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내지 않는 사랑

<요나 3:10-4:11>

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4: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야고보서 1장 19-21절>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사랑으로 행하는 삶에 관한 성경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또한 말합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나는 건 자연스런 일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성의 일부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화를 밖으로 표출하는 것, 더욱이 그걸 과격하게 표출하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물론 때로 소위 ‘의로운 분노’가 요청되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염두에 둔 상황은 그 상황이 아닙니다.

여기서 ‘성낸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다툼 속에 격분하여 화내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바울은 ‘절대 성내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뉘앙스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역사하면 성내지 않을 수 있다,

즉 다른 사람과의 다툼 속에 격분하며 화내는 일을 피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에 한 ‘성내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선지자 요나입니다.

4장 1절에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누구에게 성내고 있는 건가요? 와우, 여호와 하나님께 성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대략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합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외쳐라!”

그러나 요나는 그 말씀에 순종하기 싫었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 앗시리아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그 악랄한 원수 백성들이 잘 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칠 요량으로 항구로 향합니다.

마침 거기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어, 옳거니 잘 됐다 하며 배에 오릅니다.

한참을 잘 가다가, 난데없이 큰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될 지경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바다 위에 큰 바람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배 밑에서 자고 있다 불려나온 요나는 이 모든 일이 자기 때문에 생겼음을 직감합니다.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 합니다. 그리고 던졌더니 바다가 잔잔해집니다.

물에 빠진 요나는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해놓고 계셨습니다.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니 요나가 밤낮 사흘을 물고기 뱃속에 있게 됩니다.

그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

그 내용이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워, 쉬운 말 성경으로 읊어드립니다.

그 숨막히는 데서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죽음의 뱃속에서 살려달라고 외쳤더니, 그 호소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몸을 바닷속 깊이 던지셨습니다.

물결은 이 몸을 휩쌌습니다. 밀려오다 부서지는 하나님의 물결이 제 위에서 넘실거렸습니다.

하나님 눈앞에서 쫓겨난 몸, 하나님 계시는 성전 쪽으론 두 번 다시 눈도 못 돌릴 줄 알았습니다.

물은 목까지 차 올랐고, 깊은 바다는 이 몸을 휩쌌습니다.

머리는 갈대에 휘감겨, 저 땅 밑 멧부리로 빠져 드는데,

땅은 빗장들을 영영 내려버렸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그 구렁에서 이 몸을 살려내셨습니다.

정신이 가물가물하는데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빌었더니,

그 기도가 하나님 계시는 거룩한 궁전에, 하나님 귀에 다다랐습니다.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저버리지만,

저만은 이 고마움을 아뢰며, 서원한 제물을 드리렵니다.

저를 구해 주실 이,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요약하자면, 막상 물에 빠져 죽을 지경이 되니 살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살려달라 빌었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셨다.

그래서 이제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선지자답게 살리라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 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요나에게 임합니다.

“일어나 저 큰 도시 니느웨로 가서 내가 일러준 말을 그대로 전하여라!”

요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갑니다.

니느웨는 굉장히 큰 도시여서 돌아다니는 데 사흘은 족히 걸리는 곳인데,

요나는 단 하루 동안 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외칩니다.

그야말로 마지못해 대충 전한 것입니다. 내키지 않는 불성실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왕에서부터 가축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금식하며 절실한 회개 모드에 돌입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장 10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는 바로 거기에 화가 난 것입니다.

아니, 화 난 것을 넘어, 격분하여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2절과 3절에서 요나는 아주 묘한 뉘앙스로 하나님께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제가 고국에 있을 때 이렇게 되리라 말씀드렸죠? 그래서 제가 얼른 다시스로 도망치려 했던 겁니다. 제가 몰랐겠어요? 하나님은 애처롭고 불쌍한 것들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는 분이잖아요? 그들에게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고, 사랑이 한이 없으셔서, 악을 보고 벌하려 했다가도 다시 거두어들이곤 하시는 분이잖아요? 그래요… 그렇게 됐네요. 하나님 원하시는대로 됐네요. 그러니 하나님,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 주세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

저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걸 보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다…

요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라는 게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내 동족에게만이 아니라 저 사람, 저 원수들에게까지

그처럼 은혜와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거두어 가 달라는 얘기는, 이제 선지자 노릇 그만 하고 싶단 얘기겠지요.

