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경계를 넘어서

<마태복음 15:21-39>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믿음이 크도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서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 일곱 개와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일 본문의 상황에 바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의 상황 속에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들이 아니라 사람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들임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후 계시던 곳 갈릴리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거기서 나가사…들어가시니”라는 표현이 보여주듯 그것은 경계를 넘어가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그것은 이스라엘 영토의 북쪽 끝인 갈릴리 지방을 벗어나서 그 영토 밖으로 넘어가는 일을 의미했습니다. 갈릴리 북쪽 해안에 위치한 그 두로와 시돈 지방은 이방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며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거기로 왜 가셨을까? 어떤 적극적인 사역을 의도하고 가신 건 아닌 듯 합니다. 마가복음의 평행본문에 보면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7:24) 합니다. 사람 많은 곳을 떠나 좀 쉬려고 가신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의도와 달리 조용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도와 달라며 쉼없이 소리쳤습니다.

마태는 그녀가 “가나안 여자”였다 말하면서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그 여자가 이방인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마가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7:26) 밝힙니다. 여기 ‘헬라인’이라 번역된 Hellenis라는 말은 ‘헬라화된 사람’, 즉 그리스 문화권에 속하여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상류층에 속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녀의 생김새를 통해 그녀가 인종적으로 가나안 원주민 출신 이방인이라는 것을 대번 알아보았을 것이고, 또한 그녀의 옷차림과 말투를 통해 그녀가 문화적으로 그리스어를 쓰는 그 지역 상류층 여인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 만남은 인종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계층적으로 전혀 다른 두 세계에 속한 사람들간의 만남이었습니다. 만약 그 여인의 딸이 그런 상황 속에 있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만남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박한 상황이 그녀로 하여금 경계를 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에서 “나가서”(21) 그곳에 이른 것처럼, 이 여인 역시 자신이 살던 지역을 “나와서”(22)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여기 ‘나왔다’는 말은 단순히 지리적 경계를 넘었다는 의미만이 아닌 듯 합니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녀는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 부르고 있는데, 이 ‘다윗의 자손’이란 호칭은 당시 유대 문화권 안에서 사용되던 메시야 호칭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일행과 그 가나안 여인은 모두 자신들이 거주하던 익숙한 사회-문화적 환경을 벗어나 그 사이 경계선에 해당하는 공간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여인의 간절함이 묻어나는 외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합니다. 의외입니다.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제껏 병든 자들, 귀신들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기꺼이 고쳐주셨던 예수님이 어찌하여 저 여인의 절박한 외침에는 침묵으로 반응하시는 걸까?

그럼에도 여인이 계속해서 소리치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요청합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시끄러워 죽겠으니 그녀를 거기서 쫓아보내자는 제안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동문서답 같습니다. 그러자는 말입니까, 그러지 말자는 말입니까?

