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빗 유레흐 교역자 청빙

한인 공동체 교우 목회 돌봄(체코사회에 필요한), 유학생 성경공부와 활동, 이종실 목사의 목회와 선교사역 협력, 체코 청소년과 체코의 소수민족을 위한 신앙잡지 발간을 위해 체코 교역자 다빗 유레흐를 우리 교회가 전도사님으로 모시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빗 유레흐는 27세이며 슬로바키아 루터교회 소속이며 까렐대학 개혁신학부를 졸업하였습니다.

일꾼을 발굴하고 지원하여 그들이 일할 수 있도록 돕는것은 선교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우리들과 함께 지내면서 한국교회의 목회와 선교정신을 배워 훌륭한 주의 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우들의 기도와 관심이 있어야 할것입니다.

정미현 목사님 주일 설교

오늘(4월 14일)설교해 주신 정미현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미현 목사님은 한국기독교 장로회 목사님이시며
바젤에서 공부를 하시고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에서 가르치시며
현재 금년 8월까지 스위스 개혁교회의 초청으로
스위스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스승이신 세계적인 체코신학자 로흐만 교수님의 80회 생신축하 기념강연회에 초청을 받아 오셔서 저희교회가 목사님을 모시게되었습니다.

좋은 말씀 들려주시고 교제를 나누어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4월 운영위원회

4월 운영위원회 회의결과를 알려드립니다

1)4월 7일 13시 30분 지하식당에서 (직책생략, 무순) 송종식, 강동주, 권영봉, 안정숙, 김만석, 이종실 (노윤택) 위원들이 참석.

2)중고등부 성경공부반 활동비 340꼬룬 청원(교육부 안건)은 허락하되 체코학생들도 초청하여 함께 활동하기를 권면하며 추가경비가 생기면 함께 지출하기로

3)5월 12일 어버이주일 야유회 예배를 작년과 같이 드리며 계획을 선교부가 맡기로

4)주방살림 물품구입(재정부 안건)은 월별 일괄 구입키로

5)6월 암창 찬송가 경연대회준비 점검

6)이종실 목사의 이름으로 은행구좌를 개설 매주 입금하고 헌금 보관이 불가피한 경우를 위한 금고 구입(재정부)

7)김성래 교우 격려금 15,000꼬룬 추인(재정부)

8)한인 공동체 교우 목회 돌봄(체코사회에 필요한), 유학생 성경공부와 활동, 이종실 목사의 목회와 선교사역 협력, 체코 청소년과 체코의 소수민족을 위한 신앙잡지 발간을 위해 체코 목회자를 채용(목회자 안건)의 건은 허락하고 월 5,000꼬룬 지원키로.

끊임없는 희망

  • 한인 예배 (2002년 04월 14일)
  • 히 13:20-21
  • 설교자: 정미현

02.04.14 부활절후 두번째주일
설교자 정미현 목사
본문: 히브리서: 13: 20-21
제목: 끊임없는 희망
장소: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

<성경본문>
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설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케 하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아름다운 주일에 제 스승이신 로흐만(Lochman) 교수의 80회 생신 기념회가 있는 그 분의 고국에 올 수 있게 되었고 또 여러분과 함께 본문말씀을 나눌 수 있는 이러한 자리가 허락되어 감격스럽고, 감사하고 기쁩니다.


러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역사라는 단어는 영어로 history입니다. 미국 여성신학자들이 이 단어를 해석하는 것에 의하면 역사란
남성들의 이야기( he-story) 였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남성들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여성들의 이야기는 별로 언급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도 이와는 다르지가 않았습니다. 여성들도 교회안에서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하였고 헌신적으로 일하였으나 여성들의 이야기는 많이 전하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중세기에 살았던 한 여성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이 여성의 이름은 노르비취의 줄리안이며, 14세기 영국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에도 흑사병이 심하게 퍼져 있었고, 전쟁과 기아가 만연한 시기였습니다.
이로인하여 심한 절망감이 사람들 사이에 지배하였는데, 이러한 어려운 고난의 상황 속에서 줄리안은 신비주의적 은둔가로 영국의 노르비취 라는 곳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희망과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많이 전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1373년 5월에 그녀는 심한 병을 앓게 되고 난 뒤에 특별한 환상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 권의 책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첫 번 책은 짧고 간결한 반면에 두 번째 책은 자신의 체험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적고, 이를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두 권의 책 전체에 나오는 중요한 내용은 다름아닌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머니로 표현한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줄리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로운 어머니로 묘사하고, 이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설명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자궁 속에서 키워내고, 심한 고통가운데 출산하고 젖을 먹여 키우듯이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가 어머니와 같이 커다란 사랑으로 우리를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의 성서본문에도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중심에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초대교회 시기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태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상황가운데 이들이 신앙 안에서 굳건히 서도록 권면하는 글입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부활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로운 삶의 근거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에 대한 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더하여 줍니다.

우리가 격게되는 크고 작은 고난의 문제들에서 우리가 절망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희망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희망의 근원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고난과 악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믿음가운데 살 수 있고,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질 다가 올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희망하는 믿음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가 올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지금의 우리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매순간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지금의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서두르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다리며 서두르며!

이러한 기다림과 서두름의 긴장관계 속에서 줄리안은 그녀의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All schall be well. All manner schall be well.”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풀려 나갈 것입니다.

