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1년 9월 19일)
- 출애굽기 22장 18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 출22,18.docx
<출애굽기 22:18>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보신 분들은 놀라고 당황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그럼 전세계 수많은 무속인들을 다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런 얘기 하려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 중에는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거나, 그대로 적용해선 안 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시대적 맥락과 무관하게 언제나 문자 그대로 적용하려는 태도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옛적 말씀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5:19)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그 어떤 계명도 이유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무관하게 주어진 것이 없음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율법 조항 하나하나를 가지고 사람을 정죄하고 구분짓는 데 집중했던 당시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드러내시며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데 집중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그 시대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먼저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 기반 위에서 그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려보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도 바르게 이해하며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봅시다.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파라오의 압제에서 해방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시내 광야에서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실 때 주신 계명입니다.
이 계명이 그로부터 40년후 모압 평지에서 행해진 모세의 설교 속에서 더 확장된 형태로 다시 언급되는 것을 봅니다.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될 광야 2세대들에게 모세는 그 땅 백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라는 맥락에서 이 말을 합니다.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신18:9-11)
점을 치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는 행위입니다. 길흉을 말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내가 어떤 걸 계획하고 있는데 그게 잘 될지 안 될지에 대한 말입니다. 또 무당이 하는 일 중에 ‘굿’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의식이나 제물, 혹은 마술적 처방으로 귀신을 달래고 사람의 길흉과 운명을 바꾸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그밖에 죽은 이의 영과 교통하여 미래의 일을 예측하려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 해주는 존재를 가까이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삶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그분의 마음과 뜻을 명확히 말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그분 앞에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알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나 가나안 백성들처럼 신의 뜻을 알아내려고 저와 같은 사술을 쓸 필요나 이유가 이스라엘에게는 없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배경 속에서 모세는 신명기 29장 29절에서 ‘하나님께 속한 일’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한 일’을 명확히 구분지어 말합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라”
하지만 이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저 유혹은 항상 있어 왔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도 점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합니다. 정확한 관련근거를 찾으려다 못찾았는데, 어떤 신문기사에서는 기독교인 10명중 3명꼴이나 된다 합니다.
왜 사람들은 점을 보러 가는 걸까요? 요즘은 재미로도 많이 본다 합니다만, 근본적인 이유는 불안 때문일 것입니다. 앞날에 대한 불안, 잘못될까 하는 것에 대한 불안. 그 불안한 미래를 미리 알고 대비한다면 삶의 안정을 잃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앞에 신문기사에 보니까, 기독교인이 점 보러 가는 게 뭐가 문제냐,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를 그런 식으로 제거하고 나면 신앙생활도 더 편한 마음으로 더 잘 할 수 있지 않냐, 말하는 이가 있던데, 저는 그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신앙생활’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들을 남기고는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고자 남겼다고 둘러대자 하나님께서 사사 사무엘을 통해 그를 책망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헛된)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다… 여기 ‘거역’으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자신의 주장을 강요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사울의 시도를 나타냅니다. 사무엘은 그것을 ‘점치는’ 일에 비유하며 책망하는데,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점치는 사람들이 여러 표지를 사용해 신을 기쁘게 하는 법을 알아낼 수 있다 주장하듯, 사울 역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뭔지 스스로 알고 행하였다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보다 본인 판단을 앞세워 행동하고는, 그럴 듯한 말과 튼실한 제물로 하나님을 달래며 조종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려 하기보다, 내가 스스로 옳다고 판단한 것, 내가 바라고 욕망하는 것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 그 사람은 ‘점치는 자’가 되는 셈입니다. 스스로 무당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려 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어떤 것, 내가 선택하려는 어떤 길에 대해 옳다고 말해줄 어떤 권위 있는 존재를 찾아다니며, 그에게 나의 선택과 결단을 의존하는 모습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일종의 ‘점 보는 자’가 되는 셈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무당의 역할을 수행해주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그 무당이 내가 됐든 남이 됐든, 그 무당이 우리 삶의 자리에서 설치게 놔두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책임있는 주체로 서라! 저는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무당에 의존하는 삶은 내가 원하는 미래를 보장받고자 그 길에 거치는 것들을 제거하려는 삶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바라시는 삶은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그분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기는 삶입니다. 이것은 나의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고 희생해야 하는 삶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넓고 온전한 품 안에서 자유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삶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앞에 길을 놓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 안에서 그 길을 보고 그리로 걸어갑니다. 어떤 사람은 보고도 그 길로 가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예 그 길을 보지도 못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겐 두 개의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 경험과 생각과 욕망의 길을 따라 그냥 그 얕은 물가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시몬 베드로의 경우에서 보듯이, 말씀에 순종하는 그 한번의 결단은 이전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나은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젖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순종할 텐데, 들을 수 없어 못한다 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시는 게 더 정확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분명한 마음의 결단이 서 있다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고, 자기 신념과 욕망을 따라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좀처럼 자기만의 좁은 동심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의 성장을 바라듯 하나님도 우리의 성장을 바라십니다. 아이가 걸을 수 있도록 때가 되면 부모가 아이 걸음마를 연습시키듯, 하나님도 우리를 지금 머물고 있는 세계 너머로 이끄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전에 서 있던 안전한 자리에 계속 머무를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제가 아는 한 사람이 지방에서 교육대학를 졸업하고 향후 진로를 놓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생각해볼 수 있는 선택지로는 임용고시를 쳐서 교사가 되는 것과 어린이 대상 교육사업에 뛰어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그 해 그 지역에서 그 전공에 대한 교사 티오가 한 명도 배정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청년은 매일 시간을 정해 기도하고 말씀 읽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평소 별로 친하지 않던 과친구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함께 서울로 가서 임용고시를 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 방법도 있겠구나, 처음엔 그 정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울에 대한 막연한 동경보다는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기왕이면 부모님 계신 고향에 계속 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 성경을 읽는 중에 앞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떠나라 하시는 말씀이 마음에 강하게 부딪혀 왔습니다. 하나님이 서울로 떠나라 말씀하시는 것 같았고, 두려움 많은 자기를 위해 그 친구를 붙여 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결단하고 서울로 가서 시험을 쳤습니다. 결과는 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떨어졌습니다. 친구 의지하고 서울에 왔는데, 이제 의지할 대상 없이 혼자 서울살이를 해야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로부터 6개월 후 그 고향 지역에서 갑자기 그 전공의 교사를 다수 선발한다는 공고가 떴습니다. 이 또한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친구는 그 시험에 합격하여 편안히 거기서 교사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처음에 그녀는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지나온 모든 일들이 특별하고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상황을 통해 그녀를 신실하게 인도하셨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내가 가려던 어떤 길이 막히는 상황은 또 다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기회의 문일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는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어떤 길로 나를 이끌어가시기 위해 때로 하나님은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던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서 기다릴 때, 이처럼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이 선택의 상황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여기냐 저기냐가 아닙니다. 그게 뭐가 되든 어쩌면 하나님께는 모두 오케이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데 있어서 진짜 중요한 문제는 어떤 마음, 어떤 동기, 어떤 과정에 의해 그것이 선택되느냐입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에서 우리 영혼에 깊은 신뢰의 발자국을 남기십니다.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가 신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길 바라십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앞에 진실하고 책임있는 주체로 서길 바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분이 예비하신 더 좋은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시길 원하십니다. 물론 신뢰는 하루 아침에 생겨나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 만큼 신뢰는 자라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귀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 삶의 자리에 무당이 설치게 놔두지 않고, 하나님 말씀 앞에 책임있는 주체로 서서 반응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