여기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란 유대인 가운데 길 잃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던 사람들을 말할 것입니다. 세리, 창녀, 나병환자, 귀신들린 자와 같이, 유대인 중에서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낙인찍히고 그 바운더리 밖으로 밀려나 있던 사람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런 소위 ‘부정한 유대인들’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그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초청하신다는 복된 소식 전하는 것을 예수님은 그분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은요? 유대인들에게 역시나 부정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던 이방인들은 예수님의 사역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까? 본문의 예수님 말씀은 그런 의미로 들립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좀 당황스럽습니다.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신 일이나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신 일에서 볼 수 있듯, 예수께서 이방인에게 치유를 베푸신 사례가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그분의 증인이 될 것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을 것을 명하시기 때문이고, 실제 그 일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순서상의 우선순위를 말씀하고 계신 걸까? 유대인 먼저, 그 다음에 이방인. 지금은 아직 유대인. 이방인은 좀 더 기다려! 마가복음의 기록은 그런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7:27) 그러나 마태복음은 그런 해석의 여지를 단칼에 잘라버립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에 더하여 예수님은 상대방에 대한 경멸적 뉘앙스가 담긴 더 심한 말씀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자녀’는 유대인, ‘개들’은 이방인을 말함이 분명합니다. 자기 딸을 위해 요청하는 그 이방 여인을 향한 단호한 거절의 메시지로 들립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매정하게 반응하시는 걸까? 어떤 학자는 이것이 예수님의 본심이 아니라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일부러 하시는 행동이라고 해석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그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 대해 갖고 있던 혐오와 경멸의 정서를 예수님의 제자들도 갖고 있었고, 그 이방 여인의 믿음을 통해 이를 깨뜨리시며 도전하시려고 짐짓 그 입장에서 예수님이 연기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그 두로(Tyre) 사람들을 유대인 입장에서 “가장 쓰라린 원수들”로 묘사합니다. 과거로부터 두로와 시돈은 남쪽과 동쪽으로의 영토 확장을 꾀하였고,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지속적인 위협과 실질적인 피해를 안겼습니다. 또한 갈릴리와 두로 사이에 위치한 시골 지역들에는 가난한 유대인 소작농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착취적 조건 속에서 두로의 상류층들을 위한 양식 생산에 봉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당시 유대인들이 그 두로 주민들, 그 중에서도 그 지역 상류층들에 대해 어떤 정서를 갖고 있었을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혐오와 경멸, 그 부정적 정서 속에서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 이방인들은 ‘개’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방 여인을 개에 비유하신 본문의 예수님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바로 그 표현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방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매정한 반응이 제자들 교육 목적의 일종의 연기였다는 해석은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보통 그런 경우 예수님은 어떤 일 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그것을 하라 말씀하신 후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나 지켜보십니다(마14:16-18). 그런데 오늘 본문의 상황은 좀 다릅니다. 예수님은 연거푸 세 번 여인에게 거절의 메시지를 나타내십니다. 제자들에게 묻지도 않으십니다. 심지어 상대방에게 심한 말까지 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의 본심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저처럼 생각하는 신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 역시 그 두로에서 가까운 갈릴리 지방에서 30년을 사셨습니다. 자신의 동족과 이웃들이 그 이방인들에 의해 시달리며 고통당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다 지켜봤을 것입니다. 그 각각의 경험들은 예수님 속에 어떤 감정과 정서를 불러일으켰을까요?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억울하게 고통을 겪을 때 저와 여러분 속에서는 무엇이 올라옵니까?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생각할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런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그래선 안 되지 않나? 예수님은 안 그러시지 않았을까? 울분도 미움도, 혹은 선입견이나 복수심도 그분 마음 속에는 아예 없지 않았을까?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그렇게 보는 것이 과연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르게 이해하는 길일까요? 우리와 같이 혈과 육을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사셨던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분은 어떤 상황에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보그 로봇 같은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는 공감 불능의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그분은 울었고, 때때로 그분은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공감했습니다. 

세상의 불의에 대해, 그리고 그 일을 조장하는 존재들에 대해, 예수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우리보다 더 분노와 미움을 느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와 달랐던 점, 아니 우리보다 나았던 점, 우리에게 따라오도록 본을 보이신 부분은 그 분노와 미움이 죄악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이루어가는 순종적 행동으로 변환되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변화가 필요없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꺼이 변화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일방적으로 다른 이에게 영향을 미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영향을 받기도 하는 존재였습니다. 성부,성령 하나님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분별해가고 거기에 기꺼이 자신을 맞춰가며 그 뜻을 함께 이루어가는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완벽한 분이고 변화가 필요없는 분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신앙적인 모습 같지만, 사실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은 그렇게 완벽한 분이니까 그 상황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런 예수님과 달라서 그 상황에서 그렇게는 못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참된 믿음 안에서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가 그분이 하신 일보다 큰 일도 할 것이라고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는데도 말이지요(요15:4;14:12).

다시 본문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계속 소리지르며 요청하는 그 이방 여인을 거기서 쫓아버리자는 제자들의 제안에 예수님은 동의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다만 그분의 입장을 제시하시고, 그녀가 계속 거기에 함께 있을 수 있게 하십니다.

