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5년 7월 20일)
- 누가복음 10장 25-37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눅10,25-37.docx
<누가복음 10:25-37>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로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영생’에 관한 질문은 당시 많은 유대인들의 관심사였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들은 약속된 것을 상속받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약속하셨고, 그 복에는 그들이 위대한 민족이 될 것과 땅을 기업으로 받으리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약속이 온전히 성취되는 시점이 계속해서 연기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그들은 이방민족의 압제 아래 굴욕과 착취를 겪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 약속된 것을 상속받는 일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한 질문은 더더욱 그들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기대하는 바가 ‘영생’(eternal life)이란 말로 표현된 이유는 그 약속된 것을 상속받는 일이 ‘새 시대’의 도래와 함께 이루어지리라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영생’은 그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며 도래할 새 시대, 새 나라에서의 질적으로 다른 생명을 의미하며, 한 마디로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면, 이 시대 사람들도 현재의 삶과는 질적으로 다른 삶을 꿈꿉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약속된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3-6)
여기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고 있고, 그 나라에서 받을 위로와 배부름이, 또 상속받을 땅이 약속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약속이 요한복음에서는 주로 그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의 약속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고(요3:16),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율법교사가 던진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으며, 따라서 이에 대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질문을 던진 이의 동기는 불순했습니다. 그는 율법교사였습니다. 말하자면 성경박사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미 자신이 정답이라 생각하는 무언가에 대해 예수가 과연 그에 부합하는 답을 하는지 체크하고 책잡으려는 의도로 그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되물으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미 그 답이 율법에 나와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해석입니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영생의 길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그것을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읽던 성경과 동일한 성경을 예수님도 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르게 읽으셨습니다. 다르게 해석하셨고 다르게 실천하셨습니다. 이렇듯,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한 성경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실천이 달라집니다. 가는 길이 달라지고 도달점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말씀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율법교사는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구약성경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과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을 한 데 묶어 답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영생을 얻는 길로 알고 있다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대답이 옳다 하셨습니다. 그가 정확히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아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아는 대로 행하라, 그것이 영생의 길이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일을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또 뜻을 다하여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마음’(heart)은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말합니다. ‘목숨’(soul)은 내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힘’(might)은 추구하는 바를 가능케 하는 원천입니다. ‘뜻’(mind)은 이해와 판단을 위한 지적인 능력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이 모든 영역을 하나님이 다스리시게 하라, 하나님의 주권의 깃발을 내 존재와 삶 전 영역에 꽂으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사랑하는 일은 이웃 사랑하는 일과 분리되지 않고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소중히 여기시듯 또한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시기에, 그 은혜를 입은 하나님 백성의 하나님 사랑은 또한 이웃 사랑으로, 내 이웃을 나 자신 같이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계명이 영생의 길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그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 길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계십니다.
그 대답은 들은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또 하나의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정말 알고 싶어서 묻는 질문이라기보다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던지는 질문, 적어도 내가 이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는 주장을 간접적으로 피력하는 질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왜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물을까요? 내 이웃이 아닌 사람들, 내 이웃이 될 수 없는 사람들,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구분하여 제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계명을 따라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할 내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은 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은 상태로 버려졌습니다. 한 제사장이 거기로 지나가다 그를 봤지만 피하여 지나가고, 이어서 한 레위인도 그를 봤음에도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심지어 이튿날 아침 주막 주인에게 돈을 건네면서 자기 대신 그 사람을 돌봐주길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돌아와 갚겠다는 말까지 남깁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율법교사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통해 예수님께 기대한 답변은 어떤 부류의 사람에게까지만 그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 되는지, 그 이웃 사랑의 대상이 될 사람들의 범위를 한정해주는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를 중심에 놓고, 나의 이웃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확정해주길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 속에서 그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이웃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로 등장하는 이는 길 가다 강도 만나 거의 죽은 상태로 버려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주어진 정보는 그것이 다입니다. 그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어디 출신이고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지,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인지 등에 관한 다른 아무 정보도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로만 묘사되고 있을 뿐입니다.