이 문장이 너무 낭만적으로 들리지는 않는지요?
그러나 이 문장은 전혀 낭만적이거나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희망을 가득 품고 있는 이 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잘 될 것이라는 뜻일까요?
이것은 한편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동을 촉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가운데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개인적, 사회적 악의 문제에 굴복하지 말고 고난의 상황을 이겨나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어딘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보태야 한다거나, 십자가를 대신 짊어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셨고 그분의 십자가의 사건은 유일회적이며 온 시간 속에 펴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한 제물이 될 수 없고, 단지 희생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옛 존재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가까이 있는 또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하며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가운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고난의 상황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며, 서로 서로 희망을 불러넣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을 줄리안은 살았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전쟁과 가난과 질병이 만연한 시기에 주변에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안하였고 삶의 용기를 불러 넣어 주었습니다.
이 말은 결코 값싼 심리적 위안의 말이 아닙니다.
저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 말을 되내이곤 하는데 그러면 새 힘을 얻곤 합니다.
물론 이 말이 어떤 주술적 힘을 지닌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우리도 바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말을 단지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의 상황에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세상의 삶 가운데에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고난의 상황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 상황 가운데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희망한다는 것은 항상 중요하고도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싸구려의 희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적인 용어를 써서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도래한다는 것에 대한 희망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발을 디디고 계신 바로 이 나라는 체코의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의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을 고백하며 악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였기 때문에 산 채로 화형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용기 있는 믿음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후스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궁극적 희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설교 본문말씀에 기록되어 있듯이 영원한 언약의 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로 이끄신 하나님은 우리를 어떠한 순간에라도 어려움 가운데 내버려 두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상황으로부터 우리가 빗겨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려움과 고난은 항상 우리 삶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은 나락속으로 떨어진다 할 지라도 우리는 걱정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스스로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나락으로 떨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손은 우리를 붙들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그분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끊임없는 희망과 믿음 가운데 어떠한 순간에도 절망함 없이 이국 땅에서의 여러분들의 삶이 날마다 더욱 풍요로와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믿는 자가 되라

  • 연합 예배 (2002년 04월 07일)
  • 요 20:19-31
  • 설교자: 이종실

02년 04월 07일 (부활주일)
설교본문: 요한복음 20장 19-31절
설교제목: 믿는 자가 되라

<본문>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설교>

우리들은 “의심 많은 도마”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도마는 예수가 부활 후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주를 본 것을 그에게 말했을 때 ”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도마는 예수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한 주일 후 제자들은 함께 다시 모였을 때 이때 도마는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갑자기 예수가 나타나 도마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의심 많은 도마 이야기의 난해한 부분입니다.
예수가 도마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준 후 그는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믿지않은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여기서 체코어 성경 번역과 한국어 성경번역에 차이점을 발견할 수있습니다.
체코어로 Nepochybuj a ver! (직역하면 의심하지 말라, 그리고 믿어라!)
한국어 성경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말씀을 직접 체코어로 바꾸어 보면 (Nestan se nevericim, ale vericim.)

제 생각에 의심 많은 도마는 헬라어 본문의 잘못된 오역입니다.
의심하는 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무언가 잘못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해 질문이 많다는 것은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과 같고 반신반의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믿음에 대한 설명은 어느날 도움을 위해 예수에게 온 어떤 사람의 말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에게 말했습니다. ”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개역한글판 막 9:24)”
믿는 것과 아직 믿음 없음이 동시에 가능합니다.
믿음 없음은 믿음의 진실함을 유지하는 믿음의 요인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자신의 책 믿음의 역동성에서 낡은 믿음은 죽어야 하고 믿지않은 것에 의해 먹혀 사라져야 새롭고 더 깊은 믿음이 탄생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예수는 도마에게 의심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에게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믿지않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우리가 아무리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관심은 우리의 믿음 없음이 주님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그늘지게 하지않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가 도마에게 나타나자 그가 즉시 믿게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마가 믿게 된 이유는 정확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를 보는 것이 그가 믿게 된 이유라는 주장도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상처를 직접 보고 예수가 도마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확신한 도마는 그를 믿게 됩니다

도마가 제자들의 친교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주장도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그들 모두가 믿었다면 그 역시 믿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그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도마가 믿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는 무언가 불충분하게 느껴집니다.
진짜 대답은 그 본문 그 자체에 있습니다.
도마가 있지않았을 때 예수가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숨을 쉬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버지는 나를 보냈고 나는 너희들을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말씀하셨습니다.
도마가 믿게 된 이유가 이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들이 성령에 의해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도록 보냄을 받게 될 것이라는 명령과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증언에서 성령은 도마에게 믿음의 씨앗을 심었고 다음 일요일에 그 씨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도마가 믿게 된 이유는 성령이 다른 제자들의 인간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에게 믿음을 창조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의지와 의도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성령에 의해 만들어지 것이며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과 다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기독교 믿음을 잘못이해하고 있었다면 이 부활의 계절에 바른 믿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기 시작할 때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나의 힘으로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힘으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이 한마디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엄청난 고백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신것입니다.

우리의 간증, 우리의 기도, 우리의 예배와 성만찬, 우리의 모든 봉사가 믿음을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성령에 의해 창조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믿음을 버릴 수도 그리고 다시 생기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믿음을 창조하는 활동을 하시도록 두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주위에 다시 모여드는 시간이 아닙니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으로서 우리들에게 오시는 때입니다.

부활절은 우리들의 기운 빠진 믿음을 다시 기운 넘치게 하는 기회로 삼는 절기가 아닙니다.

부활절은 성령이 세상 안에서 믿음을 새롭게 하게하는 수단을 교회가 제공하는 때입니다.

부활절은 우리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우리의 의심을 버리는 절기가 아닙니다.

부활절은 성령이 우리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 믿음을 세우는  절기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