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3년 12월 17일)
- 누가복음 6장 27-36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 눅6,27-36.docx
<누가복음 6:27-36>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말씀 속에는 실천하기 쉽지 않은 내용이 많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스스로 좋아서 이런 삶을 선택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가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행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와 ‘사랑’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두 개념 같습니다. 원수이기에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기에 원수입니다. 이 ‘원수’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으신가요?
역사 속에서 생겨난 집단적 개념의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로마인들을 비롯한 이방 민족들은 그들의 땅과 법을 침탈하며 압제하는 원수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또한 세리와 같이 로마 권력에 부역하던 유대인 동족들은 경멸 받아 마땅한 반민족적 원수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들을 미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자 하나님께 충성하는 일로까지 여겨졌다고 합니다.
보다 개인적인 차원의 원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와 그 사람 사이에 있었던 어떤 일로 인해 나에게 그 사람은 원수로 여겨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 나도 그럴 수 있겠죠. 어떤 사람을 원수처럼 여긴다는 것은 그를 더 이상 상종못할 존재로 여기고 나와의 관계성 밖으로 영원히 밀어내고자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랑’에 관해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에 도전을 가합니다. 참된 사랑은 어떠한 한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원수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주장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유행가 가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고, 세상에는 ‘사랑’에 관한 여러 담론들이 있지만, 성경은 사랑이 참으로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해주는 참된 사랑이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 년 전 이 세상에 나타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리고 이어서 사도는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4:11-12)
이 사랑이 성도들의 실제 관계와 삶 속에서 역사할 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본문이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4-5)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이제 사랑을 자기식으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바로 그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사랑의 삶을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실천할 수 있느냐는 둘째 문제입니다. 방향이 바르게 잡히는 일이 우선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사랑의 길은 분명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여러분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마침내 다다라야 할 곳에 다다를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완벽하게 행할 수 없다고 해서 참된 것을 버리고 보다 쉬운 엇비슷한 것을 취하는 것은 어리석고 교만한 일입니다. 비록 힘들더라도 바른 방향으로 작은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멀리 가는 것보다 낫습니다. 구원은 자기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믿음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진리 안에서 바른 방향으로 내딛는 우리의 작은 한 걸음은 그 자체로 기도입니다: “주님, 이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압니다. 그런데 지금 저로서는 이 정도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 나머지를 주님이 채워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를 당신이 원하시는 길로 더욱 이끌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 내가 사랑하기 힘든 사람에 대한 사랑은 다음과 같은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 나를 저주하는 사람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것, 나를 학대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
다윗은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울 왕의 쫓김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그 상황을 끝장내고 싶었을까요? 마침내 그 기회가 왔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윗은 손을 거두어 그를 살려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차마 그 일을 행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후에 이를 알게 된 사울 왕이 다윗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삼상24:17-19)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9-21)
나에게 악을 행하는 이에게 똑같이 악으로 갚지 않고 오히려 그를 위해 복을 빌어주고 기도해주는 것은 그 사람이 행한 악이 ‘악’이 아니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내가 미워해야 할 악으로 인식하고, 그 악이 나 또한 집어삼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저항입니다. 악에 대한 저항이며 불의에 대한 저항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또한 말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5-7)
예수님의 제자들은 원수를 ‘만들지’ 않지만, 예수님의 제자로 살다보면 원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사는 사람을 누군가는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원수처럼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역시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으로 살지는 않으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그분은 못마땅한 존재였고, 급기야는 없애 버려야 할 원수처럼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내다보시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복음서가 쓰여질 당시 교회는 이런 박해의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로마 황제가 아닌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이유로 박해받는 현실 속에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군가에 의해 원수처럼 여겨지거나, 혹은 누군가를 원수처럼 여기게 되는 상황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공동번역)
초대 교회의 문서 중에 주후 2세기에 쓰여진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 라는 제목의 글에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또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조금은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라나 언어나 의복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사람들에 의해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합니다. 그들은 능욕을 받을 때 능욕하는 자를 축복하고, 멸시를 당할 때 멸시하는 자를 존중합니다. 그들은 착한 일을 하는데도 죄인처럼 벌을 받고, 벌을 받을 때는 생명을 얻는 것 같이 기뻐합니다. 그들은 유대인에 의해 공격받고 헬라인에 의해 핍박받지만,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왜 그들을 미워하는지 모른답니다.”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누군가 나에게 한번 폭력을 가한 것으로도 모자라 또 폭력을 가하려 할 때, 누군가 나에게서 하나를 빼앗아 간 것으로도 모자라 더 빼앗아 가려 할 때, 거절하지 말고 내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이 예수님 말씀을 따라 기독교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어떤 상황에도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 주장합니다. 물론 이 주장에도 일리 있는 부분이 있지만, 이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비폭력, 무저항’의 메시지로 일반화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길에서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실제로 그분은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뺨을 맞으셨고, 십자가형이 결정된 후에는 채찍질과 침뱉음을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못박힌 후에는 속옷도 빼앗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그저 무력함 때문에 이 모든 일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이 수난의 여정 속 어느 한 단계에서라도 예수님이 거절하시고 중단하셨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2:23-24)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도 이런 ‘오래 참음’과 ‘온유함’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가장 먼저 꺼낸 말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히브리서에도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10:36)
이처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은 단순히 비폭력, 무저항의 메시지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나아가는 사랑의 길에서 우리가 고난의 상황을 만날 때, 또한 그것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강도를 더해가며 계속될 때, 거기서 뒤로 물러서지 말고 믿음으로 계속 그 사랑의 길을 가라고 권면하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제게는 이해됩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원문에는 “네게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란 말이 문장 서두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구하는 사람이 누구든, 그 대상에 대한 아무런 제한이나 차별 없이 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빌려간 사람이 되갚을 능력이 없을 때 지불을 강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 사람 입장이라 가정했을 때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해주면 좋겠다 하는 그 일을 그에게 해주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세상에서 소위 무난하다 생각되는 삶을 넘어서는 더 급진적인 사랑의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예수님은 분명 보통의 무난한 삶 그 이상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여기서 ‘죄인들’이란 당시 유대 사회 속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여겨지던 사람들을 말할 것입니다. 오늘의 상황 속에서 풀어 말하자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고,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잘해 주고, 자기에게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꾸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씀입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이것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 주는 삶을 살아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뜻일까요? 그런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행실을 조건으로, 그 공로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랑의 길에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는 삶을 살 때 그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확연히 드러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처럼 이웃에게 자비를 행하는 삶은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분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의 복음을 세상에 증거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영 못마땅한 분 계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로마서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6,8)
여기에 더하여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그분이 은혜를 모르는 일과 악한 일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보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죄인에게 자비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인들을 품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동시에 죄를 무겁게 여기며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죄인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그 자비의 공간 안에서 죄인은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그런 분이심을 알려주시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생각하며, 그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나의 구원이 되었음을 기억하며, 그리고 그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그 아들 예수께서 친히 걸어가신 사랑의 길을 생각하며, 우리도 관계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자가 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 모든 죄인들을 위해 보내주신 일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좋은 선물을 보내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자비하신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