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기쁨

  • 한인 예배 (2001년 10월 21일)
  • 눅14:34-15:10
  • 설교자: 이종실

01.10.21(삼위일체후 열아홉번쨰)

설교본문: 누가복음 14장 34 – 15장 10절
설교제목: 교회의 기쁨

<성경>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찌어다 하시니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잃은 양 비유, 되찾은 드라크마 비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리라.”

<설교>

두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복음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사람들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말
씀을 듣는 자”와 “계명을 지키는 자” 두 사람의 모습이 15장 1절과 2절 단지 두절 속에 모두 설명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자는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었는지에 대한 언급 대신에 예수님께 나아온
이유와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 또 실패한 인생을 살아간다 할 지라도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나아오는 세리와 죄인들의 모습을 우리는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라는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로
나아오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을 향해 폭풍이 이는 바다 위를 걸어 가는 베드로의 모습과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중심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을 확인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먹는 예수를 원망하며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라고 권면한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악한 동무로 경계해야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자녀
주위에 나쁜 친구들이 있는 것을 안다면 부모는 늘 마음이 염려스러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이
더러워 질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도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천하고 더러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똑 같이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과 세리와 같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누가복음
18장) 바리새인들에게 이 율법의 문제는 진리와 정의의 문제였습니다. 누구나 다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모두 지켜야 되는 것을
자신들이 잘 지키고 있기에 그들은 타인에 대해 우월심과 무시함과 원망을 갖게 된 것 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랑과
무시함과 원망이 팽배한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몸에 익숙한 신앙의 기준, 교양의 기준, 인간 됨의
기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윽박지릅니다.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을 가지게 되고 마음의 상처를 받고 심지어 마음의 분노가 생기는지 모릅니다.

한국에서 교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느 정도 교회 안에서 질서가 있지만 해외 한인교회는 한국의 교회들 보다는 조금 더 무질서해 보입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은 누구나 서로 인정하지도 귀담아 들어 주지도 않는 자기 의로움이 있습니다. 그 의로움들이 저마다 교회 공동체를
부수고 망가트리고 퇴색시켜갑니다. 심지어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조롱거리로 만듭니다.

이런 교회에 대해 예수님은 오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너
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예수님이 질문 합니다. 청중들은 머리를 끄덕거렸습니다: 물론 그렇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할거예요. 그러나
게으른 목자들은 아마 다르게 했을 거예요.

그리고 주님은 자신의 청중들에게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그들 중에 하나를 잃으면 손을 털면서 말하기를 그러나 아직 아홉이 남아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 드라크마는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품팔이를 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적지 않는 돈이었습니다. 돈을
잃어버린 여인은 자신의 하루 품삯을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어두운 장소에 떨어진 동전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빗자루로 온 집안 구석 구석 청소를 합니다.  이야기를 듣던 모든 여자들은 머리를 끄덕거릴 것입니다: 물론이지요 우리도 그렇게
할거예요. 대답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무엇을 잃어버린 경험들이 한번씩은 다 있을 줄 압니다.
무엇을 길거리에서 잃어버렸을 때 이미 우리들은 걸었던 길을 따라 몇 차례씩 돌며 주의 깊게 오른쪽 왼쪽을 살펴봅니다. 그래도 찾지 못하면 걱정이 되어 밤에 잠이 오지않습니다.
 

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아이러니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잘 따르던 아흔 아홉의 양들 때문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던 길 잃은 말썽쟁이 한 마리 양 때문에 목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손안에 들어있던 아홉 드라크마 때문이 아니라 잃어버린 나의
것 하나 때문에 여자는 기뻤습니다. 

이 비유만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드러내는 비유는 없습니다. 상실한
모든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그런 거만을 떠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들의
하늘 아버지는 인간의 죄를 참으시고 죄로 소외된 자를 찿고 그리고 그들에게 교회라는 돌아올 집을 준비하신 분이십니다.


회는 교회라는 기관의 기준과 인간의 정의의 잣대로 들어가고 나가는 집이 아닙니다. 죄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
인생의 길을 잃은 사람들이 돌아와 거쳐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기쁨의 집입니다. 교회는 잃은 것을 찾은 하나님의 기쁨과 동시에
죄인들 소외된 자들의 용서와 축제의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잃은 것을 찾는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 자신만의 기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가 기뻐 찬양합니다.


