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25년 7월 13일)
- 누가복음 16장 1-15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 눅16,1-15.docx
<누가복음 16:1-15>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 말씀입니다. 어떤 부자에게 그의 재정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주인 귀에 들렸습니다. 아마 일에 실수가 있었거나 일에 태만하여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주일이 그를 불러 말합니다: “내가 들은 얘기가 사실이냐? 장부를 정리하여 제출하여라. 만약 문제가 발견되면 일을 계속할 수 없으리라!” 청지기가 속으로 생각합니다: “일자리를 잃게 됐으니 이제 어떡하지? 막노동을 하자니 힘이 없고 구걸하자니 부끄럽구나…”
그때 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아, 그러면 되겠다! 주인에게 빚진 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거야. 그러면 후에 내가 일자리를 빼앗겨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돼도 그들이 나를 기억하고 자기 집으로 영접할 거야!”
이어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러 각각 얼마나 빚졌는지 묻습니다. 먼저 온 사람이 기름 백 말이라고 하자, 증서에 오십이라 쓰라 합니다. 또 다른 이가 와서 밀 백석이라 하자, 증서에 팔십이라 쓰라 합니다. 그렇게 자기 임의로 빚을 깎아주며 선심을 씁니다.
기름 백 말은 150그루의 감람나무에서 수확할 수 있는 기름이며, 보통 일꾼이 3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임금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런 거액의 빚을 자기 임으로 절반으로 줄여준 것입니다. 또한 밀 백 석은 150명을 1년 동안 먹일 수 있는 식량이며, 보통 일꾼이 7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임금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런 거액의 빚을 자기 맘대로 20% 깎아준 것입니다.
그런데 잘 이해되지 않는 건 이에 대한 주인의 반응입니다. 그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다며 칭찬했다고 합니다. 이 지점에서 독자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이게 칭찬 받을 일인가? 오히려 책망 받아야 할 일이 아닌가? 주인과 상의도 없이 이런 일 벌인 자를 칭찬하다니, 세상에 이런 주인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이 부자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실제로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니까요. 그럼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라면 이 청지기의 행동을 칭찬하실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재물을 늘리는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는 대부분의 부자 주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그분이 지으신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구원을 얻는 데 있습니다.
본문의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얻으려 했습니다. 물론 그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윤리적으로만 보자면 그는 분명 ‘옳지 않은’ 청지기입니다. 여기서 그가 칭찬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오직 하나, 그가 주인이 바라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주인에게 너무 큰 빚을 져서 갚을 엄두를 못 내고 있던 사람들, 그래서 주인 앞에 서는 게 두려워 멀찍이서 마음만 졸이고 있던 사람들, 그들이 그 줄여진 빚 때문에 그들에 대한 주인의 호의를 확인하고, 다시 주인 앞에 나아와 관계를 회복하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 그것이 하나님의 청지기가 주인이신 하나님께 칭찬 받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깨닫게 하시려고 들려주신 비유이지, 일반적인 재정사용법을 다룬 도덕 교훈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예수님 시대의 맥락 속에서 보자면 이 말씀 속의 주인은 하나님, 청지기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책임을 지고 그분의 소유를 양도받은 재산관리인, 하나님의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임무에 성실하지 못했고, 해고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리새인들의 대답은 율법의 규정을 더 단단히 하는 것, 이스라엘을 더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이 손을 내미는 바로 그 사람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 속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중대한 위기 앞에 서 있다면 이제 그들이 해야할 일은 도리어 대담하게 행동하는 것, 가능한 대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 속 청지기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을 교훈하고자 하십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도 재물보다 사람에게 투자하는 게 더 지혜로운 일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재물을 손해보더라도 사람 마음을 얻는 게 장기적으로 더 유익함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걸 잊어버리고 행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것들로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해 섬기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 물질에 집착하여 그들을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지게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불의의 재물’이란 말은 ‘세속적인 재물’, ‘부정직한 재물’로도 번역될 수 있겠습니다. 여기 ‘불의의’로 번역된 헬라어는 앞에서 청지기를 ‘옳지 않은’ 청지기라 말할 때 쓰인 단어와 같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옳게 인도하지도 못하며, 영원히 지속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걸 주인으로 삼아 섬기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걸 목적으로 삼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쓰이면 그만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의역하면 이런 얘기가 될 것입니다.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 돈이란 놈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 별볼 일 없는 녀석을 너무 대우해주지 말고, 다만 그것을 귀하디귀한 사람 얻는 일에 아낌없이 써라!
이와 관련해 두 가지를 더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친구를 사귀라’는 말은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돈으로 상대를 휘어잡아 그가 내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게 만들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 복음이 왜곡될 위험이 큽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뜻인가?
