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의 삶의 스타일

  • 한인 예배 (2002년 02월 10일)
  • 마 7:15-20
  • 설교자: 이종실

02년 02월 10일 (주현 주일 후 다섯번째 주일)
본문: 마 7:15-20
제목: 우리교회의 삶의 스타일

<공동기도>
열매로 판단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려는 우리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의 열매 맺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설교>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지난 두주간
여러분들의 기도로 은혜가운데 한국교회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체코에 온지 만 8년이 되었고 그동안 몇차례 한국을 방문했지만
이번처럼 후원교회에 선교보고를 목적으로 다녀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번에 정릉교회 여러분들의 극진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1월 22일 12시 3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3시까지 종로5가 여전도 전국연합회 사무실로 직행해야 되는 저의
사정을 아신 정릉교회 김유철 목사님께서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시려는 계획을 바꾸어 여전도회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락교회 목양관에 저의 숙소를 마련해 주시고 방에는 환영 꽃다발과 두주간 동안 먹고도 남을 과일들과 음료수 그리고 다과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를 기억하시면서 한분 한분 안부를 여쭈어 보았습니다. 신양교회 이만규 목사님께서도 여러분들의 안부를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구촌 교회 동유럽 선교 방문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993년 체코로 처음 나올 때 저의
교단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지 않았습니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총회 선교부에서 4년이 넘도록 일한 사람이 교단 파송 없이 해외에
나가는 것을 많이 염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교단의 선교사 파송과 후원 업무를 만 4년을 봉사하면서 선교사로 파송 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마음 무거운 일인지 알게되었습니다.

이미 1987년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선교사로서의 삶에 대한
확신을 갖기위해 하나님과 씨름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파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의 이름으로
파송하도록 허락되는 날까지 하나님과 씨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파송을 받지않고 후원없이 1993년에 체코로 왔습니다.


나님의 파송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제 자신도 알지 못한 채  3년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1997년 체코교회와 한국교회의
선교협정체결로 체코교회 지도자와 한국을 방문했을 때 1996년 말에 여전도회 전국연합회가 저를 후원키로 결정을 하였다는 소식을
그때 처음 알게 되어 선교협정체결에 따라 선교사 인선과 훈련을 받고 파송을 받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
로 한국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해외선교는 교회 개척과 새로운 교인을 얻어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체코에서는 이러한 선교개념이
적용될 수 없다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미 천년이 넘는 교회의 역사에 개신교회의 출발지인 체코에서 전통적인 선교개념은
적용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선임 선교사가 없는 선교지에서 선교 정책을 세우는 일은 창의적인 예술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과 비교할 만큼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제가 세운 선교정책은 앞으로 체코교회역사와 한국교회역사에 기록되고 역사적인
평가를 받게 될것이며 그리고 앞으로 많은 후배 선교사들이 저의 선교정책을 이정표로 삼고 활동을 할 것을 생각하면 저의 책임이 매우
막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더 다듬고 더 시행착오를 거쳐야 되지만 어느 정도 “오픈 하우스” 라는 선교정책의 방향이 정해졌다고 생각되어 이번에 후원교회들을 방문해서 그것을 설명하고 하고 왔습니다.


국교회의 체코선교는 체코 개혁교도들의 종친회와 같은 폐쇄적인 예배공동체로서의 체코교회가 열린 공간을 갖도록 하고 동시에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적대적인 사회가 교회에 우호적인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실례로 프라하 꼬빌리시 교회
안에서의 한인 공동체가 갖는 의미 그리고 현재 기도중인 쁠젠의 꾸란두브 교회에서의 상담 프로그램 그리고 최근 문을 연 삐섹의
벨리바를 들었습니다.

