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 예배 (2018년 11월 11일)
- 요한복음 16장 19-24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 - 요16,19-24.docx
<요한복음 16장 19-24절>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구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여러분은 기쁨을 누리며 사십니까? ‘기쁨’이란 말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연상하십니까?
자녀가 웃는 모습을 볼 때, 시험에서 점수를 잘 받아 왔을 때 우리는 기쁩니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얘기를 나눌 때, 수고한 일이 좋은 성과를 거두었을 때에도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하지만 때로 우린 기뻐할 일이 없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인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한 체코 목사님이 크리스천이 된 사연을 적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젊어서 기독교 신앙을 접했는데요, 그 전까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합니다.
세상에 멋지고 아름다운 것들은 왜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걸까?
이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예쁘게 핀 꽃도 좀 지나면 시들어 버립니다.
멋진 가을의 풍광도 얼마 지나면 삭막하게 변해 버립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여배우의 미모도 얼마 지나면 사진으로만 남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새 집으로 이사 가면 단 며칠 좋고 이후엔 그냥 그렇습니다.
사람이 숨을 쉬며 활동하는 기간도 길어야 백년, 더이상 그럴 수 없는 날이 옵니다.
우리가 나의 기쁨이라 생각하는 것들도 언제나 영원히 그렇진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 한 유명한 구절을 알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말씀입니다.
바울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어지는 18절 하반절에서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쁨은 여느 기쁨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얘긴가?
오늘 말씀을 통해 그 기쁨의 비밀을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첫번째 키워드는 ‘해산’입니다.
아이 낳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해산 과정에서 누리는 기쁨과 같습니다.
먼저 본문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수난의 때를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조만간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조금 있으면, 예수님은 잡혀 모욕과 핍박을 겪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또 조금 있으면, 그분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 앞에 다시 서실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우리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지만, 당시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맨붕에 빠진 제자들에게 다음 절에서 예수님이 덧불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직접 경험해봐야 비로소 이해되는 진리가 많습니다. 제자들도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혀 수난을 겪는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근심할 것입니다.
급기야 그분이 죽어 장사되는 모습까지 보면 그들은 곡하고 애통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제자들의 근심과 애통, 그 어렵고 힘든 시간들은 결국 세상에 기쁨을 낳는 일이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영광의 때를 맞게 되면 그들의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하십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인상적인 비유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본문 21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아기를 직접 낳아보지 않은 남성분들은 아마 이 말씀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직접 낳아본 한 여성분의 증언에 따르면, 정말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고통스럽고, 그렇게 원망스럽다가도, 막상 낳고 아기 얼굴 보고나면, 앞엣것들이 뇌리에서 싹 사라지더랍니다.
그런데 사실 남자들도 해산 과정의 고난에 동참하는 면이 아주 없진 않습니다.
혹시나 출산 중에 불미스런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근심도 되고 안하던 기도도 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 힘든 시간을 지나고 마침내 아기 얼굴을 보고나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이전의 고통은 더이상 부정적인 기억으로 남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은 예수님의 길이 그랬던 것처럼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은 자가 적음이라” (마7:13-14)
하지만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가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영광과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인생 말년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4:8-9)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길은 궁극적인 기쁨을 향해 가는 길이지만, 그 여정 중엔 슬프고 아픈 일들과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일종의 ‘해산’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낳기 위한 해산의 과정이요, 그 과정에 슬프고 아픈 일들은 막상 그 낳은 생명을 보고나면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 앞에 있는 기쁨과 보람을 생각하며 오늘의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분이며, 그래서 우리가 그분께 나아갈 때마다 도우시는 분이라 합니다(히4:15-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근심되고 고통스런 현실, 혹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통과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며 인내하십시오!
지금의 고통을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한 해산의 과정이라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처럼 우리 앞에 예비된 기쁨을 바라보며 오늘의 고난을 이겨나가십시오!
