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3: 온유한 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5절)


오늘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팔복 중에 세 번째, 온유한 자의 복에 대해 살펴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우리말 사전에서 ‘온유하다’는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 하면, 성품이나 표정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 화를 잘 내지 않고 자기 주장을 강하게 관철시키려 하지 않는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된다? – 말씀이 바로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 성향의 사람이 땅을 차지하기 더 쉬워 보입니다. 따라서 이 예수님 말씀을 잘 이해하려면 ‘온유한 자’, ‘땅의 상속’ 같은 표현들이 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오늘 본문의 예수님 말씀이 구약의 시편 37편과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로 시작되는 이 시편의 10-12절은 이렇습니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편 37:10-12)


여기서 ‘온유한 자’란 문맥상 이런 뜻입니다.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며 소망하는 사람. 악을 응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고, 인간인 내가 할 일은 힘써 선을 행하는 것임을 아는 사람, 그렇게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자기가 가로채서 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히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국 땅을 차지하며 하나님 주시는 복을 누리리라고 합니다. 여기 ‘온유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나브’는 ‘가난한, 비천한, 겸손한’의 뜻을 갖습니다. 이로 볼 때 ‘온유하다’는 것은 한 인간의 타고난 성품을 말한다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달은 사람이 보이는 겸손하고 절제된 태도라 하겠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 ‘온유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라우스’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의 다른 데서 등장하는 경우는 단 세 번인데, 그 중에 두 번이 예수님과 관련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11장 29절인데요, 여기서 예수님은 그분 자신을 ‘온유한’ 자로 묘사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태 11:28-30)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속에는, 나날의 삶에 지치고 쇠잔해진 사람들, 죄의 짐에 짓눌린 사람들, 그리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부과된 율법의 짐, 종교적 의무에 억눌린 사람들이 모두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께 나아오도록 초청하시며 ‘마음의 쉼’을 약속하십니다. 그 ‘마음의 쉼’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존재 자체로 사랑하시며 귀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또한 그 ‘마음의 쉼’은 우리 역시 예수님의 그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그분께 배울 때 삶 속에서 더 온전히 경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만약 우리가 그 예수님의 멍에를 메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 다른 멍에를 메고 나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로부터 생각해봅니다. ‘온유한 자’란 누구인가?

한 마디로 그는, 예수님 닮은 사람일 것입니다. 한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 남의 눈에서 티끌을 찾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고, 그를 내 뜻대로 변화시키려는 집착에서 자유로운 사람… 그의 짐을 함께 져주고, 내 안에 그가 머물며 쉴 곳을 남겨놓는 사람… 그렇게 하나님이 친히 일하실 자리를 준비하고 소망 중에 기다리는 사람… 어둔 세상을 보고 야유하기보다는 그 속에 있는 희망의 단초를 보고 기뻐하는 사람…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배울 때, 우리도 그분처럼 이런 사람으로 살 수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온유함’이 언급되는 또 하나의 구절은 마태복음 21장 5절로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이 묘사된 부분입니다. 공생애 말미,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건 분명 왕의 입성이었지만 너무도 초라한 왕의 등장이었습니다. 한 세기 반쯤 전에 유다 마카베오라는 유대인이 이방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위풍당당하게 말을 타고 입성하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군사적 메시아를 기대하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쓴 마태는 예수님의 이 초라한 입성을 구약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면서, 메시아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손한 왕으로 오셨음을 강조합니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탔도다” (마태 21:5)


여기 ‘겸손하여’로 번역된 단어가 본문에 ‘온유한’으로 번역된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선택된 동물은 군사적 정복에 적합한 왕가의 군마가 아니라, 짐을 싣는 비천한 동물이었습니다. 문득 예수님을 향한 세례 요한의 외침이 생각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 1:29)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세상 죄인들을 폭력으로 응징하는 ‘강한 정복자’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온유한 왕’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생각해봅니다. ‘온유한 자’란 누구인가?