특별히 삐섹 활동에 들어가는 재정지원을 위해 총회와 후원금 증액을 의논하였습니다. 지난 만
8년간 지속적으로 관계하는 20여개 교회들 가운데 10여개 교회들이 조만간 새로운 프로그램 발전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방문에 양 교단의 협력체계를 좀 더 조직화 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에 자문을 구하고 돌아왔습니다. 아울러 앞으로 저의
사역은 팀 사역이 되어야 하기에 동역자를 위해 널리 의논을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1993년도부터 지금까지 선교사로서의
저의 활동은 가시적인 선교프로그램 개발이 아니라 선교정책을 세우고 그에 따른 선교 베이스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 프로그램은 베이스가 구축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선교 베이스를 구축하는 일은 무척 외롭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이 가능한 것은 제일 가까이 저의 곁에 사랑하는 교우들의 기도와 이해와 동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언제나 저의 동역자로 여기며 여러분을 위한 목회도 저의 선교의 일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함께 교회 공동체로 형성하는 것은 많은 해외의 한인교회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체코 선교를 위한
하나의 모델로서의 한인 교회를 저와 여러분의 모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색은 저와 여러분들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선교 공동체였던 초대교회의 정신과 삶으로부터 철저히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되어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선교 공동체였습니다. 연약한 자를 존중하는 초대교회의 교훈을 따라 재직회라는 교회조직대신
모든 이들의 의견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가족 공동체라는 회의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경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삶의 장소였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심령들이 자신들의 것을 모두 내어놓고 함께 공동생활을 하며 모인 곳이
초대교회였습니다.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공동체적인 삶의 기본자세는 나눔과 섬김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나눔과 섬김의 삶을 통해 말씀을 배우고 기도를 하는 것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실천으로 교회를 섬기는 모든 봉사자들은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지않았습니다. 교회는 우리들이 봉헌한 하나님의 재물로 우리들끼리 주고 받는 선물을 사는 일을 자제하였습니다. 대신
우리들은 진심으로 봉사자들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마음으로 환영하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선물로 그 수고를
인정하는 것 보다 진심어린 마음으로 봉사자들의 수고를 감사하고 인정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임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누는 일을 미리 계획하기 위해 재정의 수입과 지출을 계획하는 예산 세우는 일을 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배우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나눔과 섬김의 노력과 함께 교회로 모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스타일은 첫째 자기 자신을 아는 생활로 그리고 정직하고 부드러운 언어생활로 마지막으로 숨은 봉사생활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체코선교를 위해 믿지않는 자들을 가르치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대신 초대교회를
따르는 삶을 숙고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선교는 조작과 선동과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변화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기독교 교육학자는 기독교를 “만남의 종교”라고 정의 했습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선교는 가르침이 아니라 만남을
통해 일어나는 복음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남을 통해서 삶에 질적인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와 동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 기독교인들입니다. “이제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신것이라.”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본보기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내 존재 영역 안에 들어와서 거기에 머무르고 거기에서 살고 그와 일체가 된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이
이어집니다. 이 만남을 우리는 선교의 장이라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중적인 선교의 장에서 살아 가고 있습니다.
체코사회와 한인사회 입니다. 이 이중적인 선교의 장은 저와 여러분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된 우리의 삶이 체코교회와 체코 한인사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각자 자기의 길을
가며 서로 교통하지 않고 접촉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날개 끝에서 반짝 반짝 비치는 불빛으로
야간 비행에 서로 부딪히지 않고 피해 지나가는 비행기와 같은 그러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 그리고 우리 교회의 삶은
그 자체가 이미 선교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좋은 누룩 좋은 소금 좋은 나무의 존재로의 변화가
곧 사회를 변화시키고 아름다운 결실을 가져오게 하는 선교 행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5절 앞 부분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이어 뒷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가?” 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 자신을 시험하는 방법으로 우리 교회의 라이프 스타일 – 자기 자신을 아는 생활, 정직하고 부드러운
언어생활, 숨은 봉사생활 – 이 나에게 우리 교회에게 있는가 자문하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우리의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반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가?”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우리 밖의 존재로 여길뿐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선포하고 무엇을 선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걸림돌이 되어
찍혀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아는 가? 나는 정직하고 부드러운 언어생활을 하는 가? 나는 숨은 봉사생활을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의 스타일입니다. 이 신앙인의 삶의 스타일이
하나님의 선교와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그리고 우리들의 우리 교회의 삶의 스타일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좋은 나무인지 늘 성찰하십시다.

<설교 후 기도>
주님의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우리를 선교적인 교회
공동체로 모이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다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들이 이땅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삶의 긴장이 식지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들의 열매로 우리들을 판단하시는 주님이 시오니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일에 더욱 힘쓰는 저희들로 삼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널리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바츨라프 클라우스의 말

나눔터 제 21 호 (2002/02/02 발간)

살며 생각하며 – 바츨라프 클라우스의 말

바츨라프 클라우스는 현재 체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41년 6월 19일 프라하에서 태어나 1963년 프라하 경제대학 국제무역학과를 졸업하였다. 공산당 통치 시절인 1966년에 이태리에서 그리고 1969년에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1970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아카데미 경제연구소에서 일하였다. 1971년부터 1986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은행에서 여러 직책을 거쳤다. 그의 학문적인 업적은 외국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고 찰스 대학과 출신 대학인 프라하 경제대학의 정교수로 임명될 정도로 뛰어난 경제학자이다. 1989년 과도정부시절에 재정부 장관이 되면서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1992년에 수상이 되었다. 현재 정권은 경쟁당인 사회민주당(CSSD)에게 내어주었지만 그의 당인 시민민주당(ODS)은 다수당으로 현재 그는 의회 의장직을 맡고있다.

