 팽개치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내까지도 팔 생각했던 이기적인 아브라함이 오늘 본문 13장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여 애굽의 바로로부터 얻은 막대한 재산이 늘어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재산을 가지고 네겝으로 올라 갔습니다.
그의 조카 롯도 그와 함께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네겝에서 얼마 살지 않고 그곳을 떠나,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베델 부근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의 베델과 아이 사이에 있는 아브라함이 예전에 장막을 치고 살던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다니던 롯에게도 그의 몫의 양 떼와 소 떼와 장막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 너무 좁았습니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 함께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가끔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때에 그들 주변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적대적인 이방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 조카 롯과 갈등 가운데서 지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불러 그들은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고 했습니다.

12장에서 보여준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전혀달라 당황스럽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12장과 13장의 아브라함의 너무 다른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만약 12장의 아브라함의 인간된 모습이 선입견으로 우리의 기억을 붙잡고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파렴치한 모습을 가진 한 인간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언제나 굴곡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성경은 실망하지 않고 그 변화를 끝까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백일흔다섯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아브라함의 모습을 끝까지 추적합니다.
그의 죽음이 창세기 25장에 나오는데 24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제 나이가 많은 노인이 되었다. 주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는 일마다, (그의 마음에 들어) 복을 주셨다.”(1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의 아비 친척집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인간됨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보았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전도서 7장 14절 말씀처럼 “형통한 날에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 전에 자기 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지만 어려움을 겪을 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다시말씀드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움이 어디서 왔는지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그 회복을 간구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2장의 아브라함의 모습이 13장의 아브라함의 모습으로 바뀐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증거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다고 우리는 신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정에 이끌려 살 때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희망인 인간 안에 있는 믿음의 씨앗을 봅니다.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 우리 한인공동체의 4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지난 4년 동안 우리들 자신들이 바로 믿음의 증거를 보여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완고한 고집대로 살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마다 우리는 믿음이 있기에 생각을 하였고 그래서 그때마다 궤도를 수정하면서 회개하면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우리들만의 믿음의 잔치가 민족의 경계를 넘어갔습니다.
또 다른 고귀한 믿음, 또 다른 신앙의 열정의 모습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행사와 친교에 많이 사용되던 교회의 예산이 연약한 형제들이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쓰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운동을 가로막는 교회의 조직들을 과감히 없애고 변화시켜 초대교회의 성령 공동체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더구나 다른 이민사회와 비교해서 체류기간이 짧고 유동성이 강한 체코의 한인사회의 특수성안에서 일반 조직 교회의 형태의 한인교회는 체코 한인사회의 특수성을 감당할 수 없고 오히려 복음의 운동으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치명적으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저희들은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철저하게 복음이 운동하는 교회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목회자인 제 자신이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일을 섬겨 받드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보의 앞면이나 뒷면에 대문짝만하게 담임목사 이종실 이란 인쇄를 한번도 하지않았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으로 오직 섬기는 자의 모습을 가지기 위해 여러분과 구별되는 목회자 가운을 입지않았습니다.
그리고 강단의 앞 자리에 앉지않았습니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저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양들인 여러분 교우들 앞에서 제 자신이 누구인가를 스스로 늘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로부터 받는 생활비는 곧 우리 꼬빌리시 교회 한인공동체 여러분들의 헌금이라 여겨 이중으로 생활비를 받지않았습니다.
선교사의 물질과 시간과 경험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함께 공유해야 된다는 것이 저의 신앙의 신념이며 고백입니다.
제가 고백하는 한인 교회는 체코의 한국인 기독교인들이라면 이단을 제외하고 믿음을 따라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함께 받들어 섬기려는 모든 이들의 모임입니다.
철저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중심과 믿음의 고백을 어여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선교사님 세 가정을 보내주시고 함께 교회로 모이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교회적으로만 아니라 우리 개인들의 신앙모습으로도 지난 4년간 믿음의 증거들이 나타났습니다.
교우들 사이에 다툼과 분쟁이 서서히 줄어들었습니다.
교회 일로 날카롭게 감정이 대립되는 교우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교회 일을 자제시키고 심지어 금하기 까지 했습니다.
성도들 간의 교제보다도 그리고 교회일 보다도 우선되는 것이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교회 일을 서로 미루고, 피할 수 없는 교회 일에는 가급적 쉬운 일을 서로 선택하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이제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서로 맡아 하려고 하고 설거지 일에 언제나 빠지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저의 눈에는 언제나 눈물이 맺힙니다.
신앙은 크고 위대하고 폼나는 일로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늘지고 어두운 곳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그곳에서 빛으로 나타납니다.
교우들 사이의 언어도 많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가시박히고 가시돋힌 말들은 제 귀에 들을 수 없습니다.
걱정과 염려와 애정과 사랑이 담긴 말들이 들립니다.