함께 있는다는 것, 함께 있을 수 있게 한다는 것, 다른 누군가에게 함께 있는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고 제공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어쩌면 불편할 수 있는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여지가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창조된 공간 속으로 여인이 자기 몸을 던져 뛰어듭니다. 예수님께 절하며 다시 또 청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녀가 예수님을 ‘주’(kyrios)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녀가 예수님께 나아온 이유가 단순히 절박함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듯, 그녀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방인들을 개에 비유하며 거절의 의사를 밝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녀는 자녀의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자비만을 구할 뿐입니다. 개들도 주인의 자비를 입을 수 있음을 피력하면서 여전히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둔 부모라고 해서 모두가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한다고 하는 일들은 진정 자식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기 자존심을 위한 일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인의 믿음에 예수님도 놀라셨습니다. 그녀의 소원대로 이루어주십니다. 딸이 귀신들림으로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던 그 가정에 놀라운 변화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변화를 경험한 것은 그 여인의 딸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또한 그 일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증거들이 이어지는 본문들 속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9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큰 무리가 예수님의 치유를 바라고 여러 장애인들을 데리고 거기로 모여들었다 합니다. 여기 ‘갈릴리 호숫가’가 어디를 말하는지 마태복음에는 분명히 나오지 않지만 마가복음의 평행본문은 그 여인과의 만남 이후 예수님 일행이 지나간 동선을 보다 자세히 알려줍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7:31)

다시 말해, 그 여인과의 만남 이후 예수님은 더 북쪽에 위치한 이방 도시 시돈을 지나 요단강 동편에 주로 포진해 있는 데가볼리(Decapolis), 즉 열 개의 헬라도시 중 몇몇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 동편에 이른 것입니다. 후에 예수님이 배에 오르사 갈릴리 호수 서편 “마가단 지경으로 가셨다”(마15:39) 하는 것으로 보아, 오늘 본문 29절 이하에 기록된 치유사역들과 무리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갈릴리 호수 동편에서 이루어진 일들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사역이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지를 유추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 지역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 여인과의 만남 이후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예수님의 사역이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 본문에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가 본문 31절에 나옵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여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 말을 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 예수님의 치유사건 속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방인인 그들 가운데서도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그 말을 한 것입니다.

이어 거기 모인 수많은 무리를 예수께서 먹이신 사건이 나옵니다. 사흘이나 그들은 거기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굶겨 보내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거기 있던 빵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를 먹이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이미 그 앞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아무리 엄청난 기적이었다 해도 전에 있었던 일과 비슷한 사건을 복음서 기자들은 왜 굳이 다시 기록했을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혀 다른 의미와 성격을 지닌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행하신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 이방인들에게도 그분의 마음을 열어 생명의 빵을 먹여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이것은 엄청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36)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 예수님의 사역에 그들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이 남은 조각들은 후에 이어질 이방인 선교를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지리적 경계를 넘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어떤 대단한 일을 하려고 계획하고 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귀신들린 딸의 치유를 요청하는 한 이방 여인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물론 예수님도 그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놀라운 믿음을 발휘했습니다. 그 믿음이 예수님을 통한 딸의 치유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만남을 통해 변화를 경험한 것은 여인의 가정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다음 행보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후 예수님의 발걸음은 이방인들이 사는 다른 더 많은 지역들로 향했고 거기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원래 계획에 없던 이방인 사역이 왕성하게 펼쳐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뒤에 일어난 이 기적들은 앞에 있었던 그 만남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 그 가나안 여인이 나타낸 놀라운 믿음으로부터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 예수님의 사역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지금 바로 이루어지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마음을 열어 이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 분별과 순종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갈 수 있는 통로와 발판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주는 메시지를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선교는 경계를 넘어가는 일을 포함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혹은 사람들 속에 있는 경계와 장벽을 넘어 하나님 사랑의 복음이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로 흘러가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선교는 그 일에 부름받고 보냄받은 사람들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일을 위해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고 자기 마음 속 미움과 편견의 장벽을 허무는 과정 속에서 복음은 전파되어 나갑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사랑은 막힘 없이 우리 주위 사람들을 향해 흘러갈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요청되는 그 변화는 하나님과의 상호작용, 또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과정은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변화가 필요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또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갑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경계를 넘어가는 여정 속에서 예수님은 한 만남을 경험하셨고, 그 만남이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깨닫는 계기가 되어 또 다시 경계를 넘어가는 여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 속 장벽을 허물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막힘 없이 흘러갔습니다.

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우리에게 따라오라 부르시는 길인 줄 믿습니다. 그 길을 따라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고 하나님의 선교에 겸손히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