사가 기뻐하는 모습이 누가복음에 또 나옵니다. 예수 탄생의 소식을 알릴 때였습니다. 기뻐 찬양하며 아기 예수 탄생의 소식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잃어 버린 생명을 찾은 하나님의 기쁨은 전우주적인 기쁨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단지 기쁨의 선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죄인들에게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잔치에 친구와 이웃이 초대됩니다. 교회의 기쁨은 세상의
흥미거리로 이루어진 이벤트의 즐거움이 아닙니다. 이벤트는 교회의 잃어버린 자를 찾은 하나님의 기쁨과 그 축제를 더 흥겹게 하는
수단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먹고 마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축제와 관련이 없는 교회의
이벤트는 서로 꺼려하고 서로 회피하고 서로 떠넘기는 일거리입니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잃은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벗과 이웃이 우리들이라면 추운 교회당에서 의미도 모르고 예배 드리는 하나님의 기쁨 보흐니체 정신병원 수요 예배자들을 우리들은 기억했어야 될 것입니다.


제는 하나님의 기쁨에 대한 교회의 체험이자 감사의 노래입니다. 온 천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신 거룩한 만찬은
감사의 잔치입니다. 축제의 주인공은 회개한 죄인들 그리고 찾은 잃어버린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이들이 중심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죄인들 상실한 자들 희망이 없는 자들 소외된 자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존경을 받고 기쁨을 얻어야 됩니다.


코 형제 자매들은 이 일을 지난 주 목요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이 기쁨을 교회의 공동체가 누리기 위해 알코올중독자, 약물 중독자들
가운데 치료가 끝나고 중독생활 그리고 치유의 오랜 기간에 이미 아내도 가족도 남이 되어 버린 상실한 세상에 돌아와 다시 삶의
뿌리를 내려야 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는 “끌라슈떼르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될지 체코 교우들 잘 모릅니다. “이 목사, 나는 이 일을 할 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실 줄 믿는다. 함께 배우면서 그리고 기도하면서 해보자.” 슈토렉 목사님이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체코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우리 동포들이 계십니다. 이 분들이 돌아올 용서와 받아들임이 있는 하나님의 준비한 집이 우리 교회라고 우리들은 말할 수 있습니까?

“회
개할 것이 없는 의인”은 누구도 교회의 기쁨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계속해서 회개를 요청하는 의인들은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에 기쁨을 가져 다 주지 못합니다.  반대로 중압적이고 불쾌한 분위기를 만들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죄인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을 영접하는 교회 공동체로
바꾸어 놓게 됩니다.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감독자의 위치가 되어 불신과 비난과 자기 자랑의 분위기가 교회 안에서 깊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의롭지 못할 지라도 우리들은 스스로 의로운 자들이 되려고 합니다.  대신 우리들의 공동체는 누구도 관심 있어
하지 않는 그리고 회피하는 교회의 모습이 되어 갈 것입니다. 기쁨의 초청의 자리가 불신과 자기 자랑, 다툼과 분쟁, 업신여김과
해외생활의 스트레스를 풀고 자기 감정을 푸는 자리로 느껴질 때 교회의 모든 선교적인 노력과 증언과 초청은 쓰레기 같이 소모적인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용서와 받아들임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과 축제가 있는 교회가 되려면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자세가 아니라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세리와 죄인의 자세가 우리들에게 요구됩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을 보기에 의로운 것이 없어서 남을 판단할 근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러분들에게 죄책감과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만이 죄인을 위해
이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 죄의 해방과 구원의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뿐 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옆과 앞
뒤에 불러두신 형제 자매들도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되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하나님을 대하듯
하는 태도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주기도를
새롭게 배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보다 정의를 실현하는데 뛰어난 분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의 비유들은 완전히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리들이 진실로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될 것이다: “나는 절망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상실할 때 까지 자신의 생각대로 길을
떠나는 매우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양입니다. 나는 더러운 바닥에 떨어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동전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반듯이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찾은 기쁨에 우리를 어깨에 메고 우리들의 집 이 교회로 돌아와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잔치가 있는 이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영혼의 충족감, 상처 받은 마음의 치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용서 그리고 소망을 체험하며 우리는 믿음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설교 후 기도)

