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교회당 부지 활용방안 최종결정

꼬빌리시 광장 사거리 꼬빌리시 전차 종점방향으로 전차길을 따라 10여 미터 따라 올라 가면 현재 중고품 가게로 임대를 둔 허룸한 창고집이 나온다. 1970년에 강제로 현재 교회터로 이주하기전 40여년간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당이 있었던 자리이다. 그동안 교회당이 여러번 용도변경이 되면서 현재 창고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1989년 이후 이 땅을 되돌려 받게되었다. 당장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낡고, 전기 수도 난방등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어 교회가 활용을 할 수 없자 그대로 버려둘 수 없어 창고로 그리고 현재 중고품 가게로 임대를 두어 어려운 교회살림에 조금씩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얼마전 이 교회터가 프라하 지하철 C선 연장선 건설계획에 편입이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보상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프라하시에서 계획을 변경하여 교회터를 부분 구입하기로 하였다.

그 후 당회에서 남은 약 3백 평방미터 정도의 터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숙의를 거듭하였다. 숙의의 원칙은 부지를 모두 매각했을 경우 매각대금은 교회의 선교활동을 위해 투자한다는 것이었다. 터를 모두 정리해서 아직 완성되지 못한 현재 교회당 증축(현재 지하 방4개인데 설계에 따르면 방이 모두 8개가 된다. 이 방들은 교회의 치유목회를 위한 프로그램의 용도이다.) 에 투자하는 방법, 교회당 옆 자투리땅을 내무부로 부터 구입해서 어린이 놀이터를 건립해서 옆 숲길과 연계하여 교회 주변을 공원화하여 지역주민이 이용하도록 하는 방법…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10월 15일 월요일에 현재 부지를 교회의 다목적 선교를 위해 활용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현재 지하철 건설 설계대로면 구 교회터 부지는 지하철 출입구 바로 옆에 위치하게 된다. 그곳에 선교적인 목회, 봉사활동(디아코니아), 문화센터를 내용으로 하는 비영리 사업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꼬빌리시 광장에 새로 건설될 지하철 역을 중심으로 길 한 쪽에 현재 위치하고 있는 카톨릭 교회의 어린이를 위한 대규모의 프로그램 장소 그리고 맞은편 윗쪽으로 체코 성서공회 건물 골조가 거의 완성이 되었고 그 맞은편에 우리 교회의 선교프로그램 건물이 위치하게 될것이다. 새롭게 건설될 지하철 역사 주위는 교회들의 지역사회 활동 프로그램들로 둘러싸이게 된것이다.

그래서 지하철역 부근에서 교회의 이와같은 계획에 대해 프라하시 교통 건설 관계부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교회가 지역 사회를 위한 비영리 사업을 계획할 경우 앞으로 지하철 건설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지하철 건설은 3년 후에 완성이 된다. 부지의 활용은 지하철 건설이 완공되면 시작할 수 있다. 3년동안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기도로 준비 그리고 실천 가능한 일들 부터 하나 하나 축적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체코교회의 입장을 어느정도 이해한다면 슈토렉 목사님과 당회원들이 그렇게 결정하기가 그리 쉬운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역사회와 교회가 어느정도 공감대를 형성한 선교적인 목회 프로그램, 디아코니아(봉사) 활동, 문화교류 라는 큰 밑그림은 그려졌다. 구체적인 내용들을 담는 일에 우리 한인교우들의 관심과 역할이 있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 우리들은 앞으로 체코선교의 개념과 방법론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다윗의 회상

  • 한인 예배 (2001년 10월 14일)
  • 삼상17:3-40
  • 설교자: 이지 슈토렉

01년 10월 14일 (삼위일체후 열여덟번째 주일)
<본문> 사무엘상 17, 3-10a.22-26.31.32.37-40
<제목> 다윗의 회상

<설교>

리 나라에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자주 하였습니다. 우리 개혁교도는 작고 카톨릭교도들은 거인과 같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전망을 주었습니다. 우리들이 해방을 위해 투쟁할 때,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매우 유용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파시즘과 대항하여 우리 민족이 싸울 때 민족이 용기를 갖도록 다윗과 골리앗 노래들이 불려졌습니다. 공산주의 지배 타도의 희망이
비친1968년 역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자주 회자되었습니다.  1989년 11월 직후 많은 목회자들은 우리들이 거대한 쏘비에트
거인을 극복했다는 자의식을 갖게되었습니다. 오늘날  다시  어떤 사람들은 지혜와 기독교 문명의 승리에 대한 비유로서 다윗의
이야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테러공격 이후 소위 기독교 문명에 닥친 상황 때문에 제가 이  본문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주일날 사무엘 상을 한 장 씩 차례대로 계속 읽어가기 때문에 이 말씀을 전할 차례가 된것입니다.

