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0년 5월 24일)
- 마가복음 8장 13-21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떼어 줄 때에 - 마가복음 8,13-21.docx
<마가복음 8장 13-21절>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예수님 일행이 호수 건너편으로 가려고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점심꺼리 챙겨오는 걸 잊어버렸습니다.
다 뒤져 봐도 배 안에 빵 한 개 뿐이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경고하며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여라!
제자들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수군거립니다.
우리에게 빵이 없어서 저러시는거야.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 빵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 그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구나!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구나!
경험했어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두 번에 걸친 광야의 기적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고 열두 바구니나 더 남긴 일,
또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이 먹고 일곱 광주리나 더 남긴 일,
그때 그 일들을 통해 그들이 뭔가 중요한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고,
아니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한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빵의 문제, 먹고사는 문제는 늘 예민한 사안입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로 염려하거나 서로 다툴 때가 많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누룩은 곡물 반죽에 넣어 빵을 부풀리는데 쓰는 효모를 말합니다.
누룩의 퍼져나가는 속성, 그것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좋은 것이 퍼져나가면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나쁜 것이 퍼져나가면 부정적인 의미를 띨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가루 서 말 속에 넣은 누룩에 비유하셨는데,
이때 누룩은 하나님 나라의 퍼져나가는 속성을 묘사하는 긍정적 의미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누룩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가지 않아야 할 해악들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란 ‘종교성의 부풀림’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부족과 결핍, 허기와 갈망 속에 있는 개인과 민족을 향해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철저한 준수를 해법으로 내놓았습니다.
사람의 행복과 번영이 하나님의 법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달렸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에, 그들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종교적 틀은 사람들을 자유롭게도 배부르게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의 잔칫상에서 먹고 마시는 양식과 음료로 제시하지 않고,
그저 규칙 다발로 묶어서는 마치 말이나 소에게 하듯 사람에게 짐을 잔뜩 지웠습니다.
그것은 행복과 번영을 미끼로 사람 마음에 두려움을 조장해 윽박지르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자비롭고 너그러운 하나님을 이처럼 냉혹한 폭군의 이미지로 왜곡시켰습니다.
종교와 종교인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르는 것을 돕기 위해 존재합니다.
종교와 종교인이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 때는
오직 그 자신이 하나님의 채우심을 위해 비어 있을 때입니다.
부풀려진 종교성은 사람을 자유롭게도 배부르게도 하지 못합니다.
한편 헤롯의 누룩이란 ‘세속성의 부풀림’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에돔 족속으로서 로마권력에 빌붙어 이스라엘의 왕좌를 차지했던 헤롯가문,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적 안정을 통한 정권의 유지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어 열심히 로마에 갖다 바쳤고,
또 적당한 당근과 채찍으로 유대인 동조자 확보에도 힘썼습니다.
성경에 ‘헤롯당원’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헤롯정권의 동조자들이었고,
소위 ‘헤롯성전’이라 불리던 성전이 헤롯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지어준 것이었습니다.
부족과 결핍, 허기와 갈망 속에 있는 개인과 민족을 향해
헤롯당원들이 제시한 길은 적당한 타협을 통한 살아남기였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라도 잃지 않으려면 헤롯이라는 세속권력에 잘 보이자는 것입니다.
역시나 생명과 안전을 미끼로 사람 마음에 두려움을 조장해 지배해가는 방식입니다.
이 속에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게 다라고 생각하며, 그 이상의 것을 소망하지 못합니다.
헤롯정권이 약속하는 거짓평화, 헤롯성전이 주는 적당한 위안과 자부심에 기대 살아가면서,
그 땅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흘려보내는 통로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을 때는
오직 그 자신이 하나님의 채우심을 위해 비어 있울 때입니다.
부풀려진 세속성은 사람을 자유롭게도 배부르게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종교성의 부풀림과 세속성의 부풀림이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퍼져나가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부풀림이 아니라 떼어줌입니다.
그분은 거기 있는 사람들에서 시작하시고,
또 거기 주어져 있는 것들에서 시작하십니다.
그런면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현실적인 분이십니다.