개인의 신앙생활의 언어들도 달라졌습니다.
영적교만에 찬 말들은 사라지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고백을 합니다.
털어놓기 어려운 마음의 고민들을 서로 나누는 참된 성도의 영적교제가 나타납니다.
중보기도반 모임을 처음 가졌습니다.
한 집사님이 고백을 하였습니다.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남편의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영혼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남편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 집사님 처럼 우리 교우들의 신앙생활의 언어는 영적교만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대한 고백입니다.
집사님들의 공중예배 기도의 내용도 달라졌습니다.
목사의 설교를 담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목사의 설교가 이제 교인들의 삶에 조금씩 뿌리를 내려가는 증거입니다.
말씀으로 하나되는 교회의 징후들입니다.
선교사님들의 성경공부가 우리 교회의 말씀의 큰 불을 일으킬 줄 믿습니다.

지난 4년 동안 묵묵히 우리들이 신앙에 정진한 결과가 신앙의 큰 성숙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파렴치한 아브라함을 본 것이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믿음의 아브라함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바라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도 나이 50이 다되어 가지만 아직도 미성숙한 부분이 많은 사람입니다.
완전한 목사의 기준으로 저를 보시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이종실 목사는 날이 갈수록 더 성숙해진다는 칭찬을 여러분들로부터 받고싶습니다.
부족한 면을 꾸짖고 비판하지 마시고 부족한 면을 고치려는 노력과 그래서 더 좋아지는 그 모습을 칭찬해주고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주홍글씨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 입니다.
한번 실수한 이야기는 단물이 다 빠질 때까지 돌려가며 씹습니다.
그리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벽에다 붙여 났다가 생각나면 다시 떼어서 입에 넣고 씹습니다.
한번실수가 그 사람의 본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실수로 하나님이 계획하는 그 사람의 미래까지 판단해 버리는 그런 잘못을 해외생활에서 범하기 쉽습니다.

최소한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의 한인교우들 여러분들 만큼이라도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없앨려고 노력하십시다.
그리고 그 사람의 변화될 미래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해줍시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여러분,
결국 유황불로 심판을 받게될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룻의 교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이익을 더 추구하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그 나라와 그 의입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들으리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
우리의 삶의 원칙은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우리는 돈으로 안되고 우리의 힘으로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내년 이맘에 다시 교회창립 기념예배를 드릴 때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 모든 것을 더 받는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의 증거를 간증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소식 이후의 예수님

  • 한인 예배 (2003년 12월 28일)
  • 마 2:13-23
  • 설교자: 다빗 유레흐

031228

본문: 마태복음 2:13-23

제목: 성탄소식 이후의 예수님

<본문>

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설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제가 믿는 루터교 전통은 카톨릭 전통과 똑같이 교회력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해의 모든 주일과 기독교 기념일이 구체적인 성경 본문 말씀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강단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거나 예배 때에 설교가 되어집니다. 

교회력에 따라 예배와 강단을 만든 사람들에게는 2가지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성경 말씀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그 본문 말씀이 전체 교회 연도 안에 조화롭게(균등하게) 할당이 되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두번째는 그러한 모든 성경 본문이 하나님에 관한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예배 참석자들을 복음 전도로 부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스웨덴 루터교회의 예배와 강단에 따라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성경 본문 안에는 우리를 위한 메시지가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오늘 우리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유대 땅은 헤롯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날 거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헤롯은 태어난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 유대 땅의 왕이었던 헤롯은 그 누구도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거나, 그의 자리를 요구하지 못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 베들레헴에 태어난 두 살 아래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행했습니다. 헤롯의 명령에 따라 모든 사내아이들이 죽음을 당했으며,  그 대 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아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의 대 학살의 명령이 떨어지기 바로 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였고, 마리아와 아기예수를 데리고 안전한 때가 올 때까지 애굽으로 피신해 있으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주의 사자는 헤롯이 계획했던 위험이 닥치기 전에 요셉에게 미리 경고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때가 밤이었지만  곧바로 일어나서 예수님과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요셉은 헤롯왕이 죽을 때까지, 주의 사자가 다시 꿈에 나타나 안전한 때가 와서 예수님과 마리아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갈 것을 말해줄 때까지  애굽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다시 주의 사자가 말하는 그대로 행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했으며, 하나님을 믿고 그 분 안에 자신의 인생을 세워 나갔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첫눈에 보기에 그렇게 재미있거나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는지를 묘사한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이야기에는 우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잠시 살펴봐야 하는 몇가지 재미있는 연관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오늘 본문 말씀과 관련되는 이야기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꼬빌리시 교회 이름의 일부이기도 한 야곱의 아들 요셉도 오늘 본문 말씀의 요셉 처럼 애굽으로 가게 되는 우연의 일치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자신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형들은 요셉을 없애버리려고까지 했습니다 .