자기를 남보다 우월한 자로 여겨 구분짓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난 틈을 사랑으로 메워가는 사람… 자기를 내세우려는 허망한 욕망의 부질없음을 알기에, 어느 경우에나 호들갑스럽지 않은 사람… 자기 속에 이미 사랑받는 자로서의 굳건한 자존감과, 보냄받은 자로서의 확실한 사명감이 있기에, 기꺼이 내려가고 기꺼이 얽혀들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순수히 열망할 수 있는 사람… 겉으로 보이는 부드러움과 연약함 이면에 그처럼 단단함과 강인함을 지니고 있는 사람… 이것이 왕으로 오셨음에도 ‘겸손하여 나귀를 타신’ 예수님에게서 비쳐나는 ‘온유한 자’의 참 모습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의미의 ‘온유한 자’가 되고 싶습니까? 김기석 목사님의 책을 보다가 개인적으로 와닿는 내용이 있어 공유합니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목소리 큰 사람, 너무 열정적인 사람이 무서워졌다. 열정이 없는 삶의 권태로움을 모르지 않는다. 찬 샘과 같은 인격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열정적인 사람의 큰 소리는 때로 강박적이고 지나친 열정은 폭력적임을 너무 오랫동안 경험해왔다… 어려웠던 시기, 젊은이들에게 회색분자라는 낙인은 젊음의 사망선고처럼 인식되었다. 하지만 회색을 용납하지 않는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름다웠던가? 과도한 열정은 충족되지 않은 부분을 남기게 마련이고 연소되지 않고 남은 찌꺼기는 독성으로 변하곤 한다. 자기 확신에 가득차서 자기와 다른 이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정신의 파시즘은 우리 생활 곳곳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탐욕적 집착, 질서에 대한 과도한 욕구, 이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 종교적인 독선과 오만 등 가장 집요하면서도 선명해 보이는 이런 것들이 세상을 얼마나 음산하게 만들었던가. 그 속에서 생명은 질식할 뿐이다.” (김기석, <삶이 메시지다>)

자 그렇다면,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의 ‘땅’은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땅을 말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온유한 자’의 전형이신 예수님은 머리 뉘일 땅 한 평 갖지 못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분 마음의 땅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그대로 다 품을 만큼 넓었고, 그가 지나간 마음의 자리에는 마치 황무지가 옥토로 변하듯 새 땅이 만들어지곤 했으니,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온유한 자에게 위로부터 주어질 땅이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럼 죽은 뒤에나 받게 되는 거겠구나, 생각하실 수 있겠는데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이미 ‘보이지 않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은 죽은 뒤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 온유한 자는 하나님 나라가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그 때에 물론 그의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땅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여기 보이지 않게 현존하며 회복되고 있는 이 때에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터전으로서의 땅을 그는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기, 주님과 복음에 헌신된 자들에게 현세에 땅이 약속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땅을 투기와 이윤의 대상으로만 보면, 이 말씀의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땅이 갖는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의미, 요즘 우리가 많이 잊어버린 사실이 있습니다. 땅은 ‘생명의 터전’이라는 사실입니다. 땅은 생명을 받아 안고, 생명을 움트게 하고, 생명을 자라게 합니다. 땅은 또한, 생명이 꽃피게 하고, 생명이 열매맺게 하고, 생명이 또다른 생명을 낳게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 하나님 나라는 그와 같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아픈 생명이 치유되고, 억눌린 생명이 해방되고,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곳입니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광활하지만 풀 한 포기 없이 황량한 땅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 작은 공간인데도, 각종 예쁜 꽃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지나가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화단도 있습니다. 또한 거기서 축구를 해도 될 만큼 넓은 집인데, 늘 찾아오는 이 없이 주인 혼자 지내는 집이 있습니다. 반면 공간도 비좁고 가구도 변변치 않은데, 굳이 사람들이 그 집에 모여서 늘 왁자지껄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가는 집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의 정원은 어떤 모습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관계의 집은 어떤 모습입니까?

온유한 사람은 자기 안에 다른 이들을 위한 여백을 만들며 사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렇게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도록 자기 땅을 내어놓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농부처럼 거기서 일하실 것이고, 마침내 온유한 자는 그가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어느덧 부쩍 자라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온유한 자는 다른 이에게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이 아닐까요?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 살 궁리만 하고, 남을 궁지로 몰아넣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어쩌면 그것은 오늘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무력해서 땅에서 내몰리고 있는 이들에게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 그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그들의 짐을 함께 져주고, 그럴 힘이 없다면 그저 곁에 머물면서 기막힌 사연이라도 들어주는 사람… 그 사람이 있는 곳에는 무언가 새로운 바람이 느껴지고, 새로운 숨이 쉬어지고, 새로운 소망이 싹트지 않을까요?

그렇게 사람들은 거기서 무언가 다른 새로운 세계, 새 생명이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를 마음으로 보게 될 지 모릅니다. 문득 그런 상상을 해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언젠가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보상으로 받게 될 땅이란, 우리가 지금 이 곳에서 이 땅의 작은 생명들을 위한 터전으로 내어놓은, 그리고 하나님이 일구셔서 생명이 약동하는 새 땅으로 바꾸어놓으신, 우리 마음 속 하나님 나라, 우리 관계 속 하나님 나라의 비주얼 버전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 날에 그 땅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은 얼마나 감격스러울 것인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뭔가 대단한 일 한다는 듯 큰 소리 내는 법 없지만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새 생명이 움트게 하는 사람… 뭔가를 억지로 강요하는 일 없어도, 그냥 함께 있다 보면 자꾸 따라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람… 그렇게 그냥 ‘있음’만으로도 세상을 여유롭고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 주시는 땅을 차지할 온유한 자일 것입니다.

이 온유한 자의 복을 누리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