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순례자들

<히브리서 11: 8-16, 39-40>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아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사람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 ]

39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로 시작되는 히브리서 11장은 여러 믿음의 선진들의 사례를 열거하면서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1-3)

“가라!”는 명령과 함께 주어진 것은 약속이었습니다. 땅이 약속되었고, 자손이 약속되었고, 함께하심의 복이 약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의 말씀 외에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은 아직 없는 상태였습니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 땅이 어디인지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떠났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창12:4). 그가 전에 있던 곳 하란을 떠날 때 칠십오 세였다고 합니다. 그의 걸음은 가나안 땅을 향해 옮겨졌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2:7)

그러므로 성경은 이 아브라함의 떠남이 ‘믿음’의 행동이었다고 말합니다. 보이는 것을 따라 행하지 않고 받은 약속을 따라 행한 신뢰의 여정이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 ‘떠남’의 행동 속에서만 발휘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머무는’ 행동 속에서도 발휘되었습니다. 이어지는 9절에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stay)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아브라함이 가족을 이끌고 들어간 그 땅에는 이미 다른 부족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그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셨지만 그 일은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 본인은 물론 그의 아들 이삭, 손자 야곱의 대에도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본문에 언급된 대로, 대를 이어 그들은 그 약속의 땅에 거류하였지만 마치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그곳에 거류하였습니다. ‘장막에 거하였다’는 말은 텐트를 치고 살았다, 마치 일시체류자와 같은 모습으로 그 땅에 거하였다는 뜻입니다.

해외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일시체류자의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곳은 우리의 모국이 아니므로 여기서 계속 체류하려면 체류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잘 살고 있다가도 ‘아, 내가 외국인이구나!’ 인식하게 만드는 일들을 잊을 만하면 한번씩 겪습니다. 이 일시체류자의 삶은 현지인들의 호의와 도움에 상당 부분 의존해 있습니다.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그 땅의 정착민 헷 족속에게 가서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메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23:4) 그렇게 은 사십 세겔에 구매하여 아내를 장사했던 막벨라 굴, 그것이 아브라함이 그 땅에서 말년에 취한 유일한 소유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에게 주어진 것도 약속이었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말씀하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stay)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26:2-3)

이처럼 우리는 믿음으로 떠나기도 하고 또 믿음으로 머물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떠남과 머뭄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떠나거나 머무는 이유일 것입니다. 본문 10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처럼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는” 삶이었음에도 아브라함이 그곳에 계속 머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가나안 백성들에 의해 그곳에 이미 세워져 있던 성읍(city)도 아니고, 아브라함 자신이 그곳에 새로 건설할 성읍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터(foundation) 잡으시고 세워 주실 성읍을 그가 바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외국에서 십여 년 살면 삶의 기반(foundation)이 조금씩 잡혀 갑니다. 장기비자를 받기도 하고, 안정된 일자리를 얻기도 하고, 집을 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삶의 기반’이라는 것이 이런 눈에 보이는 것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그 십여 년의 시간 동안 여러 일들을 겪고 또 여러 관계를 맺으며 한 사람의 내면과 그의 관계 속에도 보이지 않는 어떤 삶의 기반이 닦여지고 형성됩니다.

그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사는 동안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칠십오 세에 들어와 백칠십오 세에 죽을 때까지 그 백 년의 시간 동안 아브라함에게 유업으로 주어진 땅은 그 막벨라 굴이 전부였지만, 하나님은 후에 그의 후손들이 유업으로 받을 성을 짓기 위한 터를 이 아브라함을 통해 닦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다만 그를 복 주시기 위함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혼자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이루어야 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를 부르시고 보내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며 그를 통해 일하심으로 인해 이루어져갈 일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나에게만 복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통해 다른 많은 사람이 복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복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흘려보내며 살 수 있을 뿐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요청되는 첫 번째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어 있게 하시는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에 이미 세워져 있는 도시로부터 무언가를 얻길 바라는 마음으로 떠나고 또 머뭅니다. 혹은 그곳에서 내가 무언가를 새롭게 세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떠나고 또 머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와는 다른 동기와 기준에서 어딘가로 떠나거나 어딘가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 떠남의 결과 이르게 될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부르신 이를 신뢰하며 어딘가로 떠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분이 친히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며 어딘가에 머물 수 있습니다.  