그러나 요셉을 죽인다는 것은 너무했는지 형들은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신앙심과 올바름으로 애굽 제국에서 파라오 다음으로 높은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의 친척들이 그를 따라 애굽으로 이사해 왔으며, 그렇게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에는 존경 받는 손님이었지만  요셉이 죽은 후에는 애굽 사람들과 동등한 백성이 되었고, 그리고 결국 끝에가서는 애굽 사람들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파라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을 다스리게 될까봐 겁을 먹었고, 자신의 권력과 자리를 뺏기게 될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딸 덕분에 히브리의 한 사내아이가 살아 남게 되었습니다. 파라오의 딸은 강물 속에 떠내려가는 그 사내아이를 불쌍히 여겨 건져주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모세 였고, 그 이름의 뜻은 „건져낸다“ 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자유의 삶으로  „ 건져냈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자 마자 죽어야 할 운명이었던 아이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으로 자신의 민족을 인도해 냄으로 그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생활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자유의 사람들이 되는 이스라엘 전환기 역사 속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이 이야기들의 유사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의 요셉이 본의 아니게 애굽으로 가게 된 것처럼, 신약의 요셉 또한 유대 땅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되어 애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통치자가 예수님과 모세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거라는 생각에 그들을 죽이려 했을 때, 예수님은 물론 모세도 그 죽음의 위협 바로 앞에서 피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냄으로 그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 죽음을 이겨내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 속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던 두 아이들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해 낸 다음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바로 앞에 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과 모세의 죽음의 때와 장소를 결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 일개 세상의 통치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모세는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했을 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둘 다 자신의 이웃을 위해 죽었으며, 그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을 헌신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과 삶과 그리고 바로 자기 자신을 주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승리하며 탈출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애굽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하셨습니다.

이것은 상징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자신의 복음서 첫부분에서 부터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보호아래 애굽으로 피신 할 수 밖에 없었던 연약한 아기 예수님이 결국 모든 인류를 노예생활로부터 자유로 구원해 내시는 예수님이 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예수님의 귀환은 아직 어린 아이였지만 앞으로 행하게 될 위대한 행적(사역)을 미리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

그리고 정말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생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무엇에 인생의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노예뿐 아니라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빠지게 되는 여러 우상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그 노예생활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구할 수 없는 크리스마스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위한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의 진정한 삶을 위해 쓰도록 자신의 길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마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제자들 입니다.

예수님의 선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각자 개인 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 선물이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포장도 풀려 있고, 다만 우리가 받아들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에 성경과  그밖의 기독교 관련 역사를 배우는 그룹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어쩌면 어떤 분들에게는 그러한 모임들이 겨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나 초대 교회의 역사 또는 유럽 교회 역사에 대한 부분적인
정보를 얻게되는 시간으로만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귀한 시간을 내기에 불필요하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도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첫인상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분명하게 보여주듯 전체 66권의 성경말씀은
서로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정보차원이 아닌 우리가 알아야 하는 내용들이 모자이크처럼 연결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아는 지식은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과 인생의 폭을 더욱 깊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치없게 느껴지는 시간도 결국 의미있는 쇼핑이 가져다 주는 이익과 같이 뭔가를 얻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행적도 예수님이 태어나자 마자 행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대중 앞에서 그 사명을 실천하시기 까지  3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아마 자신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다고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획하신 시간은 다가왔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오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설교후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하늘이 열리고 그 하늘로부터 구세주 탄생에 대한 기쁜 소식이 울려 퍼졌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귀한 선물에 대해,  죄 사하심과 구원의 사랑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사랑의 비밀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아기 예수님 안에 우리의 구원자시며 모든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우리의 인생으로 그분을 섬기며 따라갈 수 있도록,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살아있는 믿음으로 채워 주시옵소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어둠까지 비춰주는 구원의 빛과 새로운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와 화해, 그리고 기쁨을 가져 오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처럼 기뻐할 수 없는 병들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어린이들과 청년들, 노인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세상의 버려지고, 슬프고, 경직되고, 절망적인 곳에 당신의 빛을 비춰주시옵소서. 용기를 잃은 사람들에겐 격려를 주시고,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새로운 희망으로 채워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진리와 사랑, 은혜의 빛이 이 세상 모든 곳에 비춰지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진실된 기쁨 속에
„ 주님께는 영광, 땅에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선함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이 기쁜 날들을 주님께서 친히
축복해 주시옵소서.  아멘