요즘 그는 체코의 유명한 스키장이 있는 슈핀들 물리녜의 한 식당 지붕 위 빌보드 광고에 등장하였다. 거기서 클라우스는 Volkl 상표의 스키를 들고있고 그 아래 “뷜클 을 찍으십시오. (Volte Volkl)” 광고문구가 들어있다.

국내정치 지도자가 해외상표의 스키를 선전하는 것을 언론매체가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다. 이에 대해 클라우스의 답변은 기상천외하다. 그의 얼굴은 친구식당을 소개하기위해 친구를 바라 보고있고 자신이 사용하는 스키는 Head인데 뷜클 스키선전과 관련 짓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전문구가 광고사진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지 빌보드의 걸려있는 위치가 광고의 내용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며 클라우스의 답변에 국민들의 비난이 일고있다.

클라우스는 뷜클로부터 광고비용을 단 1꼬룬도 받지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아무도 믿지않는다. 바츨라프 클라우스의 이 말 같지 않은 뉴스거리 때문에 나눔터 독자들도 슈핀들 물리녜의 클라우스 친구 식당과 뷜클 표, 스키 그리고 Head 표 스키 이름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광고가 언론매체에 의해 논쟁이 일어난 것을 싫어하지 않는 클라우스는 “우리들은 선거운동을 위해 많은 돈을 제공하는데, 빌보드 하나가 이처럼 언론의 관심을 촉발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매우 가치가 있다. 언론매체는 뷜클 회사의 광고비 수주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최소 경비로 최대효과를 위한 이러한 사례를 계속 만들 것이다.” 약간의 콧소리가 더욱 감미로움을 더하는 특유의 미소에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평소에 바츨라프 클라우스의 경제학 서적을 언젠가 한번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하고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싹 달아났다. 말하나 곧게 할 줄 모르는 지식인의 글이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할 때 경직되는 것을 고쳐보려고 애쓰는 필자이기에 텔레비전에서 그를 볼 때 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격앙되지않고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말하는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 그러나 부드러운 말씨만으로 안 된다. 부드러운 말씨와 함께 말이 곧아야 한다. 부드러움을 가장한 정직하지 못한 말은 사기요 폭력이다.

말 같지 않는 소리 때문에 짧은 우리 인생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있는가? 가뜩이나 스트레스가 많은 이 해외에서 많지않은 우리 한인들 특별히 종교인들이 먼저 서로 부드럽고 정직하고 교양 있는 말들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이 새해에 가져본다. 말 같지 않은 소리하는 소리꾼들로 체코의 한인사회가 고통 받지 않도록 이 새해에 시인의 노래로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싶다.

“네 혀는 날카로운 면도날, 속임수의 명수로구나,
착한 일보다 악한 일을 더 즐기고
바른 소리보다 거짓말을 더 좋아하니
해치는 소리라면 모두 좋아하는 사기꾼아
하느님께서 너를 박살 내어
영영 없애 버리시리라.
장막에서 너를 끌어 내서
인간 세상에서 뿌리째 뽑아 버리시리라.”
(시편 52편 2-5절, 공동번역)

목사 이 종실( 나눔터 발간인 )
 

엔돌 여인의 만찬

  • 연합 예배 (2002년 02월 03일)
  • 삼상 28:4-25
  • 설교자: 이지 슈토렉

스물여섯번째 에큐메니칼 예배
본문:삼상 28:4-25
제목:엔돌 여인의 만찬


울은 이미 많은 전쟁을 치루었고 용감하게 싸울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두려움에 얼마나 무릎을 떨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울은 신앙인이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그를 부러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 가야하는지를 알았고 도움을
구하기 위해 변장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잠하십니다. 아무리 사울이 구하여도 하나님은 응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고, 하늘과 땅까지도 사울에게 침묵했습니다. 결국 저승만 남았습니다. 사울은 그래서
즉시로 신하들에게 명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그리고는 다른 옷을 입고 변장하여 먹을 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신하들과 함께 밤에 엔돌로 갔습니다.