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들이 세리와 죄인의 모습으로 주님 곁에 나아가 말씀을 듣고 그리고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우리 하나님의
기쁨의 존재들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주님 앞에 피할 수 없는 죄인이오니 우리들을 용납하시고 우리들을 주의 전에 하나님의
기쁨으로 존재하게 하여주시옵소서. 기쁨이 넘치는 축제가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시어 잃어버린 자를 찾은 하나님의 기쁨이 날마다
더하는 일에 동참하는 교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살며 생각하며] 영화 “군청색의 세계”

[살며 생각하며] 영화 “군청색의 세계”

나눔터 제 18호 (2001/ 10/ 01 발간)

영화 꼴리야 그리고 가공의 인물을 극화한 찌므르만 코메디 시리즈의 배우 즈데녝 스비에락은 체코인들이 좋아하는 대중적인 인물이다. 그의 아들 얀 스비에락은 현재 젊은 영화감독으로 아버지 못지않은 대중성을 갖고 있다.

아들 스비에락이 제작한 “군청색의 세계”는 월별 관람객을 기준으로 하는 체코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연일 새롭게 갱신한 화제의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지않고 체코인들과의 대화에 동참할 수 없을 정도로 영화의 내용자체가 체코인들 에게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역사적인 소재거리로 풍부하다.

이 영화의 제목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군청색”은 체코 파일럿을 의미한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에게 체코는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하자 나라와 자신의 비행기를 잃은 파일럿들을 징병하여 히틀러와 대항하는 영국의 한 기지에 몇몇 체코 파일럿들이 모인다. 그들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영국의 전쟁 미망인과의 사랑, 전우의 의리, 목숨을 건 독일군들과의 전투를 잔잔 하면서도 매우 재미있게 그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와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는 체코 파일럿을 사랑했던 영국 여인의 모습, 그러나 그 여인과 헤어져 체코로 돌아온 파일럿을 기다리던 것은 일상의 삶이 아니었다. 이미 결혼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사랑했던 옛 애인과 1948년 공산혁명이라는 대 변혁의 삶이었다.  그는 나라와 정의를 위해 싸운 보람도 없이 집단 수용소에 갇혀 노동과 질병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전쟁은 끝나도 약소국들은 여전히 강대국의 전리품으로 총성 없는 전쟁터가 되고있다. 주인공인 한 체코 파일럿이 수용소 병실에 누워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영화의 내용은 전개된다. 

이 영화 속에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프라하 8 – 꼬빌리시 이야기가 나온다. 앞 길 전차 다니는 큰 거리 이름이 “스트제리츠나” 이다. “스트제리츠나”는 형용사로 동사는 “스트제리트” 로 “(총을)쏜다” 는 뜻이다. 미루어 짐작해서 이전에 “사격장”이 이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했었는데 영화의 이야기 속에 히틀러 당시에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 “사형장”이 있어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약 석 달간 사형을 당해 죽어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거리를 “스트제리츠나”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류의 재앙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현장 보다 더 떨리던 것은 그 현장을 매일 지나 다니면서도 인류 재앙의 과거 역사 그리고 강대국들의 제국성을 잊고 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이다.   

이 종실 / 나눔터 발간인

2001년 10월 목회서신

<2001년 10월 목회서신>

제목: 2001년 우리 교회 공동체의 생활 목표의 실천을 간곡히 권면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서 우리들의 공동체를 하나님이 허락하셨음을 고백합니다.

불완전하고 아직 죄성(罪性)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불러모아 우리 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표징을 드러내고자 우리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서의 교회와 그리고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들의 죄성, 게으름, 이기심, 욕망, 우월심, 열등심 등의 불완전성이 이룬 모순의 심연에서 우리들은 날마다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들을 다른 한쪽의 희망의 언덕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서의 교회를 이루는 우리와 그리고 구원 받아야할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 사이를 오가는 삶은 마치 살얼음판을 딛는 것 같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이 긴장은 우리들을 날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거듭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여 그것을 갈망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주의 성령이 우리들을 낙심하지 않도록 날마다 돕습니다.

좋은 교회란 완전한 교회가 아니라 이 긴장이 시퍼런 칼날처럼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회개와 용서가 쉼 없이 반복되는 교회입니다. 불완전하고 아직도 날마다 죽어야 할 것이 남아있는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공동체를 기대하고 또 그것을 이루려는 우리들의 희망은 어쩌면 욕심입니다. 우리들의 욕심스러운 희망을 주의 성령께 넘겨드리고 대신 우리들은 날마다 쉬지 않고 회개와 용서를 반복하며 주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십시다.