조그마한
소년이 거인을 거꾸러트린 단순한 내용을 모든이들이 좋아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 속에는 어떤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단지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3절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 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희망이 도박에 있습니다. 한 쪽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이 완벽하게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골리앗의 거대한 모습과 그의 놀라운 무기는 상상이 안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골리앗의 어록의 종교적인 톤은 신을
비웃음으로 자기를 극도로 자랑하는 말입니다: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10절 상반절) 선전포고 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겁을 먹고 매우 무서워 떨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항하는 사울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다윗입니다. 시골
아이 처럼 행동하는 호기심 많은소년입니다. 동화 이야기 속에 시골 아이들이 다윗처럼 행동합니다. 진지하게 왕의 약속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절반의 왕국과 공주와의 결혼이 다윗에게 얼마나 매력이 있었겠습니까 군사들은 그를 집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첩보 활동은 잘되고 있어 왕이 다윗에 대해 알게되고 곧 그를 부릅니다.  다윗은 항상 똑 같이 행동합니다. 꾸밈이 없이 솔직히
말합니다. 사울에게 바로 말합니다 :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것이라.” 32절 말씀입니다. 16살짜리 소년이 왕과 나눈
대화라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다윗은 싸움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혔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왕국은 강한 무기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34-37절 말씀입니다.

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 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견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


울의  무기도 그리고 골리앗의 무기도 게세마네 동산에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은 거절하였습니다. 다윗은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고 오늘 본문 5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17장 마지막에 나오는 사울의 질문을 들어보십시다.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 (55절) 이상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베들레헴을 보여줍니다. 오늘 힘든 시대에 모든 민족에게 왕이 되시는 이
베들레헴 왕을 기억하는 것을 멈추지 맙시다. 그것은 우리들이 다시 기억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도록 그리고 놀라고
혼란스러운 것을 영원히 멈추도록 목자 되시는 우리 주님의 역사를 되새겨봅시다. 골리앗을 무찌른 다윗처럼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조롱받고 두려움에 떠는 하나님의 백성, 모든 민족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설교후 기도>

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은 골리앗으로 인해 두려워 떠는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우리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여 위기의 상황을 오히려 하나님을 온천하에 알리는 삶의 자리로 변화시켜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 나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우리들의 손에 들려진 세상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는 이 시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2001년 10월 7일

10월 7일 스물 세번째 에큐메니칼 예배 스케치

아침에 일어나니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게 안개가 끼었다. 며칠째 계속되는 아침 안개이다. 해가 뜰 무렵에도 안개가 걷히지 않으면 체코 사람들은 안개가 아니라 스모그라고 한다. 낮은 기압에 바람이 불지않아 스모그가 햇빛을 차단해서 안개가 쉽게 걷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날씨에 두통이 있고 허리 통증이 심하게 느껴진다. 기분도 우울해진다.

주일 전날인 토요일에 총회 평신도 대표의 아들 결혼식으로 슈토렉 목사가 오후 시간을 거의 밖에서 보냈기에 주일 예배준비 최종 점검을 못한 채 예배순서를 이메일로 보냈다는 전화 통화만 하였다.

예배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 예배이다. 오늘도 무사히 예배가 마쳐질 수 있을지 긴장과 불안이 생긴다. 한시간 전에 교회에 나와 몇 주동안 준비한 체코어 설교원고를 다시 한번 더 읽고 예배의 시종을 주님께 의탁하는 기도를 드렸다.

이번 설교는 베드로전서 3장 15절 말씀으로 준비하였다. 기독교가 앞으로 소수 종파가 될 것이라는 선교 신학자들의 예언을 나는 이미 체코교회를 통해 어떻게 기독교가 소수 종파가 될 수 있는 가를 체험하고 있다.

