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20년 2월 2일)
- 창세기 28장 10-17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야곱의 사다리 - 창28,10-17 - 연합예배20200202.docx
<창세기 28:10-17>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가나안 땅의 남쪽 끝 브엘세바에서 떠나 동방 사람의 땅 하란을 향해 가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야곱, 그를 죽이려는 형의 손을 피해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가던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두려운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는 도보로 약 한 달이 걸리는 먼 거리였습니다. 여행 중에 해를 당할 수도 있었고, 먹고 입는 문제에 대한 대책도 불확실했습니다. 과연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까 염려되고 두려운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외로운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도피 여정은 그의 떳떳하지 못한 행동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을 복을 가로챘습니다. 이렇게 얻은 복도 과연 복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까, 그는 확신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철저히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떠난 지 며칠 후 한 곳에 이르러 날이 어둑해졌습니다. 그 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야곱은 누워 잠을 청합니다. 춥고 무섭고 외로운 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밤에 야곱은 꿈 속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됩니다.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위에 서 계신 것을 보았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동서남북으로 퍼져나갈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
또 말씀하시길,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야곱이 꿈에 보았던 것은 세 가지: 땅과 하늘을 잇고 있던 사닥다리, 그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던 천사들, 그리고 그 위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야곱이 꿈에 들었던 것도 세 가지: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것, 그들에게 주셨던 약속이 야곱과 그의 자손을 통해 이루어져가리라는 것, 그리고 그 조상들과 함께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야곱과도 함께하시리라는 것.
야곱이 잠이 깨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방법으로 그분을 나타내신다는 신선한 깨달음입니다.
이에 야곱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이전의 두려움과 전혀 다른 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힌 자가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 그것은 다른 모든 두려움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신비한 두려움, 결코 싫지 않은 두려움입니다.
이제 그 곳은 야곱에게 특별한 곳으로 인식됩니다. 아무 의미도 없던 중간기착지, 그저 잠시 거쳐가는 곳, 얼른 지나가야 할 곳에 불과하던 그 곳이 이제 성스러운 곳으로 인식됩니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이 계시는 곳,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곳,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장소. 하늘의 문: 하늘이 열리는 곳, 하늘과 통하는 곳,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
우리의 인생 여정에도 두려움과 외로움이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후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염려,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한 낙심 속에서 불면의 밤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고백하는 사람들도, 내가 믿는 하나님이 과연 이 상황에도 나와 함께하실까, 불안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 때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이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내려와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일을 그분은 쉽게 하십니다.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사다리, 그것은 야곱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요? 단지 그래서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 하나님의 집에 이르기 위해서!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의 집’에 이르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좋은 곳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보호받고 채워집니다. 그곳은 익숙한 곳이며 편안한 곳입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우리는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떠나게 하십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를 길 위에 세우십니다.
야곱처럼 우리도 우리 인생의 어느 시점에 내 아버지의 하나님,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의 하나님을 이제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저 머리로만 알던 하나님을 이제 체험으로, 또 가슴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깨닫습니다. 내가 그분을 택하기 이전에 그분이 먼저 나를 택하셨음을.
하나님과의 만남은 과거에 대한 후회에서 야곱을 구출합니다. 그의 과거가 그의 인생을 발목잡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에 야곱은 욕심많은 사람, 복을 얻으려고 앞선 이의 발꿈치를 붙잡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허락하신 것은 그를 통해 다른 모든 사람을 복주시기 위함이었음을. 하나님은 그에게 ‘앞으로 나아가라’ 하십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가라’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또한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야곱을 구출합니다. 그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친히 열어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고 이끄실 것입니다. 그에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그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분은 약속하십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일은 힘을 좀 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또한 현재에 대한 낙심에서 야곱을 구출합니다. 지금 그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십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지금 그는 거기 의미없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이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그가 지금 누워 있는 땅, 거기로부터 하나님의 복이 퍼져나갈 것입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다르게 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어쩌면 예기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 의외의 방법으로 그분은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거기서 변화는 시작될 것이고, 우리 인생의 지평은 새로운 차원으로 열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곳이 될 수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 건물은 ‘야곱의 사다리 교회당’이라 불립니다. 이 곳에 이 이름을 붙였던 분들이 꿈꾸고 소망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이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되기를! 여기 온 사람들이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를! 또한 이 곳이 ‘하늘의 문’이 되기를! 여기 있는 사람들이 여기서 하늘과 통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이것은 허황된 꿈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후에 예수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1:51). 야곱이 보았던 것을 예수님의 제자들도 보게 되리란 말씀입니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눈에 띕니다. ‘인자 위에’ 라는 표현. 야곱의 꿈 속에서 ‘사닥다리’ 위를 오르내리던 하나님의 사자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위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리라 합니다. 예수님이 그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가 되시고, 그 위로 천사들이 왕래하며 부지런히 사명을 수행하는 모습을 우리 믿는 자들이 보게 되리란 말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하늘로 이어진 그리스도의 사닥다리가 이 땅에 닿아 있는 지점이라 할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늘과 통하는 ‘하늘의 문’, 하나님과 만나는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이 ‘야곱의 사다리 교회당’이란 이름 속에 담긴 우리의 소망일 것입니다.
이 꼬빌리시 야곱의 사다리 교회당에 한국인들을 처음으로 초청하고 영접했던 체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자기 집에 들어온 그 나그네들을 천사로 여기며 대했던 분들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았던 한국인 나그네 그리스도인들 눈에도 그 체코의 형제자매들은 천사로 보였을 것입니다.
어느 뜨거운 날 지나가던 나그네 셋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대접했던 아브라함은 잠시 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을 대접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그분에게 한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나그네 된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어디서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찬송 속에 그 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Ubi caritas et amor, ubi caritas Deus ibi est –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우리 모두는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각자 자기 인생길을 걸어가다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다시 또 어딘가로 걸어갑니다.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라지만, 모든 만남이 같은 중요성을 갖는 건 아닙니다. 더 중요한 만남, 특별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 한번의 특별한 만남이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예기치 않게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 옛날 야곱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길을 가던 한 사람이 어느날 이 곳을 지나쳐갈 때, 그는 여기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경험하게 될까? 하나님의 사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위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우리가 그 나그네에게서 듣게 될 말은 이것일 겁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데 내가 알지 못하였구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