전에는 그렇게도 열심히 핍박했던 것을 이제는 마지막 도움인양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로 하여금 이단과 종교악을 제거해 버리도록 한 은밀한 충돌질이 결국에는 자기 파멸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전체주의적인
경향의 사람들은 이러한 자기 파멸의 매혹으로 고통합니다. 가룟유다도 예수님을 최후의 전장까지 몰아부쳐서 승리의 왕국을 실현하고픈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교리의 하나님이나 한정적인 문제
해결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자유하며 거룩한 분이십니다.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이시요 헌신하는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인간에게 기회의 때요, 생명의 때입니다. 그러나 잠잠하실 때는 이미 때가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낮이요,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잠하실 때는 밤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것은 엔돌에 있는 여인에게는
목숨이 달려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여호와로 그 대단한 남자에게 맹세하였습니다. 그러자 사울의 신분이 드러났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미 공포였습니다. 저승에서 겉옷을 입은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사울은 그가 사무엘임을 알아 보았습니다. 사무엘이 말하길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사울은 이미 오래전에 들었는데 또 무슨 말을 듣고 싶었을까요? 저승에서
온 자에게 “죽으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왕이 그것도 몰랐을까요? 그만큼 돌이킬 수 업고 신성한
“죽어야 한다”는 것이 가룟 유다의 저주입니다. 사울은 비참히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모든 그의 화려함은 땅으로 엎드러지고
기력이 진하여 졌습니다. 저승세계를 보는데 익숙한 그 엔돌여인은 난처한 입장이지만 사울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인식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와 같은 공포는 없습니다. 이런 것은 단지 생명이 파멸에 이르거나, 삶의 비열함이나, 아무런
소망이 없을 때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돌의 그 신접한 여인은 경험에 기초한 기지를 발휘하여 어머니의
심정으로 말했습니다. “나로 왕의 앞에 떡 한 조각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사울은 죽음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엔돌의 그
침상에서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힘이 없어 가지 못했습니다. 그 엔돌 여인은 사울에게 마지막 예식을 베풀고 함께한
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차려 주었습니다. 최고의 죄수도 도움없이는 세상과 함께 떠날 수 없습니다. 사형수도 식사한끼 대접않고
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죽음의 마지막까지, 최후의 심판으로 가는 길에도 죄인을 위해 기력을 회복하라고 음식을 준비해
놓습니다. 죽어가는 자의 이마를 닦아주고, 살인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공포로 떠는 사람에게 다정한 포옹을, 악인에게는 선한
도움을, 원수에게는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성만찬이 우리로 하여금 일어나 계속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늘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어두운 이야기 중 하나를 읽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 가볍게 영벌의 고통을 맛본 사람이나, 단순한 죽음으로
괴롭힘을 당한 사람은 이 엔돌 여인의 행동을 같은 복음서의 다른 여인중에서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수정과 같은 귀한 자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겟세마네의 주님이 흘린 핏방울에서 사울을 봅니다 주님은 그의 죄를 최후에까지 담당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멘.

거룩한 향기름

  • 한인 예배 (2002년 01월 27일)
  • 출 30:22-33
  • 설교자: 온드제이 슈떼흘릭

02년 01월 27일
본문: 출애굽기 30:22-33 
제목: 거룩한 향기름
설교: 온드제이 슈떼흘릭 목사(리벤 교회 시무)
번역 및 통역: 정중명 집사

<공동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셨으나
저희 자신들만 은혜 안에 머무르는 삶의 유혹이 있습니다.
복음전파를 위해 헌신하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또 일러 가사사대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여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 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 오십 세겔과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대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
너는 그것으로 희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며 등대와 그 기구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내게 거룩한 관유니
사람의 몸에 붓지 말며 이 방법대로 이와 같은 것을 만들지 말라 이는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히 여기라
무릇 이와 같은 것을 만드는 자나 무릇 이것을 타인에게 붓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하라

<설교>

배의식의 지시사항들, 거룩한 제조공식들, 항목들의 상세한 기술, 예배의 의식의 안무 – 이것이 모세율법의 대다수 부분에 대한
우리들의 정확한 인상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소 우리와 관련이 없고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동 떨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집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잃어보면 아마 우리는 이러한 지시 사항들로 가득찬 장황한 인용절을 회상할 수 있습니다. 즉 성막이 어떤
방법으로 건축되어야 하며, 성막의 천막은 다른 동물 털의 정확한 혼합으로 짜야 하며(직조) 진설병의 상은 어떻게 만들어 지며,
등대는 어떻게 장식되어야 하며, 필요한 그릇들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며, 제사장은 어떻게 예복을 입어야 하며, 머리에 쓰는 관은
어떻게 쓰고  장식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기술 같은 것 입니다.