\"교회를 이루는 나\"와 \"불완전한 나\"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은 교회 생활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긴장이 하나님의 사람과 야곱이 씨름을 하던 바로 그 얍복강입니다. 그리고 이 긴장은 우리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 교회\" 공동체가 세워진 자리입니다. 우리들은 아직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완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긴장이 있기에 우리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는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안에서 이 긴장의 신앙의 씨름터가 사라지면 우리들은 종교의 껍데기만 남는 흉물스러운 세상 집단이 되고 맙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잊지 않기를 간곡히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리면서 다시 한번 2001년 우리 교회 공동체의 생활 목표의 실천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첫째 \"자기를 객관화하는 생활\"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비방하기 보다 타인들의 실수와 잘못이 내게는 없는지 먼저 자신을 살피는 삶의 자세입니다.

둘째 \"정직하고 부드러운 언어생활\"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타인을 비방하여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게 하는 말들을 하지 맙시다. 언어는 자신의 교양의 수준과 신앙의 성숙 정도를 드러내는 척도입니다.

셋째 \"숨은 봉사생활\"입니다.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자기를 죽이고 포기할 뿐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기꺼이 투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대가없는 봉사입니다. 그러나 봉사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가까이서 느끼게 하기에 봉사는 영혼의 충족감을 줍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인생의 만족이 무엇인지 봉사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2001년 10월 14일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를 섬기는 부족한 종 이 종 실 올림

구 교회당 부지 활용방안 최종결정

꼬빌리시 광장 사거리 꼬빌리시 전차 종점방향으로 전차길을 따라 10여 미터 따라 올라 가면 현재 중고품 가게로 임대를 둔 허룸한 창고집이 나온다. 1970년에 강제로 현재 교회터로 이주하기전 40여년간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당이 있었던 자리이다. 그동안 교회당이 여러번 용도변경이 되면서 현재 창고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1989년 이후 이 땅을 되돌려 받게되었다. 당장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낡고, 전기 수도 난방등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어 교회가 활용을 할 수 없자 그대로 버려둘 수 없어 창고로 그리고 현재 중고품 가게로 임대를 두어 어려운 교회살림에 조금씩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얼마전 이 교회터가 프라하 지하철 C선 연장선 건설계획에 편입이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보상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프라하시에서 계획을 변경하여 교회터를 부분 구입하기로 하였다.

그 후 당회에서 남은 약 3백 평방미터 정도의 터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숙의를 거듭하였다. 숙의의 원칙은 부지를 모두 매각했을 경우 매각대금은 교회의 선교활동을 위해 투자한다는 것이었다. 터를 모두 정리해서 아직 완성되지 못한 현재 교회당 증축(현재 지하 방4개인데 설계에 따르면 방이 모두 8개가 된다. 이 방들은 교회의 치유목회를 위한 프로그램의 용도이다.) 에 투자하는 방법, 교회당 옆 자투리땅을 내무부로 부터 구입해서 어린이 놀이터를 건립해서 옆 숲길과 연계하여 교회 주변을 공원화하여 지역주민이 이용하도록 하는 방법…을 의논하였다.

그러나 10월 15일 월요일에 현재 부지를 교회의 다목적 선교를 위해 활용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현재 지하철 건설 설계대로면 구 교회터 부지는 지하철 출입구 바로 옆에 위치하게 된다. 그곳에 선교적인 목회, 봉사활동(디아코니아), 문화센터를 내용으로 하는 비영리 사업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꼬빌리시 광장에 새로 건설될 지하철 역을 중심으로 길 한 쪽에 현재 위치하고 있는 카톨릭 교회의 어린이를 위한 대규모의 프로그램 장소 그리고 맞은편 윗쪽으로 체코 성서공회 건물 골조가 거의 완성이 되었고 그 맞은편에 우리 교회의 선교프로그램 건물이 위치하게 될것이다. 새롭게 건설될 지하철 역사 주위는 교회들의 지역사회 활동 프로그램들로 둘러싸이게 된것이다.