후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이 백 세 때, 사라가 구십 세 때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이미 나이가 많아 아이를 잉태하거나 해산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시점에 이듬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하셨고, 약속대로 그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또한 ‘믿음’의 행위였음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에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그녀가 힘을 얻어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칠십오 세 때 그를 부르셔서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그로부터 이십오 년이 흐른 시점에 그에게 ‘아들 하나’를 주셨습니다. 땅에 대한 약속 만큼이나 후손에 대한 약속도 너무나 더디게 이루어져간 느낌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놀랍게 성취되었는지 압니다.

그 약속은 아마 아브라함이 처음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속에서, 아마 그가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성취되었습니다. 그의 혈통적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성경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갈3:29),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갈3:9) 자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본문 12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이삭과 야곱…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살아생전에 약속받은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합니다. 마치 말년의 모세가 느보 산에 올라 약속의 땅 가나안을 멀리서 보고 이를 환영하며 생을 마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 있는 동안 자신들이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그들의 말과 삶으로 증언하였는데, 그들이 이같이 말한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본향’(homeland)이란 본디의 고향을 말합니다. 본디의 고향이 다른 데 있고, 그곳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기에, 지금 있는 그곳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사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찾는 본향은 어디를 말할까요?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들이 찾는 본향이 그들이 떠나온 하란이나 우르를 말하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거기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고 또 그렇게 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본향은 그곳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제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게 되었고,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것’이란 말은 이 땅에서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란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으나 아직 이 땅에 온전히 실현되지 않은 것, 하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셨기에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지고 드러날 그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읍을 말합니다. 그것을 사모하였기에 그들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있으라 하신 그곳에서 부르신 이의 뜻을 행하며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다는 말은 그 가나안 땅 사람들과 교류 없이 고립된 삶을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땅에 속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따라 살지 않았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그 땅 사람들을 존중하고 때로는 그들의 일에 관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땅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 땅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그대로 따르며 살았다면 거기서의 삶은 좀 더 수월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고, 이에 그의 정체성은 더욱더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은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모두가 아브라함이 ‘본향 찾는 자’였음을 나타냅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읍, 그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의 삶이었습니다.

‘순례자’(a pilgrim)란 어떤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목적을 위해 어떤 거룩한 곳을 향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을 향해 여행을 떠나는 순례자의 삶입니다. 그 순례(pilgrimage)의 여정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온전히 빚어집니다.

이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며 하나님이 있으라 하시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통로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으로 대하는 사람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한 성을 예비하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마지막 두 절은 이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 오늘의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이 말씀은 바로 이해되기 쉽지 않은데, 풀어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살아생전에 약속된 것들을 다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후에 등장한 다른 많은 믿음의 사람들, 특별히 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그 약속된 것들은 더 온전히 성취되었고, 지금도 성취되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그 하나님의 약속은 그가 걸어간 믿음의 삶만이 아니라 후에 그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다른 많은 믿음의 삶들이 거기에 더해짐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 온전한 성취를 이루게 될 약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같은 원리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믿음의 삶은 후에 그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또다른 믿음의 삶들을 통해 온전함을 이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삶은 설령 그 의미와 보상이 우리 살아생전에 다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결코 잊혀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세우시고 드러내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분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갈6:9).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한 편지에서 <천로역정>을 묘사한 한 그림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모래로 뒤덮인 길은 언덕을 지나, 꼭대기에 천성이 있는 산까지 이어집니다.

위에는 도성으로 가기 원하는 순례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몹시 피곤했던 그는 길가에 있는 여성에게 가서 이렇게 묻습니다.

길을 따라가면 끝까지 올라갈 있을까요?”

, 끝까지 있어요.”

하루 종일 걸릴까요?”

아침부터 밤까지 걸리지요.”

길은 종종 구부러져 있고, 때론 무척 거칠지라도, 여정의 끝에는 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가 마땅히 이르러야 할 곳으로 인도해주는 그 길을 찾으셨나요? 그렇다면 그 길이 설령 종종 구부러져 있고, 또 때로 무척 거칠지라도,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그 길은 힘써 걸어갈 만한 가치와 보람이 있는 길일 테니까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순례자들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있으라 하시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며, 하나님의 사람,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 속에 이루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