불과 얼마 전에 물에 빠져 죽어가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빌었던 요나가 아닙니까?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서 그 살려주심에 감사하며 앞으로 잘 해보겠다 했던 요나가 아닙니까?

그러니, 진짜 죽고 싶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 배째라 시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4절에 말씀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이 왜 요나의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앗시리아인들이 이스라엘인들에게 가했던 그 못된 일들과,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아픔과 눈물을 하나님이 어찌 잊으셨겠습니까?

지난 금요일 기도회 때 나눴던 말씀이 시편 9편이었는데요, 거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시9:12)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요나에게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말씀하시는 걸까요?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나는 것을 넘어 누군가에게 화를 낼 때는

내가 그렇게 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전제 위에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닐까요?

이 상황은 내가 충분히 화를 낼 만한 상황이야! 뭔가 문제가 있다구! 이건 아니야!

아마 요나도 그처럼 화를 낼 만한 근거가 있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저런 자들이 회개하고 잘 되면 안 되지… 그 나쁜 짓을 다 해놓고 이제 와서 착하게 된다구?… 그럼 피해자들이 받았던 고통과 눈물의 의미는 뭐가 돼?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성냄의 근거가 과연 얼마나 옳은 걸까요?

설령 거기에 일리있고 옳은 면이 있다고 해도,

과연 그것이 내 맘에 들지 않는 저 하나님의 행동의 근거보다 더 옳다 말할 수 있을까요?

요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성읍 밖 동편에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거기에 초막을 짓고 앉아 그 도시가 장차 어찌 되는가 볼 심산이었습니다.

어디 얼마나 가나 보자, 내가 너 망하는 꼴을 꼭 보리라, 그런 마음 아니었겠어요…

하나님은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가 그 그늘에 더위를 면하게 해주십니다.

요나는 그 박넝쿨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아집니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에 하나님은 벌레를 예비하사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십니다.

그리고 해가 뜨자마다 뜨거운 열풍이 불어오게 하십니다.

박넝쿨은 시들고, 뜨거운 바람에 해마저 강하게 내리쬐자, 요나는 기절할 지경이 됩니다.

또다시 요나는 하나님께 투덜댑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

9절에서 하나님이 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옳으냐?”

이번엔 요나도 지지 않고 맞받아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죽어도 자기가 옳다는 거지요. 바꿔 말하면 이런 얘기 아닐까요?

하나님 나한테 왜 이러세요? 그렇잖아도 마음이 힘든데, 왜 저를 이렇게 괴롭게 하세요? 왜 줬다 뺏어 가세요? 하나님이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그 상황에서 요나가 고통스러우리라는 걸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가 화날 만하다는 걸 하나님도 아십니다.

그런데도 다시 그에게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물으신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이렇게 질문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요나가 성낼 만한 상황 일부러 만들어 놓으시고, 또다시 그 질문을 하신 의도는 무엇일까?

10절과 11절에서 드디어 하나님이 의중을 드러내십니다. 이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요나에게 창조하신 모든 생명들에 대한 그분의 마음을 일깨워주려 하셨던 것입니다.

단지 하루만에 났다가 시들어버린 박넝쿨, 네가 애써 키운 것도 아니고 어쩌다 주어진 그 생명도 네가 그 사라짐을 슬퍼하며 아끼는데, 내가 직접 창조하여 돌보아왔던 저 사람들, 저 뭐가 뭔지 모르고 악에 휩쓸려 파멸해가는 가련한 생명들을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여러분, 자식이 부모 마음 다 이해합니까?