시므온의 꿈

  • 한인 예배 (2003년 12월 21일)
  • 눅 2:25-35
  • 설교자: 이종실

031221(대강절 네번째주일)

시므온의 꿈

누가복음 2: 25-35

<본문>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설교>

사람들 누구에게나 꿈이 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꿈이 있습니다.

꿈은 한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민족 공동체에도 꿈이 있습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죽은 백성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고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우리 체코의 한국민 공동체는 어떤 꿈이 있습니까?

하루 하루 사는 일도 급급해서 그런 꿈 꾼다는 것이 사치입니까?

사업을 하는 분들은 돈을 많이 버는 꿈,

예술을 하는 분들은 좋은 작품을 남기는 꿈,

공부를 하는 분들은 좋은 학교에 진학하거나 논문을 완성하는 꿈,

저와 같은 목회자는 큰 교회를 이루어 보려는 꿈,

자기를 실현해보이고 그로 인해 인정을 받고싶은 현실적인 꿈들이 누구나 다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신의 꿈을 실현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는 꿈은 실현했을 때 보다 실현해 가는 과정이 더 좋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일단 꿈을 실현하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공허함이라고 합니다.

내가 이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불철주야 애를 썼던가?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길래 이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노심초사 했는가?

자문자답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꾸는 꿈들은 참된 꿈이 아니라 욕망을 꿈꾸기때문입니다.

산마루턱에 올라가면 아래에서 보이지 않던 더 높은 산마루턱이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이 욕망은 이루고 나면 충족과 희열감이 아니라 더 크고 높은 욕망이 기다립니다.

욕망을 꿈꾸면 우리는 계속 목이 마릅니다.

매우 깊은 우물에서 간신히 한 두레박 물을 길러올려 목을 적시고 나면 또 다시 우리는 두레박을 깊은 우물로 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삶의 여정은 마치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다가 적당히 좌절하거나 자신과 타협을 하고 말게 됩니다.

신기루를 꿈꾸며 아까운 우리의 인생의 시간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꿈꿔야 할 그 꿈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충족하게 하고 기쁨에 넘치게 하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꿈은 마치 사랑과 같습니다.

줄리엣과 로미오가 사랑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듯이 우리의 꿈의 그 대상을 바로 찾아야 목마름의 긴 여정이 끝이 납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어느 민족 보다 일찍이 민족 공동체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민족적 수난에서 그들을 결속시켜주고, 그들의 동질성을 상실하지 않게 한 근본 원동력이 바로 그러한 민족적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꿈은 메시아에 대한 꿈이 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메시아에 대한 꿈은 매우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꿈이 특별히 바벨론 포로와 같은 민족적 수난 시기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곤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언자들은 자기 백성들이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을 때 이 메시아에 대한 꿈을 더욱더 강하게 상기시켜 주곤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메시아에 대한 꿈은 그들 자신의 생의 목적이며, 그들의 존재 의미며, 그들의 운명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꿈은 그들이 살아야 할 이유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민족 공동체의 꿈이 한 개인의 생애에서 실현되는 것을 목격하고 경험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옛날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이스라엘 민족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던 메시아의 때를 개인적으로 간절히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의 삶의 의미, 목적이 모두 메시아에 대한 꿈에 집약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노년을 맞이해서도 건강을 유지해 가면서 살았던 것도 그러한 간절한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가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는 그 메시아를 그의 생전에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시므온이 평생 살아온 삶의 이유, 그의 삶의 실현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위로의 시간이었습니다.

시므온에게 그 때는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야 했던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어느 날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 가운데서 성전에 들어갔을 때 마침 마리아와 요셉이 유대 전통에 따라 아기를 주께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성전에 들어왔습니다.