사실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의 본문 말씀은
항목, 기술, 절차, 모양, 비교등에 대한 긴 목록의 일부분입니다. 이 모든 것이 거리감이 있고 이상하고 어색하여 우리가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본문 말씀을 지나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하건 데, 성경은 사람들에게 말씀하기 위하여
기록되었고, 생각을 자극하기 위하여, 특히 믿음,사랑과 소망을 일깨우고자 기록하였습니다.

1. 소망
본문의
기술적 공업적인 인용절에는 사실 소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세부적인 기술, 절차, 모양의 서술이 바벨론 유수시절에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신학자들은 확신합니다. 즉, 기원전 600년 이후 약 50년 동안 유대인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시기입니다.
그들은 집과 예배하는 장소-성전을 잃어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약탈당했고 파괴되었으며, 연례행사는 없어졌고, 일상의 예배는
중단되었고, 제사장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그 당시는 절망의 시간이었고 동시에 커다란 소망의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시절 거기서 그들은 소망을 가지고 생활하였습니다. 유다왕국의 멸망이후 생존한 운 좋은 소수의 제사장들은 앉아서 그들의
기억,경험 및 전문지식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전이 존립하던 시절, 축복과 평화로운 시절, 유대인이 적어도 일부분의 평화를
누리던 시절에는, 모든 것이 손쉬웠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종교적인 관습과 희생제사가 중단됨이 없이 한 세대에서
다음세대로 전수되었습니다. 장로들과 현인들은 그들의 국가와, 종족의 과거사에 대한 영광스러운 이야기들을 말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녀들과 손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제사장들은 자녀들과 성전에서 항상 예배 드렸고 ,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들은 국가의 안정에서 분리 되었습니다. 귀족관료, 장로, 현인,
제사장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고,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버렸고, 종족들은 더 이상 함께 살지 못하였고, 전통은 파괴되었고,
성전은 더 이상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바벨론 포로 상황에서 제사장들은 앉아서 기억을 글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모든
세부사항, 장식 및 희생제사의 하나라도 빠트림 없이 모든 것을 기록하려고 하였습니다.

적어도 사실적인 현실을
기록함에 있어서 그들은 이전의 예배의식으로 돌아 갈려고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사실적 현실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고 오직 기술적인
면만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거나 혹은 후손들이 예루살렘으로 반드시 귀향한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상황은 매우 암담하고 황량했지만 선지자들의 예언은 그들이 귀환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항상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이러한 귀환에 대한
소망을 마음에 품고 그들은 예루살렘으로의 귀환과 성전의 재건을 준비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긴 목록과 장황한
기술적인 인용절은 새로운 회복에 대한 영적인 청사진이며 위대한 소망에 대한 증거입니다. 상황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확실히 변화할
것이므로 우리들은 준비를 해야 하며, 옳은 것을 기록할 필요가 있고, 고칠 필요가 있고, 더 좋게 이루어 지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확실히 그들을 회복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2. 개방
그들은 소망으로 살아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목록의 기록 과정이 소망에 의해 유지되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목록과 제조비법에 대한 다른
측면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성경의 본문에 기록하였음을 저는 의미합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제조비법은 우리가 이
본문의 훌륭한 면을 이해하는 데 도와 줍니다. 우리는 상세한 지시사항을 읽었습니다.- 백 세겔의 이 것과 이백 오십 세겔의 저
것, 이 것의 반과 저 것의 두 배를 취하여, 이렇고 저러한 방법으로 측정한 이런 종류의 기름과 혼합하여 이런 방법으로 제조하는
지시사항.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그들은 기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조비법이 잊혀지거나 영원히 분실될 수 있다고
그들은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자손들이 성전을 올바르게 건축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적절하게 성전을 봉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 제조비법을 기록하였습니다. 사실 그것은 현명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성한 제조비법이 왜 성경에
기록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 제사장이 쓰는 관, 예배의식의 겉옷에 대한 장식, 희생제단의
모양 및 등잔에 사용되는 장식, 이러한 모든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 존재하는 기간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손쉽게 그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거룩한 향기름의 상세한 처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그것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 거주하는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 특별히 선택되었고 훈련받은 제사장 – 정확한 혼합법과 제조기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성경에서 기록되었고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개방된 출처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회당예배
중에 규칙적으로 낭독될 것입니다. 그리고 곧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집니다. 유태인이 아닌 누구에게나, 그리스도인 우리들
까지도.