때를 따라 돕는 주님의 은혜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은혜로 주님의 길에서 끝까지 승리하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두번째 키워드는 ‘보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가 우리의 마음을 좌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그리스도인만이 보는 특별한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본문 2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얼마 후 이 말씀은 현실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반응을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20:19-20)
한때 근심과 슬픔의 이유였던 예수님 몸에 상처가 이제는 기쁨의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적대감은 여전하고 바깥 현실은 변한 게 없지만,
예수님의 오심과 더불어 그들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더이상 두려움이 그들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이 변화가 어디서 말미암은 것입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보며 ‘새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그들은 예수님이 죽음에 매여 계신 분이 아님을,
이 세상 그 어떤 권력자도 그분을 죽음에 가둬둘 수 없음을,
그래서 그분은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우리 모두를 능히 구원할 수 있는 분임을,
그들이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눈으로 현실을 새로 보게 되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된 것과 같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마음이 그들 마음에 부딪혀와 공명을 일으킨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평강에 공명하여 그들의 마음에 평강이 임하고,
예수님의 기쁨에 공명하여 그들의 마음에 기쁨이 차오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새로 보는 기쁨,
그 예수님의 기쁨에 공명하여 생겨나는 ‘더불어 기쁨’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두려움과 낙심에 사로잡힙니다.
이 제자들처럼 우리도 세상과 타인을 향해 문을 닫아 걸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처럼 갇힌 우리 마음이 어떻게 하면 참된 기쁨을 향해 열릴 수 있을까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늘 다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많건 적건, 직분자건 아니건, 예외가 없습니다.
주님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의 눈과 마음이 늘 다시 새로워져야 합니다!
‘기도’는 바로 그 일이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우리는 보통 궁지에 몰렸을 때 그 문제를 안고 주님 앞에 나아가곤 합니다.
괜찮습니다. 그건 분명 우리가 하나님의 실체와 맞닿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기도가 우리의 상황을 변화시킬까요?
물론 그럴 수 있지만, 그보다는 기도가 나를 변화시키고,
그 결과로 내가 상황에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말이 더 맞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또한 그 예수님을 통해 우리 자신과 삶의 현실을 새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와 관련해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 또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해주신다 합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 말씀에 따르면, 기도의 시간은 무엇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입니다.
기도 중에 우리 몸은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거대한 공명이 일어나는 거룩한 전이 되고, 그 속에서 우리 마음도 함께 공명하며 변화를 경험합니다.
여러분, 기뻐하기 어려운 상황 중에 기뻐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십중팔구 그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 용서하기 어려운 상황 중에 용서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십중팔구 그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찬송은 마음에 기쁨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기도하는 중 그들 마음에 기쁨의 공명이 일어나 찬양이 터져나온 것 아닐까요?
이어서 일어난 지진,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풀어지는 기적은 어쩌면 그 기도하던 두 사람 속에서 일어난 그 거대한 공명의 결과였는지 모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내가 소원하는 바에 세상이 공명해줌으로 말미암는 기쁨을 기대하지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건 아니기에, 내 삶에 기쁨이 적다 느끼며 사는 건 아닌지요?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디에 공명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늘 다시 예수님께 나아가 그분을 바라보고,
또한 그분을 통해 다른 모든 것들을 새로 볼 때,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기쁨에 공명하며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키워드는 ‘이름’입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 신분, 자격, 명예, 권위 등을 나타내지요…
영화로운 이름이 있고 수치스런 이름이 있습니다.
권세있는 이름이 있고 유명무실한 이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영화롭고 권세있는 이름 때문에 누리는 기쁨입니다.
본문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당시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늘에 하나님께 직접 무언가를 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그분이 바로 그들 옆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곧 예수님은 땅에서의 일을 마치고 다시 아버지 곁으로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입니다. 성령을 보내시겠다 하셨습니다.
성령이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능력 있는 주님의 증인들로 세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분의 이름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받으리라 하십니다.