한국 교인들에게 한국 기독교가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1세기의 디아스포라 교회와 같은 상황이 도달 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아울러 이미 소수 종파의 경험을 하고 있는 체코 교인들에게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패배주의에서 벗어날 것을 일깨워 주길 원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초대교회를 형성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선교였다. 마찬가지로 체코와 한국 교우들이 함께 복음의 소망을 세상에 전할 수 있는 교회가 될 때 그것이 선교임을 우리 모두가 깨닫기를 원했다. 특별히 해외의 한인 기독교인들이 언어와 문화를 극복하지 못해 자꾸 한인들만의 공동체를 만드는 폐쇄된 해외의 한인교회를 바라보면서 우리 교우들이 교회의 선교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보기를 원했다.

이제 겨우 7-8년 체코에 거주한 사람이 체코교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웠으나 오늘 조금은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였다. 오늘 설교는 교회 월보 Terasa에 기재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활자화 되어 공개적으로 더 폭 넓게 체코 목회자들과 교우들과 „교회의 선교“ 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길 기대한다.

오늘 교회당에 거의 빈자리가 없었다. 이제 체코 교우들이 휴가 계절을 끝내고 일상의 생활로 돌아온 느낌이다. 그러나 우리 한인 교우들 몇 가정이 결석을 하였다. 주로 어린아이들이 있는 가정들이다. 오전 9시 30분에 아이를 데리고 나오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기도제목이자 고민거리이다.

반가운 손님이 있었다. UBF 소속 선교사 가족들이 에큐메니칼 예배에 동참을 하였다. 서로의 편견을 만남을 통해 해소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자신들을 비울 수 있는 출발이 되기를 함께 다짐했다.

특별한 순서가 있었다. 이제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정한 젊은 부부가 꼬빌리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였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지역 주민들이 슈토렉 목사와 상담을 하는 경우들이 빈번하다. 그들 중의 한 부부가 결단을 하고 교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환영식을 갖기로 결정하였다. 처음 있는 예식이었다. 그래서 최근에 나오기 시작한 박 재영, 김 태연 두 자매도 함께 그들과 신입교우 환영식을 하기로 하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견해와 인종과 문화의 한계를 극복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창조하는 활동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와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만찬에서 구원과 주님의 도우심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로마서 15장 7절)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권면하십니다.“

간단한 환영식에서 라띠보르스끼 장로님의 말씀이었다.

디아스포라 교회의 선교

  • 연합 예배 (2001년 10월 07일)
  • 벧전 3:15
  • 설교자: 이종실

01년 10월 07일
설교본문: 베드로전서 3장 15절
설교제목: 디아스포라 교회의 선교

<설교본문>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설교>

늘 본문은 2천년 전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을 위해 쓰여졌지만 오늘날 우리 상황에도 여전히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소수 종파의
체코개혁교회를 만난 이후에야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1세기의 그리스도의 제자들 처럼 자신들이 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인 것을 알았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신자를 얻는 한국교회의 분위기에서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저처럼 한국
기독교가 디아스포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한국교회는 기독교와 전혀 관련이 없는 땅에서 복음의 실천으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200년 전 복음이 한국에 전해질 당시 한국사회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지 못하였습니다. 여성, 어린이, 노동자,
농민, 기술자, 그리고 남의 집에서 일하는 종들은 사회의 낮은 계층이었습니다. 당시 선교정책은 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가난한자 병든 자 죄인 창녀들과 어울리신 예수님과 쉽게 동화되었습니다. 서양의 현대식 기독교 학교와 병원을
세워 가난하고 소외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돕고 가르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도 복음의 실천인
사회를 섬기는 일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업들이 자신들의
기업홍보를 위해 기독교 병원보다 훨씬 좋은 시설과 의술을 갖춘 병원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업들이 학교를 세우고
그리고 양질의 인적자원을 얻기 위해 대학도 세웁니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일반 세상 단체들의 사회 봉사를 위한 노력이 교회보다
앞서나가고 있습니다.