이것이 다른 유명한 제조기법에 발생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세계에서는, 사업적으로나 상업적인
세계에서는 이러한 종류에 정보는 매우 귀중해서, 주의 깊게 보관되며, 많은 종류의 특허권으로 보호되며, 핵심의 원판은 가장 안전한
금고 속에 잘 보관 되어집니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의 제조기법이 어디에서든지 공고되어졌다고 생각 해보십시오. 유명한 술의
혼합하고 제조하는 비법이 일반인에게 알려지고, 인기 있는 의약품의 유보된 권리가 소유자들에 의해 해제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상식 밖의 일이며, 사업상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 성경에서는 개방된 출처로 우리는 거룩한 향기름을 만드는
제조비법을 상세히 알 수 있다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훔쳐진 자료가 아니며 경쟁자에 의해 공개된 것도 아닙니다. 비밀의
보관자에 의해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당신은 성경의 훌륭한 개방성의 숨결의 느낄 수 있겠습니까? 믿음과 성경적
신앙에 있어서는 비법을 전수받은 혹은 비밀의 제조비법이나 예배의식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세상에게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소수에게만 접근이 가능한 어두운 신비로운 곳이 없으며, 창안자의 특별한 그룹의 사람만을 위한 예배의식도 없습니다. 성경적
신앙에서는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기꺼운 마음과
같이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팔은 성전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성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열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 회중, 마음, 정신도 이와 같이 열려져야 합니다. 개방은 우리의 본문의 두 번째 측면입니다.

3. 사랑

직 세 번째 측면이 있고 내 의견으로는 가장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기록의 과정은 소망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것이 누구에게나
알려져서 귀중한 소식의 내용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성전 예식, 성전 가구의 개별적인 항목, 그리고 모든 성전 봉사자들이 특수한
기름으로 신성해야 하며, 모든 물건과 모든 사람이 거룩한 혼합물로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예배의식의 모든 부분, 신앙 생활의
모든 형식은 이 향기로운 혼합물로 기름 부어져야 합니다. 신앙 생활의 모든 부분이 기름 부어져야 신앙생활이 원만하게 영위
되어지고, 녹슬지도 않으며, 썩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기름 부음의 은유적 부분입니다. 기름 부은 물건들과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봉헌되고 이러한 기름부음 과정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간섭이 시각화 되거나 혹은 다소 향내로 감각화 됩니다. 우리 믿음의
모든 측면이 기름 부어져야 하며 이 냄새로 향기를 풍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특별한 보호적인, 시각적인,
권능을 부여하는 향기를 분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혼합법을 압니다 –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 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 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 오십 세겔과 계피 오백 세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향기의 의미를 알기 위하여 우리
자신이 이 기름을 제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유사한 약초의 목록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흥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아가 4장 12-15절)

여기서 사실 한 종류의 약초가 빠져 있고 다른 약초가 첨가 되었습니다.

마도 시인은 모세의 율법을 파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작은 수정은 그를 파문으로부터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제로 혼합하지 않고도 봉헌에 사용되는 거룩한 향기름의 냄새를 압니다. 우리의 믿음과 교회 생활을 궁지에 봉착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기름, 모든 것이 원활하게 운영 되도록 보장해 주는 기름, 녹슬고 썩어 지는 것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기름,
하나님 사랑의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기름. 봉헌된 신성한 기름과 하나님의 거룩한 기름은 사랑의 향기입니다. 이것이 주요한
의미이고 본질적인 향기입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름 없는 여인에 의해 향유로 기름부음
받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기름이었으나, 그것은 위대한 사랑의 기름이었습니다. 메시아는 그의 신의 사역, 즉 자기 희생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적절히 기름 부음 받았습니다. 향기름을 더 이상 준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성한 기름의 이 세가지 측면을 우리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현재 상황과 관계없이 소망 위에 견고하게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팔과 마음과 정신, 가정과 교회는 개방되어야 하며 초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사랑의
향기를 풍겨서 우리 신앙의 녹슬음과 썩어짐으로 부터 완전히  보호되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