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창조의 하나님

<고린도후서 5:17, 요한계시록 21:1,5>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21:1)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계21:5)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위에서 세 개의 성경구절들을 읽었는데, 왜 이 성경구절들을 같이 읽었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맥락도 없고 공통점도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위 세 성경구절에는 ‘새로운 피조물’, ‘새것’, ‘새 하늘과 새 땅’,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롭다’라는 형용사가 공통적으로 등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 구절에서 쓰인 ‘새롭다’라는 형용사는 모두 ‘카이노스’라는 헬라어 형용사가 사용되었는데 그 점에 있어서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헬라어에는 같은 단어임에도 의미에 따라 다양한 용어들이 존재합니다.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 필로스, 에로스 같은 단어가 그 비근한 예가 되겠습니다. 이런 헬라어 단어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를들어, ‘다르다’라는 형용사가 그것입니다. 헬라어에는 무엇이 다른 무엇과 ‘다르다’라는 뜻을 갖고있는 형용사가 두 가지가 있는데 ‘헤테로스’라는 형용사와 ‘알로스’라는 형용사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형용사 헤테로스와 알로스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까요? 형용사 헤테로스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고, 알로스는 본질적으로는 같은데 다른 개체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 두 형용사는 다릅니다.

성경 말씀으로 예를 들어보면 더 명확해질 것 같은데, 예를들어, 질적으로 완전히 다름을 나타내는 ‘헤테로스’라는 헬라어 형용사는 고린도전서 15장 40절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내용을 음미하시면서 한 번 들어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5장 40절입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영광이 따로 있으니” 다시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영광이 따로 있으니” 여기 한글 성경에는 ‘따로 있고’, ‘따로 있으니’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마는 헬라어 원어성경에 보면 이 ‘따로 있다’는 형용사가 바로 ‘헤테로스’라는 형용사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고린도전서 15장 40절을 다시 보면 어떤 의미가 되겠습니까?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는데 하늘에 속한 형체와 땅에 속한 형체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르되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불리는데 부활과 관련하여 생각해 본다면,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육신과 부활 후에 우리가 입게 될 부활체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일거라는 것이지요. 고린도전서 15장 49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반면, 본질적으로 같지만 개체적으로 구별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헬라어 형용사는 ‘알로스’입니다. 이 형용사는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사용되었는데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말씀에서 또 다른 보혜사, 여기 ‘또 다른’에 사용된 형용사가 ‘알로스’라는 형용사입니다. 이 알로스는 위의 헤테로스라는 형용사와 다르게 본질적으로 같지만 구별된 개체를 일컬을 때 사용되는 형용사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 14장 16을 다시 보면 어떤 의미가 되겠습니까? 다른 보혜사 즉, ‘알로스 빠라끌레또스’ 성령님은 예수님과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시지만 예수님과 구별되는 보혜사라는 의미가 되겠고 그럼으로써 이 내용은 삼위일체 신앙을 뒷받침해 주는 내용이 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 세 구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새롭다’라는 헬라어 형용사 ‘카이노스’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해 보기 위해 ‘다르다’는 뜻을 갖고 있는 헬라어 형용사 ‘헤테로스’와 ‘알로스’를 예로 들어 살펴봤습니다.

헬라어에서 ‘새롭다’라는 형용사도 ‘다르다’는 형용사, ‘헤테로스’, ‘알로스’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가 있는데 ‘카이노스’와 ‘네오스’가 그것입니다. 카이노스는 전에 없던 새로운 것 또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나타낼 때 쓰이는 형용사입니다. 영어로, ‘new in quality’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반면, 네오스는 영어로 ‘new in time’을 생각해 보시면 될 것 같은데,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 또는 나이가 젊거나 어린 것을 표현할 때 쓰이는 형용사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카이노스가 전에 없던 새로운 것,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나타낼 때 쓰이는 형용사라고 말씀 드렸는데, 이를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 세 구절들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겠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에서 새로운이라는 형용사에 카이노스라는 헬라어 형용사가 사용되었으므로 위에서 살펴본 대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 것, 구원받기 전의 나는 완전히 없어지고,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된 것, 즉, 구원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거듭남이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 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즉, 구원을, 어머니 뱃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 쯤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구원을, 즉,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것이 되는 것을 석상, 돌로 되어 있는 조각상이 사람,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라고 하였습니다. 석상이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C. S. 루이스는 거듭남이, 구원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되는 것이 석상이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이런 근본적인 변화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변화가 사도바울처럼 극적이지 않아도 됩니다. 지난한 과정을 통해 변화되어도 됩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되었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하고는 확연히 다른 근본적인 변화가 내게 있어야 하고 나타나야 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21:1)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계21:5)

요한 계시록 21장 1절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짧은 한 절 속에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이 세상이 결국 어떻게 되리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고, 역사의 시작과 역사의 끝이 어떠하리란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계시록 21장 1절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댓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에서 ‘새롭다’는 형용사 ‘카이노스’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나타내는 형용사라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이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살펴볼 때, 새 하늘과 새 땅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하늘과 땅일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없어졌다’는 동사는 시제가 과거인데,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져 질적으로 같은 것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이지만 중요한 내용을 모르고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니 요한계시록을 잘 못 해석하고, 이단도 나오고 하는 것입니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에서 바다를 콕 찍어 언급한 것은, 바다는 공중권세잡은 자 즉, 사단이 다스리는 세상을 가리키는데 이 죄악된 세상 뿐만 아니라 공중권세잡은 자, 사단도 멸하여지고 없어질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5절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처음창조’를 하셨듯이, ‘처음창조’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재창조’, ‘새창조’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처음창조의 주체, 주어가 하나님이듯이, 재창조, 새창조의 주체, 주어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새롭다’는 뜻을 같고 있는 헬라어 형용사 ‘카이노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새로운 피조물, 새 것, 새 하늘과 새 땅,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등에서 살펴본 형용사가 그것입니다. 이제 저는 이에 더해 카이노스 형용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신앙내용 몇 가지를 덧붙이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카이노스 형용사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일컬을 때 사용된다고 했으니, 당연한 귀결로, 우리는 먼저 이 세상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무엇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서 5장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라 그런 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라 아주 유명한 문구이고,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그의 주저로 만페이지가 넘는 교회교의학이라는 책을 쓴 사람인데, 그가 쓴 만페이지가 넘는 교회교의학 내용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아마 이 문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라

먼저, 우리는 이 세계가 피조된 세계요 하나님은 피조세계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늘과 땅의 공간 비유가 많이 나오는데 이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카이노스 형용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신앙내용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은 우리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고자 하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보다 나은 세상으로 변화시키시거나 개선시키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을 등한시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재창조’, ‘새창조’를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재창조’, ‘새창조’를 완성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외에 다른 복음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왜 이 복음에서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이상히 여겼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에는 우리가 아무리 울고불고 안타까워하며 발버둥을 쳐도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머리털 한 올을 검고 희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처음창조’가 그러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통한 ‘재창조’, ‘새창조’도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다시 오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 ‘하나님의 백성, 자녀가 된 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 은혜를 마음껏 누리고 이 기쁨을 주변의 소중한 사람과 나누는 삶을 살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