그래서 지하철역 부근에서 교회의 이와같은 계획에 대해 프라하시 교통 건설 관계부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교회가 지역 사회를 위한 비영리 사업을 계획할 경우 앞으로 지하철 건설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지하철 건설은 3년 후에 완성이 된다. 부지의 활용은 지하철 건설이 완공되면 시작할 수 있다. 3년동안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기도로 준비 그리고 실천 가능한 일들 부터 하나 하나 축적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체코교회의 입장을 어느정도 이해한다면 슈토렉 목사님과 당회원들이 그렇게 결정하기가 그리 쉬운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역사회와 교회가 어느정도 공감대를 형성한 선교적인 목회 프로그램, 디아코니아(봉사) 활동, 문화교류 라는 큰 밑그림은 그려졌다. 구체적인 내용들을 담는 일에 우리 한인교우들의 관심과 역할이 있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 우리들은 앞으로 체코선교의 개념과 방법론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다윗의 회상

  • 한인 예배 (2001년 10월 14일)
  • 삼상17:3-40
  • 설교자: 이지 슈토렉

01년 10월 14일 (삼위일체후 열여덟번째 주일)
<본문> 사무엘상 17, 3-10a.22-26.31.32.37-40
<제목> 다윗의 회상

<설교>

리 나라에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자주 하였습니다. 우리 개혁교도는 작고 카톨릭교도들은 거인과 같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전망을 주었습니다. 우리들이 해방을 위해 투쟁할 때,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매우 유용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파시즘과 대항하여 우리 민족이 싸울 때 민족이 용기를 갖도록 다윗과 골리앗 노래들이 불려졌습니다. 공산주의 지배 타도의 희망이
비친1968년 역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자주 회자되었습니다.  1989년 11월 직후 많은 목회자들은 우리들이 거대한 쏘비에트
거인을 극복했다는 자의식을 갖게되었습니다. 오늘날  다시  어떤 사람들은 지혜와 기독교 문명의 승리에 대한 비유로서 다윗의
이야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테러공격 이후 소위 기독교 문명에 닥친 상황 때문에 제가 이  본문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주일날 사무엘 상을 한 장 씩 차례대로 계속 읽어가기 때문에 이 말씀을 전할 차례가 된것입니다.

조그마한
소년이 거인을 거꾸러트린 단순한 내용을 모든이들이 좋아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 속에는 어떤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단지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3절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 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희망이 도박에 있습니다. 한 쪽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이 완벽하게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골리앗의 거대한 모습과 그의 놀라운 무기는 상상이 안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골리앗의 어록의 종교적인 톤은 신을
비웃음으로 자기를 극도로 자랑하는 말입니다: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10절 상반절) 선전포고 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겁을 먹고 매우 무서워 떨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항하는 사울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다윗입니다. 시골
아이 처럼 행동하는 호기심 많은소년입니다. 동화 이야기 속에 시골 아이들이 다윗처럼 행동합니다. 진지하게 왕의 약속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절반의 왕국과 공주와의 결혼이 다윗에게 얼마나 매력이 있었겠습니까 군사들은 그를 집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첩보 활동은 잘되고 있어 왕이 다윗에 대해 알게되고 곧 그를 부릅니다.  다윗은 항상 똑 같이 행동합니다. 꾸밈이 없이 솔직히
말합니다. 사울에게 바로 말합니다 :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것이라.” 32절 말씀입니다. 16살짜리 소년이 왕과 나눈
대화라고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다윗은 싸움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혔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왕국은 강한 무기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34-37절 말씀입니다.

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 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견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


울의  무기도 그리고 골리앗의 무기도 게세마네 동산에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은 거절하였습니다. 다윗은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고 오늘 본문 5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17장 마지막에 나오는 사울의 질문을 들어보십시다.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 (55절) 이상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베들레헴을 보여줍니다. 오늘 힘든 시대에 모든 민족에게 왕이 되시는 이
베들레헴 왕을 기억하는 것을 멈추지 맙시다. 그것은 우리들이 다시 기억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도록 그리고 놀라고
혼란스러운 것을 영원히 멈추도록 목자 되시는 우리 주님의 역사를 되새겨봅시다. 골리앗을 무찌른 다윗처럼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조롱받고 두려움에 떠는 하나님의 백성, 모든 민족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설교후 기도>

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은 골리앗으로 인해 두려워 떠는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우리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여 위기의 상황을 오히려 하나님을 온천하에 알리는 삶의 자리로 변화시켜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켜 나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우리들의 손에 들려진 세상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는 이 시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