다 이해 못하죠. 그 자식이 커서 부모가 돼야 비로소 조금씩 이해해 간다고 합니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불평에도 물론 일리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식이 그 나이 때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의 더 큰 생각과 마음이 있는 법입니다.

어릴 때 저희 집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서 제가 입었던 옷들은 거의 다른 집에서 받아온 옷들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별로 신경 안 쓰고 잘 입고 다녔는데, 중고등학생 나이가 되니 다른 친구들과 비교도 되고, 제 마음에 불평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어느 명절 날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서울 사시던 작은 어머니 두 분이 옷을 얻어다가 저희 어머니에게 주시면서, 매번 이렇게 헌옷을 드리게 돼서 죄송하다고 말하자, 저희 어머니께서 우리 애들은 신경 안 쓰고 다 잘 입으니 괜찮다, 고맙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제가 격앙된 어조로 끼어들며 이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엄마는 괜찮을지 몰라도 난 안 괜찮아… 사실 내 옷 중에 엄마가 사준 옷이 하나라도 있어?”

그때 작은 어머님들도 당황하시고, 제 어머님도 굉장히 무안해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어머니라고 어찌 제게 좋은 새 옷 사주고 싶지 않으셨을까요…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던 어머니의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을 그때는 제가 헤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내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두 번 연거푸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왜 이 질문이었을까? 하실 수 있는 여러 말씀 중에 왜 이 말씀이었을까?

생각해본 결과 제 결론은, 다른 얘길 해줘도 요나가 지금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 노릇 해보지 않으면 그 부모 마음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요나도 하나님이 아무리 말로 그분 마음 설명해줘 봐야 이해 못할 것 아셨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하실 수 있었던 말이, “화를 잠시 누그러뜨리고 생각해보렴… 네 생각이 다 옳은 건 아닐 수 있어… ” 정도였던 게 아닐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넝쿨 사건을 통해 요나의 마음에 작은 틈을 만드시고,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하셨는지 말씀해 주셨던 게 아닐까…

하나님은 오늘도 무슨 일로 화가 나서 성내는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옳다고 생각하니 성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얼마나 옳은지 한번 더 생각해 보면 좋겠구나…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께 화가 나는 상황은 그걸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 마음 가까이로 이끄시는 상황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했던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더 이해하고, 마침내 그 사랑이 내 사랑이 되고나면,

지금 우리가 성내는 일로 다시 성내게 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구원하시는 일을 왜 저런 방식으로 하셨을까?

저렇게 분노와 불평으로 가득찬 요나를 어르고 달래가며 힘들게 하시느니,

그냥 직접 하시거나, 어디 다른 사람을 통해 하시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았을까?

그러고보면, 큰 폭풍, 큰 물고기, 큰 성읍, 수많은 사람과 동물들이 등장하는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초점은 단 한 사람에게 맞춰져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요나, 그 한 사람에게 그분 마음을 나타내시는 데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말하자면 요나서는 그 요나라는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빚어가시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한 사람’에게 집중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분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을 찾으시며, 바로 그 사람을 통해 그분의 뜻을 펼쳐가십니다.

소위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면서도, 그 마음에 좀처럼 하나님 마음이 담기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으면서도, 번번이 하나님 뜻보다 자기 생각을 앞세우며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 마음처럼 크고 넓어지길 바라시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일이든 하나님과 한마음으로 해나가길 바라시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자면 시간이 오래 걸릴텐데… 그래도 그게 낫다고 생각하시는 게 틀림없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요나를 향해 성내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야말로, ‘성내지 않는 사랑’이 그분이 사람을 대하는 모습 속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한껏 솔직하게 반응하는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마치 어릴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한껏 받으며 자라온 아이가 그러한 것처럼,

요나도 그 하나님의 넓은 품 안에서 한껏 자유롭게 말하고 움직여갑니다.

