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 예배 (2019년 4월 7일)
- 민수기 21장 4-9절
- 설교자: 류광현 목사
- 연합예배 - 민21,4-9 - 20190407.docx
민수기 21장 4-9절
4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 출애굽 후 광야에서 근 사십 년의 방황기를 보내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목적지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에돔 땅을 가로지르는 길이었지만, 에돔 사람들이 통과를 허락하지 않아, 이스라엘은 우회로를 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더 멀리 돌아 더 안 좋은 길로 가야 하는 상황이 되니,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였고, 이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만듭니까? 여기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 매일 주어져 먹고 있는 만나 생각이 났나 봅니다. 바로 덧붙여 말합니다. “이런 하찮은 음식들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그들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주 그래왔습니다. 그들의 부모 세대와 마찬가지로 이 광야2세대들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합니다. 떠나온 이집트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과거 그들이 파라오의 폭정 아래서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께 구해달라 요청했었던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지금 가는 길이 험하고, 원하는 것 누리지 못하니, 하나님이 그들을 광야에서 다 죽이려 한다며, 차라리 이집트 시절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그들을 물게 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거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스라엘 백성도 너무 하고, 하나님도 좀 너무 하신 것 같습니다.
-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뱀은 ‘불뱀’이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독사’로 번역될 수 없습니다. 히브리 원어로는 ‘세라핌’인데, 이것은 ‘불타다’라는 의미의 동사 ‘스랍’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뱀은 단순히 ‘독 있는 뱀’이 아니라 ‘불태우는 뱀’으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그 날의 일은 단순한 자연재앙이 아니었습니다. 그 불뱀들은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이어질 구원을 위해 보내진 도구였습니다. 이사야서에는 그 ‘스랍’ 혹은 ‘세라핌’이란 단어가 여러번 등장하는데, 어떤 곳에서는 ‘스랍’이 ‘날으는 불뱀’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름받는 이야기 속에서 ‘세라핌’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들은 날개 달린 피조물들이며, 신적인 거룩의 불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의 불은 생명을 위협하지만, 또한 그 불이 선지자를 정결케 하였습니다. 한편, 뱀의 상징물들은 당시 고대 근동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집트 왕 파라오의 왕관 앞에는 코브라의 머리가 장식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왕의 적을 향해 맹독을 내뿜는 수호 여신을 의미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뱀의 기능은 왕을 보호하고 적을 파멸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불뱀은 이 파라오의 뱀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분명 그 불뱀은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기능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또한 그것은 그 하나님의 백성을 치유하고 정결케하며 구원하는 기능도 수행합니다.
-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당신을 향해 원망함으로 범죄했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에 모세는 구리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았고, 뱀에 물렸어도 그 구리 불뱀을 쳐다본 사람은 모두 살았다고 합니다. 바로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 3장 14-15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땅에서 높이 들려지셔야 하리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여 죽게 하는 땅 위에 불뱀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치유하여 살게 하는 장대 위에 불뱀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들었던 놋뱀이 전에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들을 살리는 구원의 통로가 되었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려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악 가운데 죽음과 멸망으로 치닫던 모든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통로가 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서 예수님은 또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모세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높이 들려진 구리 불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려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치료책임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 불뱀에 물려 고통을 겪고 있던 사람들이 그와 같은 모양의 구리 불뱀을 쳐다본다는 것이 달가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 꼴도 보기 싫은 불뱀이 그들에게서 완전히 떠나가기를 바랬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다시 또 바라보게 하시고, 바로 거기에 구원의 길을 두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그들을 위한 온전한 치료, 온전한 구원이 단지 그 불뱀에게서 놓여나는 데 있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고통과 불행의 근본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명의 원천 되시는 하나님보다, 그들에게 편한 길, 맛난 음식을 제공해줄 듯한 다른 무언가를 더 의지하고 사랑하려 한 데 있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불뱀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번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것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 불뱀은 그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관계가 어긋난 이유를 상기시켜주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 불뱀을 다시 바라본다는 것은 그 현재의 비극에 내가 책임질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사람,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원망 속에만 있었던 사람은 아마 끝까지 바라보지 않고 죽었을 것입니다.
- 십자가 역시 그 불뱀처럼 바라보기 달가운 대상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일반적으로 유대인에겐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겐 미련한 것이겠지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원 받는 자들에겐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과 상처를 봅니다. 내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끼친 잘못과, 내가 누군가로부터 입은 상처와, 또한 그것들로 인해 우리가 치렀어야 했을 대가가 무엇인지를 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해 그분이 우리 대신 거기에 달리셨음을 깨닫습니다. 십자가는 빛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진리의 빛이요 생명의 빛입니다. 그 빛을 받아야 우리가 삽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한편으론 고통스럽습니다. 거기서 내 추악함이 비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 마음은 자유를 얻습니다. 거기서 내 모든 연약함을 받아 안으시며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높이 들려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빛이 온 세상에 비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그분은 정죄하며 죽이는 불뱀이 아니라 치료하며 살리는 놋뱀입니다. 누구든 그것을 바라보아야 삽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가 그러지는 않습니다. 요한복음 3장 20-21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을 위해 불뱀을 쳐다보라 하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을 일으키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그 불뱀 자체가 그들을 치유하리라 기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뱀은 그 뒤에 역사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온전히 드러내는 통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 구리 불뱀을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살리라 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은 사람만이 그것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불뱀을 쳐다보면 살리라는 말씀은 이제 다른 것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구원의 소망을 두고 나아오라는 급진적인 도전입니다. 후에 이스라엘에는 그 놋뱀을 신처럼 숭배하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이에 히스기야 왕이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 즉 놋조각이라 일컬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왕하18:4). 그 놋조각이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주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련해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릴 구원하길 기뻐하신 이유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처형도구, 혹은 십자가에 달린 죄인 자체가 우릴 구원할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구원하는 능력은 오직 그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이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다시 살렸고, 또한 오늘의 우리를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따르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분의 뜻을 좇게 하는 견고한 영혼의 닻이 됩니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여정에 동참하는 사순절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으며,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켰으며, 또한 그 죽음을 통해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믿는 바이며,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그 모든 효력을 갖게 되었느냐에 대해 설명해주는 여러 유익한 해석들이 있지만, 사실 그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실제 일어났고,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어느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비밀리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전파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우리 사이에 여러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함께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려 우리 가운데 높이 들려지셨습니다. 그분을 바라보는 자는 살 것입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진리를 따르는 자는 그 빛을 향해 나아갈 것이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이를 것입니다. 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모든 사람을 향해 전하시는 복음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아멘.