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0년 11월 15일)
- 창세기 6장 5-9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주일 가정예배 예식서 2020.11.8.pdf
<창세기 6장 5-9절>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였고, 이에 하나님은 큰 홍수를 내려 땅에 있는 것들을 쓸어버리셨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 홍수에 휩쓸려 모두 죽는 가운데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최소한의 생물들만이 살아 남았습니다. 홍수 심판이 있기 전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했습니다. 각종 동물들이 방주에 들어갔고, 노아의 가족들도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방주의 문이 닫혔습니다. 이후 40일 동안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후 150일 동안 세상은 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후 방주에서 나온 소수의 사람들, 생물들과 함께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 두 가지 관점에서 질문이 올라옵니다. 첫째,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들이 그렇게 엉망진창이라면 거기에는 하나님도 책임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되어먹은 사람들이 잘못한다 하여 그 책임을 물어 심판하시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둘째, 사람이 하는 일이 다 그 모양이라는 걸 아시면서도 왜 하나님은 세상을 그냥 끝장내 버리지 않으셨을까? 또다시 속상하고 골치아픈 상황을 맞게될 게 뻔한데, 왜 노아 가족을 통해 다시 시작하신 것일까?
○ 가만 생각해보니, 두 질문에 대한 답이 같은 것 같습니다: 노아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원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노아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하나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노아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런 시대에는 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시대에도 노아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봐도 답은 같습니다. 세상을 그냥 끝장내 버릴 수 없습니다. 노아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다시 실망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또 기대를 걸어봅니다. 노아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 하나님은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무리하게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선하거나 악한 것은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본질적으로 악함의 퍼센티지가 선함의 퍼센티지보다 많아서 인간이 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선한 것에 속하지 않고 악한 것에 속한 결과로 인간은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악한 것에 속해 있던 우리가 거기서 해방되어 선한 것에 속하게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6:9). 그의 세대에서 그가 의로움을 하나님이 보셨다 합니다(7:1). 노아의 시대(time)는 악한 시대였습니다. 그의 세대(generation), 즉 그와 동시대 사람들은 모두 악한 것에 휩쓸리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흐름이 모두를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혼자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의 시대, 그의 세대에서 노아가 의로왔다는 것은 분별할 줄 알고 절제할 줄 알았다는 뜻입니다. 해야 할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의로움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움이며 그 시대 속에서의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의 기준은 하나님이 제시하시지만, 의로움의 맥락은 그 시대 속에서 판별됩니다. 바꿔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의롭게 살 수 없고,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습니다.
○ 로마서 12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마음의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소위 하나님의 일을 잘못된 방법으로 열심히 합니다. 의도가 나빠서가 아니라, 마음이 그 세대에 길들여진 결과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끊임없이 내 마음과 삶을 복음 앞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시대 속에서 걸어가셨던 길을 생각하며 오늘 이 시대 속에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 노아가 얼마나 오랫동안 방주를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큰 축구장 크기 만한 삼층짜리 방주를 만들라 치면 아마 오랜 수고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가 방주를 만드는 동안 아마도 주위 사람들이 와서 뭐하고 있냐고 묻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곧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있을 거라고 노아는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그 방주에 따라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노아는 그저 반쯤 미친 사람으로만 보였던 것입니다. 노아의 존재와 삶 자체가 메시지였습니다. 그의 망치질 소리가 그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소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6:9) 노아의 삶은 이렇게 간단히 표현되어 있지만, 치열함이 없이는 그 시대에 그런 삶을 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 눈으로 시대를 분별하며 해야 할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삶, 노아 시대나 우리 시대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야 할 삶의 길은 동일할 것입니다.
○ 고난의 시대를 살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어려운 상황 속에 있다고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이 메시지입니다. 이 시대, 이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하거나 하지 않는 어떤 것이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왜 그렇게 사느냐 물어온다면 대답할 말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꼭 거창하고 논리정연한 말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 빨리 하고 많이 하길 요구하던 시대의 흐름에 잠시 제동이 걸렸습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교회밖 사람들을 통해서도 듣게 됩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어떤 방향인가’일 것입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많은 것이 이전과 달라질 것이라 예상하지만, 사람 마음의 방향이 바뀌지 않는 한, 비슷한 문제는 다른 데서 또 터져나올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일은 다시 잘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그분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우리가 품은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잘 들여다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며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