누군가에겐 그 모습이 좀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제게는 오히려 좋게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라가고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자질이 저런 ‘솔직함’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저렇게 땍땍거리고는 있지만, 저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1:9)

요나가 배 위에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표현하고 있는 그의 정체성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화가 난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요나, 우리가 우습게 볼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무례함요? … 하나님이 괜찮다 하시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입니까?

살면서 성낼 일이 있으면 사람에게 내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께 내십시오.

그 화 나는 상황을 원료로 삼아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십시오.

요나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아직 하나님 마음을 향해 더 자라가야 할

우리 모든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대변하는 인물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요나입니다.

요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분 마음을 향해 섬세하게 빚어가셨던 하나님께서

오늘의 우리도 그분의 ‘성내지 않는 사랑’으로 더욱 온전히 빚어가실 줄 믿습니다.

오늘 신약 야고보서 본문을 마지막으로 간단히 살펴보고 설교를 맺으려 합니다.

19절에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입은 한 개 주시고 귀는 두 개 주신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여러분, 하나님 말씀 듣는 일은 뒤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들어도 그만, 못 들어도 그만, 안 되면 다음 기회에, 할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는 때가 올 수 있음을 얘기합니다(암8:11-12).

예수님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눅8:8) 말씀하셨습니다.

듣지 않는 자가 손해이고, 안 들리는 것이 불행입니다.

또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급하게 내 말을 내뱉기보다, 다른 이의 말에 신중히 귀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성경의 지혜서에는 급하게 말하거나 성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일깨워주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잠언 29장 20절에,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이어 22절에서는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합니다.

또한 전도서 7장 9절은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말씀하고,

신약 에베소서에서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4:26-27) 권면합니다.

이어 본문 20절에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합니다.

성내는 사람의 걸음은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성내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과의 관계도 쉽게 위기에 빠뜨립니다.

경솔하고 통제되지 않은 혈기로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거칠게 내뱉게 되면,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을 당해 낼 생명력이 우리 안에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화가 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문 21절에, 일단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라” 합니다.

여기 ‘내버리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 단번에 해야할 행동을 묘사합니다.

도덕적으로 더러운 것과 널리 유행하는 악이 내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걸 감지하거든,

마치 더러운 옷을 벗어 던지듯, 지체없이 그것을 단번에 내다 버리라는 뜻입니다.

죄는 어르고 달래며 돌봐주거나, 예쁘게 합리화해 간직할 대상이 아니라,

발견하는 순간 혐오하며 내다 버릴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어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권면합니다.

온유함으로 받으라, 이 겸손한 수용은 속히 말하거나 성내는 일과 대조되는 태도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우리 영혼을 구원할 말씀, 즉 사랑의 복음이 심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 더럽고 악한 것들이 있으면, 우리는 그 말씀을 무시하거나 튕겨내기 쉽고,

이어 그 부정함이 성냄으로 폭발하게 되면, 하나님과 진리를 향한 우리 마음이 닫혀버립니다.

그러나 성내기를 더디 하는 일, 즉 화가 날 때 바로 화 내지 않고 잠시 멈추어 생각하는 일,

그것은 어쩌면 작은 일 같지만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올 큰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틈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더럽고 악한 것들을 내버릴 수 있고,

그리하여 다시 온유한 마음으로 내 영혼을 구원할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성내지 않는 사랑은 우리에게 의무로 주어진 계명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만날 때,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 공명할 때,

또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질 때, 우리 삶에 찾아올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서 이 성내지 않는 사랑의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당신의 성내지 않는 사랑이 우릴 구원하였고, 또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빚어오신 줄 믿습니다. 우리의 모난 부분, 못난 부분, 급한 부분, 주님께서 다 받아 안으시며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변화되고 빚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누군가의 수고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깨닫습니다. 저희를 하나님 마음으로 이끌어 주옵소서. 저희 마음이 하나님 마음처럼 더 크고 넓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도 주위 사람들에게 성내지 않는 사랑 행하며 살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