반면, 거기를 지나가다가 그 강도 만난 자를 보았던 세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출신 배경을 알 수 있는 추가정보가 조금은 제시되어 있습니다. 앞의 두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들은 유대인이었고, 그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 도덕적으로 행동할 것으로 예상되는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는데,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나 근거에 대해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덧붙이시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는 사람은 단연 세 번째 사람입니다. 그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 놀랍게도 그는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경멸받던 사마리아인이었고, 그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본문에 매우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 버려진 자를 보았습니다. 가던 길을 벗어나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맸습니다. 자기 짐승에 그를 태웠습니다.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돌보아 주었습니다. 떠나야 하는 이튿날에도 그를 챙겼습니다. 자기 재정을 들여가며 끝까지 그를 돕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누가 이웃인가? 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하는 사람이다! 그 상황에서 그와 같이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며, 그 상황에서 그와 같이 행하는 사람, 그가 바로 이웃이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나 자신을 중심에 놓고 내 사랑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는 이웃을 정의하려 했던 율법교사와 달리 예수님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중심에 놓고 그에게 사랑과 긍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이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며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이웃이 누구인지 구분하거나 정의하려 하지 말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든 다가가 그의 이웃이 되어라,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바로 우리 하나님 자녀들에게 약속된 영생을 상속받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안다’는 것은 그저 머리로만 안다는 뜻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그분을 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가운데 우리는 그분을 더 온전히 알게 되고 이미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듯, 우리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일은 기존에 갖고 있던 편견이 깨지는 과정을 수반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진정한 이웃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경멸받던 사마리아인으로 설정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분명 여기에는 예수님의 의도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율법교사만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접하는 우리 모두가 이제껏 ‘나의 이웃’이라 생각지 않았던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려는 의도 말입니다.
이 선한 사마리인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내가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부류에 속한 사람이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 나보다 더 의롭게 행동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또한 유대인 입장에서 볼 때 다른 누군가에게 줄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 같은 사마리아인이 그처럼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아낌없이 베푸는 모습을 묘사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우리가 낯선 사람에게 흔히 가질 수 있는 선입견을 넘어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으로 인식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십니다.
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날이 밝았음을 아는가?” 한 제자가 대답합니다: 흰색 실과 검은색 실을 구분할 수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랍비는 아니라 합니다. 다른 제자가 말합니다: “지평선을 배경으로 나무의 윤곽이 나타날 때입니다.” 그러나 랍비는 또 아니라 합니다. 또 다른 많은 대답들을 들은 후에 마침내 랍비는 말합니다: ‘너희가 낯선 이의 눈을 바라보며 거기서 형제와 자매를 보게 될 때다. 그때 비로소 날이 밝은 것이며, 그 전까지는 여전히 밤일 것이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상속받는 길이라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으리라 하신 예수님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팔복을 묵상한 김기석 목사님의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다른 이들을 위한 여백을 만들며 사는 사람이라는 말일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다른 이들의 설 땅에 되어주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아, 이 말씀 명료하기도 하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 살 궁리만 하고, 남을 궁지로 몰아넣는 사람들은 좀 정신을 차려야겠다. 천국 가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무력해서 땅에서 내몰리고 있는 사람들의 설 땅이 되어주어야 한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손과 발이 되고, 말 못하는 이들의 입이 되고, 보지 못하는 이들의 눈이 되는 것, 그럴 힘이 없다면 그들 곁에 머물면서 기막힌 사연이라도 들어주는 것, 그것이 천국 가는 길이다. 차가운 담백함을 지니면서도 봄바람 같은 마음을 간직한 사람, 골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품이 넉넉하여 다가온 사람과 흉금을 트고 지내는 사람, 뭔가를 한다고 주장하는 법이 없지만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새 생명이 움트게 하는 사람, 있음만으로도 세상을 훈훈하게 만드는 사람, 그가 땅을 차지할 온유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떠한가? (삶이 메시지다, 51-52)
오늘 본문의 예수님 말씀을 따라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