그 물질을 가지고 그 사람도 나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섬기라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억지로 떠밀려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그 나라의 향기를 맡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를 던져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돈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만들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돈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여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의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또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의 이득이나 보상을 바라고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유익을 생각하며 그리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9) 이 땅에서 내게 주어진 것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을 위해 잘 썼던 사람은 그 재물이 없어지고 하나님 나라에 예비된 영원한 집이 주어질 때에 이 땅에서 사귄 그 친구들의 환영을 받으며 그곳에 들어가리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며 이 땅에서 기꺼이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은 모습으로 ‘본향 찾는 자’의 삶을 살았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늘의 관점, 또 종말의 관점으로 오늘 이곳을 바라보며 산다는 뜻이고,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세상에 관여하나 세상과 구별된 모습이 되게 하는 요소입니다.
이 ‘옳지 않은 청지기’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 몇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10) 여기서 대조되고 있는 것은 ‘작은 것’과 ‘큰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 표현하신 그것은 맡겨진 재물 사용하는 일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재물 사용하는 일 말고도 우리가 청지기로서 하나님께 충성해야 할 다른 일, 더 큰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되지 못하다면 큰 것에도 충성되기 어렵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일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3:17)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내 마음대로 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사용하도록 맡겨진 것입니다. 청지기에게 요청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맡기신 이의 마음과 뜻을 바르게 아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야 맡겨진 것을 맡기신 이가 가치 있게 여기는 방향으로 잘 사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바르게 알아가는 길에도, 또 그분이 맡기신 것을 성실히 사용하는 일에도 우리는 충성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하였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대조되고 있는 것은 ‘불의한 재물’과 ‘참된 것’입니다. 재물은 의로운 것도 아니며 참된 것도 아닙니다. 재물 자체가 우리를 옳은 길로 이끌어주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옳은 길로 이끌어주는 의로운 주인에게 충성된 모습으로 우리가 그 재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재물은 우리를 불의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쉽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돈의 힘이 막강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돈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우상을 조각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후에는 그 우상이 사람들을 조각한다”는 밥 하웃즈 바르트의 말처럼, 이미 돈이 우상이 된 사람의 인간성은 어느덧 그 우상을 닮은 폭군의 모습이 되어 있습니다.
돈은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의 인생 속에서 돈을 하나님과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돈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본문 13절에서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가난한 사람이라 하여 돈을 섬기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가난함이 지나친 인색함을 낳는 경우가 있음을 봅니다. 또한 부자라 하여 반드시 돈을 섬기는 자라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그만큼 더 어렵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영생의 길을 물으며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그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그러나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말씀대로 했을 때 하늘로부터 주어질 보화보다 그가 잃게 될 소유가 아마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맡겨진 것을 맡기신 이의 뜻을 따라 충성되게 사용할 때 우리에게 맡겨질 수 있는 ‘참된 것’이 우리가 그 일에 충성되지 못할 때는 우리에게 맡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이 다른 일을 불러옵니다. 충성되게 사용된 재물은 그것이 사라지면서 우리 속에 ‘참된 것’을 남깁니다. 재물은 잘 쓰면 그만입니다. 그 녀석을 너무 대우해주지 마십시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고후4:18).
마지막으로, “너희가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대조되고 있는 것은 ‘남의 것’과 ‘나의 것’입니다. 재물은 ‘남의 것’이라 하십니다. 당연하지요. 맡겨진 것이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나의 것’이 아닌 ‘그분의 것’을 사용하는 일에 충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남의 것’을 맡기신 이의 뜻을 따라 충성되게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비로소 ‘나의 것’이 주어지리라 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요! 남의 것을 잘 쓰는 이에게 주어지는 나의 것!
돈이 ‘돈’인 것은 돌고 돌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은 계속 돌고 돌뿐 결코 ‘나의 것’으로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내게 주어진 것을 주신 이의 뜻을 따라 잘 쓴 사람에게는 영원히 남을 무언가가 주어질 것이고, 우리는 그 ‘나의 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었다고 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땅을 자기네 종교의 핵심 열쇠로 여긴 탓에, 땅의 소유와 그것이 가져다주는 부를 하나님의 축복과 동일시하는 모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5)
스스로 옳다 한다 해서 그 행위가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다 해서 하나님도 그를 훌륭히 여기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 무엇이며 의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알고 행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때로는 정확히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다 들여다 보시며 아신다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공포가 아니라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시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8:2-3)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이 주님의 마음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와 구원을 얻게 하는 일을 위해 내게 맡겨진 것들을 충성되게 사용하며 살라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성되게 사용하며 영원히 남을 ‘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곳에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