그날 예수님은 거기 목자 없는 양들처럼 방황하며 허기진 사람들이 있음을 보셨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먹을 것이 필요함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빈들에서 그 인원을 다 먹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말했지만,
예수님은 거기 빵 몇 개가 있는지 가서 알아보라 하셨습니다.
한 아이가 자기 가진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내놓았을 때,
예수님은 그 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 하신 후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하시고
또 그와 같이 물고기도 나누셨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다 배불리 먹고, 심지어 남기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현실의 사람과 사물에서 시작하셨지만,
그분의 존재와 행위 속에는 어느덧 초월성이 깃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다가 유독 눈에 들어온 말이 있었습니다.
19절과 20절에 반복해서 나오는 ‘떼어 줄 때’라는 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여기서 ‘뗀다’는 말의 영어표현은 ‘break’, 체코어로는 ‘lámat’,
‘쪼갠다, 깬다, 부순다, 찢는다’는 뜻입니다.
그날 빈들에서 예수님을 통해 빵과 생선을 먹었던 사람들 중에
쪼개지지 않은 빵, 찢기지 않은 생선을 먹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받게 되는 음식,
또 그 제자들의 손으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음식은
이처럼 쪼개진 음식, 즉 ‘조각’(a piece)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유익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부풀림이 아닌 떼어줌의 삶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 행하던 일 중 하나는 함께 떡을 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빵을 쪼개 거기 있는 모든 사람과 나누어 먹는 일,
그것은 생전에 예수께서 사람들과 더불어 행하신 대표적인 일이었고,
특히 마지막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늘 그래왔듯 빵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 하신 후
그것을 쪼개 제자들에게 나눠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
그날 제자들이 받은 것도 쪼개진 음식이었고,
그것은 우리 모두를 위해 찢길 그분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음식은 말씀이 되고, 말씀은 음식이 되고 있었습니다.
떼어줌은 자기희생을 의미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떼어줌’입니다.
그분의 삶도, 죽음도 ‘떼어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의 삶도 ‘떼어줌’의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내 것을 키워 더 근사하게 만들려는 욕망을 갖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내 것을 쪼개 끝없이 나누는 삶으로 초청받습니다.
나눔의 삶은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음이 있는 삶입니다.
온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은 우리에게 자비롭고 너그러운 분이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나눌 수 있고, 또 끝없이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옛날 빈들에서의 기적은 떼어줌의 기적이었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깨닫기 원하셨던 것은 이 떼어줌의 신비였습니다.
떼어주고 떼어주고 또 떼어주어도 계속해서 나누어줄 것이 있었던 그 손,
그 일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묘사할 길은 없지만,
그와 같은 떼어줌의 기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작은 나눔이 수많은 사람의 연쇄적 나눔으로 이어진 사례들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 나라의 좋은 누룩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감과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엔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지역에선 남아서 버려지는데, 다른 지역에선 없어서 죽어갑니다.
기아의 문제는 인류가 마음만 먹으면 해결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러지 않고 있기에 죄악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아프게 가슴을 칩니다.
우리가 떼어 나눌 것이 빵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다채로운 선물들을 여러 사람에게 흩뿌려 놓으셨기에,
우리 모두에게는 내 것을 떼어 다른 이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내게 떼어 주는 것을 받을 때
내가 받게 되는 것은 그 보이는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떼어줌이 모두의 배부름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채우심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적 열심을 댓가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시며 늘 너그럽게 베푸십니다.
마귀는 온 세상 모든 것이 다 제 것인양 큰소리치며
자기에게 절하면 그 모든 걸 보상으로 주겠다 허풍을 떨지만,
사실 온 세상 모든 것은 우리 하나님의 것이며,
그분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눈을 뜨길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에 눈이 열리길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어떤 식으로 임하는지 깨닫길 바라셨습니다.
금식하여 주리신 예수님께 마귀는 돌로 빵을 만들라 하며
세상의 모든 배고픔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라 부추겼지만,
예수님은 이를 거절하시고 그분 손에 들린 작은 빵 하나를
쪼개 나눠주는 일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우리도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을
감사함으로 쪼개 나누는 일에서 시작하면 어떨까요?
부풀려진 곳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쪼개어 비어진 곳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그 은혜로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살 것입니다.
이 떼어줌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며 전파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내게 주어진 것을 감사함으로 쪼개 나누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생명의 빵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