이 약속은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영과 이름을 의지해 살아갈 때, 우리가 충만한 기쁨을 누리리라 하십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보내셨던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말합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이 갖는 놀라운 권세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권세가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이 갖는 권세가 뭔지 분명히 알고, 이를 힘있게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뒤로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일에 담대히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모든 걸 가능케 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공한 사역에 기뻐하는 칠십 인에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여기에도 ‘이름’이란 단어가 등장하지요.
우리가 해내는 그 무엇보다,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소속이 ‘마귀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
우리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우리의 주님이 예수님이라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은 자라는 것,
우리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라는 것,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이런 존귀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어느덧 당연하고 별것 아닌 것처럼 되어버리진 않았나요?
최근에 옥한흠 목사님 설교를 듣다가 아주 신선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잘 아는 내용, 너무나 많이 들었던 애기인데, 아주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목사님이 어느 야외 수양회에서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합니다.
바로 옆에 나무에서 파란 잎이 달린 가지 하나를 탁 꺾어 보여주며 말하셨답니다.
여러분, 이 나뭇가지 살았어요, 죽었어요?
대답은 두 가지로 나오는데, 살았다 하는 이유는 색이 파라니까, 죽었다 하는 이유는 나무에서 끊어졌으니까…
이어 목사님이 전한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삼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데, 첫째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인 죽음은 생명의 원천이시요 창조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 나뭇가지를 보십시오. 지금 모양은 파랗지만 나무 둥치에서 잘려 나왔으니까 이건 죽은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 영적인 죽음이라 합니다.
또 하나의 죽음. 이 나뭇가지 몇일이나 파랗게 살아 있을까요? 일주일 혹은 열흘이면 노랗게 마르겠죠.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길게 살면 팔십년. 그 기간을 일컬어서 생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육신이 죽습니다. 이 나뭇가지가 마르듯이. 이것을 두고 ‘육신의 죽음’이라 합니다. 영적인 죽음 다음에 그 결과로 육신의 죽음이 따라오는 겁니다.
그 다음. 여러분, 이 나뭇가지가 노랗게 마르면 어떻게 하죠? 옛날에 땔감이 없을 땐 농부들이 와서 모아다가 불에다가 넣었겠죠. 이처럼 우리의 육신이 죽으면 하나님께서 진짜 영원한 죽음으로 끌고 갑니다. 이걸 일컬어 심판이라 합니다. 그래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말씀합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영원한 죽음’이라 합니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것이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죽음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육신의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됩니다. 계속 남은 시간은 짧아집니다. 들의 꽃과 같이 시들고 없어집니다. 그 다음에 그것으로 끝나버리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절대 아니라고 합니다. 죄의 값으로 당하는 죽음은 목숨이 끊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진짜 죽음이 기다리는데 그것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지옥이라 합니다. 거기서 죄의 값을 영원히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에는 삼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문제를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전하는 복음은 그 구원의 길을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아들을 통해 여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며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나의 구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그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새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우리의 영적인 죽음이 극복됩니다. 또한 죽음의 공포가 더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죽음은 그저 강 하나를 건너가는 일에 불과합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고, 육신의 죽음 이후에도 그럴 것이며, 그 나라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말씀합니다.
이 단순한 복음이 잠자는 우리의 영혼을 깨우길 바랍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우리의 존재를 규정합니다.
그 존귀한 이름 안에서 우리의 이름도 존귀해집니다.
그 이름을 의지하여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분은 주실 것이고 우리는 기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살길 바라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기쁨은 여느 세상의 기쁨과 다릅니다.
그것은 해산의 기쁨과 같이 인내와 짝을 이루는 기쁨입니다.
또한 그 기쁨은 주님을 바라보고 그 마음에 공명할 때 발생하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예수의 이름 안에서 존귀케 된 자들의 기쁨입니다.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충만히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늘 주님의 얼굴을 뵙고, 늘 주님과 함께 걷고, 늘 주님과 함께 일하며, 늘 주님과 기쁨을 함께하는 우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