전통적인 유대법에 의하면 모든 남자 아기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그 아기가 장남일 경우에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예식으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율법에 정한대로 행하기 위해서 성전안으로 들어 왔을 때 시므온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로 한 여인의 품에 있는 아기가 그가 그 때까지 기다려 오던 바로 그 주인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시므온은 만났습니다.

그는 드디어 그의 생의 실현의 때를 맞이했습니다.

시므온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실현의 순간에 경험한 것은 공허, 허탈감이 아니었습니다.

충만, 환희, 기쁨이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그의 마음 깊은 곳에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시므온은 아기를 그의 팔에 받아서 안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님, 이제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이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것은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그 아기의 미래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도록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을 받는
표징으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꿰뚫을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품은 생각들을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이 아기로 인하여 다가올 요동칠 역사입니다.

이 아기가 장차 자라서 그가 한 역사적 인물로 그에게 부과된 그의 사명을 수행해갈 때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우 무관심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그가 미쳤다거나, 귀신들렸다며 냉소적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유대 전통사회 질서를 교란 시키고 파괴한다하여 적대시 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시므온과 같이 평생 추구하고, 갈망해오던 자신의 생의 꿈의 실현자로 맞아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 아기 예수를 시므온과 같이 자신이 기다려 오고 있던 바로 그 사람으로 맞아들일 때 그의 생애에는 매우 중대한 전환점이 생깁니다.

예수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의 글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두 손으로 햇빛을 가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가에 서 있는 사람은 건물 돌출부로 인해 시야가 막혀 있으므로 밖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 이 천년이 지난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창가에 서있는 사람과 다르지 않은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연발하는 감탄사를 듣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와 복음서가 파생시킨 수 많은 책들과 몸짓과 언어를 연구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목을 길게 빼고 들여 다 보아도 육신을 입고 살았던 예수 그분 자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너무
피상적인 것들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읽어갈 때 그러한 느낌을 받습니다.

시므온이 무엇을 보았길래 무엇을 경험했길래 저렇게 환희와 기쁨에 차 있을까?

도대체 그가 안고 있는 아기는 누구인가?

그가 점쟁이도 아닌데 어떻게 그 아기의 운명에 대해 예언할 수 있는가?

그가 만난 아기 예수는 도대체 나와 나의 운명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역시 창가에 서서 목을 길게 내빼고 거리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그러한 질문에 대해 하나의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소리지르며 환호하는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우리가 목마르게 찾고, 갈망해 오고 있는 바로 그분입니다.

우리의 꿈의 내용의 실재자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참된 행복과 인생의 충족감을 느끼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비로서 피곤하고 고달픈 방황의 생을 끝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가 처리하지 못한 복잡한 지난 날의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가 되어가야 할 참 인간의 길을 발견해 가게 됩니다.

그 분은 나의 구주, 나의 생명, 나의 미래, 나의 희망입니다.

교인이 된 사람과 신자가 아닌 친구가 만나 함께 나눈 대화입니다.

“그래, 자네 교회 나간다면서?”

“그렇다네.”

“그럼 예수에 관해서 많이 알겠군. 어디 좀 들어보세, 예수는 어디서 태어났지?”

“모르겠는걸.”

“몇 살 때 죽었지?”

“몰라.”

“설교는 몇 차례나 했나?”

“모르지 뭐.”

“아니 교인이 되었다고 하고선 예수에 관해 아는게 없잖아!”

“자네 말이 맞아. 아닌게 아니라 난 아는게 없어서 부끄럽네. 하지만 삼년 전 난 주정뱅이요 빚도 많았고, 내 가정은
산산조각이 돼가고 있었지. 저녁마다 처자식들은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걸 무서워했지. 그러나 이젠 술도 끊었고 빚도 갚았고, 우리
가정은 화목해 졌네. 저녁마다 아이들은 나를 목이 빠져라고 기다리게 되었거든. 이러한 나의 변화를 통해 나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네. 이것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꿈꾸고 시므온이 꿈 꾼 그를 만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것과 새것의 분기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야 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눈 앞의 현실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 해외에서 일년 이년 자기 정체성을 보살피지 않고 살아가면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허무와 지나간 시간들 뿐일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의 허무함을 감추어 보려고 허세를 부리고 과도하게 자기를 드러내어 결국 많은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자기상실, 방황, 무기력함이라는 인생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시므온 처럼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리고 만나는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는 영적 노력을 해야 합니다.

2003년 12월 25일은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분하는 인생의 큰 분수령이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