이미 체코교회 여러분들은 오래 전부터 이러한 현상들을 체험하였습니다. 더구나 사회주의 시대를
경험하면서 교회의 복음의 실천의 공간이 매우 제한되어 있고 무신론적인 사회분위기는 국가에 의한 교회의 재정지원으로 오히려 교회에게
더 많은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과 소망의 가장 구체적인 선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기독교의
실천은  이미 기독교인들만의 독특한 영역이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만의 개인적인 또는 사회적인 의미 있는 이슈가 있지 않기
때문 입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상황은 기독교의 실천이 타 종교와 인도주의적인 세속적인 행동가들과의 실천과 협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실천으로 우리는 더 이상 믿음을 권면하고 복음을 설명할 수 없는 이와 같은 디아스포라 상황에 대해 체코
개혁교회 기독교인들은 잘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체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회의 실천과 전도 집회에 의해 교회가 자동적으로 새로운
신자를 얻는 기독교의 시대가 서서히 끝나 가고 있음을 압니다.

현재 체코 개혁교회 교우들은 새로운 자기 확신과 자립을
이루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체코형제 자매들은 자신의 신앙의 생명력, 진실성, 생존은 종교적인 사회적 관습과
가족의 전통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끄는 믿음의 능력에 의존해야 함을 사회주의 시대를 극복 하면서 알았습니다.

지역사
회에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해 슈토렉 목사님과 대화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을 의논할 때 그는 언제나 카톨릭 교회와 지역
관청 그리고 인도주의적인 사회 단체들의 활동 관계를 고려하였습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믿음을 권면하고 복음을 설명하기에 한계가
있는 무신론적인 분위기의 다원화된 사회에서 슈토렉 목사님은  소위 코이노이아로 불려진 친교를 통해 믿음을 권면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그의 생각을 이해했습니다.

친교는 단지 우정이 아니라 예배와 성만찬의 교회론적인 삶입니다. 이것은 복음으로
불리우는 새로운 계약, 삶에 대한 모든 관점의 변경, 다른 태도와 존재양식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실존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새로운 존재에 대한 증인이 될 때까지 우리들은 혼란스러운 존재들로 살아갑니다.

특히 오늘 이 말씀을
듣던 청중들은 박해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 서신은 박해를 받은 것은 로마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올바른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서신의 이러한 정보는 박해를 받던 사람들은 범법자로 수치를 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해의
두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실하고 착실한 삶 대신에 충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열광적인 종말론에 빠지기 쉽고 외부와
교통이 없는 폐쇄된 공동체로 나아가기 쉽습니다. 사회와 단절이 된 공동체는 섹트입니다. 이것이 1세기 때 흩어진 기독교인들인
소수 무리들에게 편지를 써서 베드로 전서의 저자가 훈계한 이유입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민의 한 표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정치가들 마저도 업신여기는 힘없는 교회 공동체 일지라도, 재정적으로 국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약한 교회 공동체 일지라도, 특별한 전통을 가진 가족들의 모임 같은 특별한 소수로 여김을 받는 교회 공동체 일지라도, 병든자 노인
가난한자 죄인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일지라도 교회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표적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를 들었기 때문에 지금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가 현재와 미래에 대해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와 미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것 궁극적인 것을 소망하기에 일시적인 고통과 고난 중에도 소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소망을 보고 찬양한 여인들 한나(삼상2,1-10)와 마리아(눅1,46-55)의 모습이  디아스포라 교회가 찾아야 할
모습입니다.

사회의 지원이 전혀 없는 디아스포라, 게다가 혼란스러운 존재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이들에게 믿음,
사랑, 친교, 예배와 기도를 언급하지 않고 소망을 말한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소망 없이 존재하는 것은 상실하는 것이고
내적으로 죽는 것이며, 슬픔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것은 자포자기, 파멸에 가장 가까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인류에게 소망을 줄 어떤 것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지금까지 종교적인 관습과 전통에 기대온 우리 교회들이
우리가 희망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해야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의 소망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그 소망이 교회 안에서 나타나
보여져야 합니다. 복음의 소망 안에 세워진 디아스포라의 교회가 바로 선교의 전선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초대교회로 탄생한 것
처럼 우리 체코와 한국의 형제 자매들이 복음의 소망을 전하는 교회로 탄생하는 것, 이것이 선교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아멘)

<파송의 말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마가복음 10장 1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